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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8.04본문
마음의 기초가 올바른 자
1986년 10월 4일 새벽예배 말씀 발췌
신앙 생활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기초입니다. 마음의 기초가 올바르게 만들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지는 신앙의 열도는 언젠가 식게 마련입니다.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일구월심 열심히 일을 하다가 그 색채가 변하는 까닭도 바로 신앙의 기초가 올바로 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기초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과거, 감람나무 역사란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이 참 잘못한 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신앙의 의식구조입니다.
신앙의 의식구조를 순수하게 잘 가르쳤으면 좋았을 텐데,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능력은 컸지만 그 의식구조를 심어줄 새가 없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자기가 어떤 직을 맡았으면, 그저 그것이 섬김을 받는 직인줄만 알고 그저 높아지려고만 하고, 자존심만 앞세우고 자기라는 존재 가치만 심으려고 하는. 이러한 것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으례이 명령이었습니다.
신앙 안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누구는 뭐 잘났다. 누구는 뭐 못났다.” 새카만 죄인들이 뭘 잘났다고 하고, 새카만 죄인들이 뭘 남보다도 가졌다고 떠들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 인물이다.” 하는 착각 속에서 살아요, 다들. 어떤 권위의식을 느끼면서. 아랫사람들 의견이 좋든 싫든, 옳았든 나쁘든 뭉개버리는 이러한 풍토가 본인도 모르게 자꾸 심어진다 이겁니다.
백 사람을 좋게 해준다고 한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이게 기독교의 원리인데 한 사람만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억울하게 만들어놓고는 눈 하나 깜빡 안하는 거예요. 사람을 하루아침에 억울하게 매장을 시켜놓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것이 소위 최고의 은혜를 받았다는 그러한 역사 안에서 비일비재하게 움직여졌던 일들이다 이겁니다.
이런 것은 신앙 자체의 출발점부터가 잘못된 겁니다. 그러면 그런 잘못된 가운데서 숫자가 늘어서, “십만 명이다. 백만 명이다.” 하고 자랑할 수 있을지는 몰라요. 남의 눈에는 훌륭하게 보일지 몰라요.
허나 공의를 주장하시고 자비를 주장하시고 희생을 요구하시고, 커질수록 밑거름이 되고 커질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밀알의 역할을 하는 것을 모토로 하는 하나님과 주님 앞에는 그게 올바른 걸로 보여질 리가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럼 그것을 실질적으로 느끼고 사느냐? 느끼고 살지를 못한다, 이거예요. 그럼 왜 그런 풍토가 만들어지느냐? 바로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찬송은 “나를 항상 버리고 주를 따라가겠네.”(합동찬송가 244장) 하면서도 그러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주님보다 항상 앞서서 존재하고 있으니 거기에 순수성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게 자기 죄인 줄 몰라요. 이것이 앞선 역사의 결정적인 오점이었습니다.
거기에 은혜가 많으면 뭘 하고, 거기에 숫자가 많으면 뭘 하고, 거기에 열성이 좋으면 뭘 합니까? “산을 옮겨서 바다에 던질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전13:1-3) 그랬습니다. 가치가 없는 겁니다. 신앙의 기준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했다, 무엇을 했다.” 뭐 나름대로 공로를 앞세우지만, 신앙의 근본 자세가 안 만들어진 사람은 자신은 공로가 있는 거 같아도 그거 인정을 안 합니다, 하늘에서. 기본적인 게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얘기를 하잖아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내가 부탁하는 게 그거예요. “마음을 착하게 가져라. 어질고 착하게 가져야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아깝게 고생한 공로가 사라진다.” 기본적인 것을 내가 여러분들한테 강조하는 원인이 거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