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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1.01본문
나를 낮추고 주를 높이는 자
1987년 10월 4일 새벽예배 말씀 발췌
우리는 이런 말을 배웁니다.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상대가 변해도 한쪽에서는 변치 않는다 할 때는, 변치 않고 있는 자가 승리한 자입니다. 남을 배반하고 속여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이기는 줄 알지만, 그 자체가 지는 겁니다.
자기가 어떤 여건 속에서 남을 괴롭히고 유리한 위치에 섰다 해서 그게 이기는 줄 알지만, 바로 그 자체가 지는 겁니다. 신앙은 참는 게 이기는 겁니다. 억울함을 당하는 측이 이기는 거지, 억울함을 주는 측이 이기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지난날의 발자취가, 남보다 얼마나 두각을 나타내 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남을 위해서 손해 보는 일을 하면서도 억울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주 앞에 충성을 했느냐, 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억울한 자의 위치에 있기는 싫은 겁니다. 양보를 하는 위치에 있기는 누구나 싫은 겁니다. 이기는 위치에 있고 싶어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해서 자기가 상대방을 눌러 버리는 위치에 있고 싶고, 어떤 의견이 있어도 자기의 의견이 관철되는 걸 좋아하지, 남의 의견이 관철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한 생활 자체가 이기는 것 같지만, 이기는 게 아니고 전부가 지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게 이렇게 까다로운 겁니다.
좋은 것은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돌리고, 나쁘고 궂은 것은 자기가 맡아서 하고자 하는 이런 자세를 갖는 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세를 지닌 사람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좋은 것을 택해서 좋은 것만, 입에 맞는 것만 찾아다니는 사람은 자기 노력으로 끝나고 맙니다. 주님이 도와주시질 않습니다. 그것이 신앙에서 무서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 안에서 직분을 맡아 일해 나가다가도, 대강 보면 감정적으로 일을 많이 합니다. 용두사미처럼 처음엔 누구나 다 잘합니다. 뭐든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반드시 뒤에 허점이 나옵니다. 시작과 끝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걸 앞세워서 심각하게 생각하질 않고, 자기 감정을 앞세웁니다.
자기 기분 좋으면 하고 싶고, 자기 기분이 나쁘면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이건 주의 일이 아닙니다. 그건 자기 일입니다. 주의 일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가 괴로워도, 죽고 싶은 심정이라도 주님을 위해선 내가 이래선 안 되겠구나 해서 견디고 참으면서 주님의 역사에 이득이 가도록 자신을 혹사시키는 겁니다. 그게 주의 일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적은 모임에도, ‘오늘 같은 날은 정말 모이기 싫다. 정말 피곤하다. 내 신앙, 내가 안 나가는데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게 아니라.
‘내가 안 나감으로 주의 역사에 지장이 가지.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기 가서 쓰러져 죽자. 내가 주님을 믿는 이상 주님께 이득이 가는 일을 먼저 해야 된다. 그래야 주님은 복도 주시고, 내가 어려울 때 기도를 해도 들으실 거다. 내가 주를 위해서 움직인 걸 아시니까.’ 이렇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항상 주의 역사에 힘을 기울이고 있을 때 시간이 흐르면 주님이 갚아 주십니다. 길을 열어 주십니다. 어떠한 경우의 돌발 사태가 있을 때 주님은 그때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그런 게 없는 사람은 주께서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이런 데서 차이가 나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