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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0.18본문
세상을 버리기까지
에덴의메아리 6권 chapter 24,
2001년 1월 14일 예배말씀 발췌
오늘에 와서는 우상 숭배의 개념이 상당히 확대되고 있습니다. 즉 우상 숭배란 구약 시대에는 주로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가리켰으나 오늘날에는 주님보다 세상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도 이에 속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마10:37)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돈이나 권력, 명예를 주님보다 더 존중하는 것은 물론 일종의 우상 숭배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돈에 절하고 권력에 절하고 명예에 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신앙인들 가운데 이런 분을 더러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를 붙잡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놓치면 육에 매이고, ‘내’가 살아나게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내 자식, 내 집, 내 목숨을 주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람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불러 주신 것이지, 내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닐진대, 참된 그리스도인은 내가 살기 위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기 위해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14:8)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육이 제일이고, 떠나고 싶지 않고, 정말 고생스러운 생활 속에서도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우리의 본능입니다. 왜 그런가? 바로 현실이 우리에게 모든 조건으로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모든 게 허망하게 된다 하는 불안감, 이것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거죠.
그러나 실질적으로 영의 세계에 가서 우리의 조건이 변화된 상태에서 영의 세계를 만끽할 때는 아마 지상에서 살던 시절을 보여주고서 가라 그러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실질적인 영의 세계를 모르니까, 은혜를 받고 더 좋은 영의 세계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놓고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런 예가 있는 겁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주를 믿던 제자들의 길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의 세계에서 더 좋은 것을 사랑하는 제자들이나 믿는 사람들에게 허락해 주시고자 우선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하셨고 또 그로 인해서 하늘나라에서 엄청난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셨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할 때에 주의 뜨겁고 깊은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고통 속에서 원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느끼는 현실적인 감정입니다.
세상 사는 동안 육적인 축복을 크게 받아서 잘 살면 그것이 제일인 줄 알다가, 도리어 더 좋은 영의 것을 놓친다면, 그것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부귀영화로 인해 영원한 축복을 놓치는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말은 쉽습니다. “세상 부귀영화와 즐겨하던 모든 걸 분토같이 버린다.” 말은 쉬워도 우리가 그것을 마음속으로부터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고 또 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현실을 얼마나 잘 다스려 나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기쁨도 그 기쁨 자체를 주의 은혜 속에서 다스려 나갈 줄 알고, 슬픔도 그 슬픔 자체로 인하여 주님을 더욱 가까이 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드는 적응력.
몸이 고달프면 그런 상황으로 도리어 찾지 않던 주님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지혜. 이것은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한테는 대단히 소중한 일이라고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