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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2.13본문
있는 것을 족한 줄 알라.
1991년 2월 24일 새벽예배 말씀 발췌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메울 수가 없다.”는 말처럼,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은 채울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약1:15) 이렇게 표시를 했습니다.
악이라는 것은 욕망에서 빚어집니다. 악은 탐심에서 우러나오죠. 의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족하게 생각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욕망이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욕심을 냅니다. 무엇이 만들어져도 더 큰 걸 요구하고, 무엇이 만들어져도 더. 이런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여유 있게 생각을 못합니다.
‘나는 남는다. 필요한 게 없다.’ 이런 마음을 갖는 사람은 욕망이 안 생깁니다. 욕심이 없어요. 있는 것조차도 다 만족하다 못해 필요 없는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또 다른 게 필요 있나요?
의를 저버리는 것은 바로 욕심,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겁니다. 원망 불평이 어디서 나오는가? 욕구 불만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너희가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알라.”(히13:5)고 하셨습니다.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알라 하는 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가 해야 될 일을 하실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도 아무 의의가 없다. 내가 도와드리는 거나 내가 없어도 저 사람이 도와서 주님께 혜택을 드리는 거나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는, 상대가 나를 가지고 이런 말 저런 말을 한다 해서, 섭섭해 하거나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를 생각할 때 ‘어떻게 해서라도 내가 뺏어야 된다. 상대방 것을 내가 가져와야 된다.’ 할 때는 나도 모르게 상대를 비방하게 됩니다.
왜냐? 상대방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니까. 내게 있는 걸 족한 줄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것을 뺏으려고 하니까. 그러니까 남이 가지고 있는 게 미워지고 싫어지고, 남이 하는 게 눈에 거슬리게 되는 거죠. 내게 있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지를 않고.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저 사람 위치를 그냥 볼 수 없다. 그걸 밀어내고 내가 거기 있어야겠다.’ 이렇게 되면 거기는 투쟁과 전쟁이 만들어집니다. 싸움과 다툼이라는 건 이런 이해관계가 얽힐 때 만들어지는 겁니다.
이러한 모든 원리는 바로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에게 정착되지 못한 겁니다. 자기가 받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나라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질투 안 합니다. 그런데 자기도 받고 있으면서 자기 받는 것을 남이 받는 걸 싫어할 때 질투가 생기는 겁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5:9)고 했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전쟁의 반대입니다. “시기, 질투, 욕망, 욕심” 이건 전부 전쟁입니다. 화평이 될 수 없습니다.
온유와 자비가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게 돼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비를 베풀 줄 알고, 온유를 베풀 줄 알고, 시기 질투를 이겨야 됩니다.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의 역사 안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각자가 이겨내지 못합니다.
시기 질투는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의 종도 시기 질투가 없는 게 아닙니다. 이기는 것뿐입니다. 근본적으로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감정이고 개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노출시키느냐, 이기느냐?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자가 누구냐? 성령과 물과 피로 거듭난 자가 아니냐?”(요일5:5-6) 이렇게 되려면 고도의 수양이 필요합니다.
치밀어 오르고 분함이 나타나려 할 때, 그것을 자제하는 힘을 길러 가면서 근본적으로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새로이 태어나는, 거듭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