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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9.01본문
진실한 순교자
에덴의메아리 4권 chapter 31,
5권 chapter 5 발췌
기독교 역사를 보면 피비린내를 많이 풍기고 있습니다. 네로 황제의 대학살에서 우리나라 6.25때 교역자들에 대한 무더기 처형에 이르기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믿음의 형제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무참히 쓰러져 갔습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후 근 2천 년 동안에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수는 수백만에 이르는데, 이들을 다 순교자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다 순교자라면 주께서 재림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14만 4천의 천군은 진작 차고 넘쳐 천년왕국이 벌써 이루어지고, 이어서 새 하늘나라가 임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순교자를 가리켜 ‘주를 위해 목 베임을 받은 자’(계20:4)라고 했습니다마는. 이 말씀은 주를 위한 겉사람의 형식적인 죽음이 아니라 속사람의 진실된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 아무런 미련이나 두려움 없이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던진 사람이라야 비로소 순교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한 세대에 몇 사람이 날까말까 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설사 구원을 확신한다고 하더라도 죽음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 권력, 재산, 이 모든 것과의 작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것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주를 앙모하는 마음이 여간 뜨겁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순교란 성령의 감화도 감화지만, 긴 시일을 두고 미리 이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비란 심한 연단 속에서 끝까지 참고 견디며, 십자가를 지려는 각오와 열의가 단단히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은혜를 충만히 받지 않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자기를 의식하지 않아야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인격을 자기 안에 모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를 자기 안에 모시려면 주께서 좌정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이 자리가 마련되지 않아, ‘자기’를 내세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이 주의 것이 되지 못하여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빳빳이 살아 있는 한 주님은 언제까지나 대문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하고 주님 ― 이렇게 단출하다면 문제가 간단합니다. 그게 아니고, 나하고 주님 사이를 한사코 가로막는 마귀가 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샌드위치가 되어 있는 격입니다.
그래서 번번이 은혜줄을 놓쳐 버립니다. 그러니 인내와 열성 없이는 이 길을 가지 못합니다. 연단에 연단을 거듭하여 이기고 또 이겨야만 겨우 주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긴자는 주의 피 권세로 여러분을 주 앞에 다듬어 세워 그 수를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베드로나 바울은 남에게 성령을 부어 주었으나, 이런 사명은 맡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나를 통해 내리는 이 은혜줄을 든든히 잡고 따르라고 누차 말씀드리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이 줄기를 놓치면 첫째,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둘째, 군병의 훈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끝까지 견디고 또 이기기를 바라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