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Part 03 - Chapter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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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6.26
[6권] Part 03 - Chapter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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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3. 새벽별이 빛날 때

Chapter 08. 말씀의 시대적인 배경

 

성경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줄줄이 깊은 진리가 담겨 있지만, 그것은 요컨대인지(人智)의 발달에 어쩔 수 없이 보조를 맞춰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한 것이므로 시대적으로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활과 창으로 싸우던 시대의 사람과 원자탄과 레이저 광선 무기로 싸우는 시대의 사람에게 하실 말씀은 자연히 다르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선지자를 내세워 새로운 지시를 내려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한 것도 이런 시대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들 선지자들에게 지시한 내용을 하나로 묶은 것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따라서 이 구약성경은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대적인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이 제약을 크게 해소시킨 것이 주님의 4복음서입니다.

 

그러나 이 4복음서 역시 당대의 여건을 참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주님은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지 못하고 다른 보혜사 성령에게 미루었으며, 바울을 비롯한 몇몇 사도들이 이 성령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의 성령을 충만히 받아 4복음서의 내용을 보충하고 심화시킨 글을 한데 묶어 신약성경으로 펴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신학자들이 연구 발표한 글이나 선교사나 목사들이 외친 설교는 이 신구약성경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에 와서는 우리가 적어도 근 이천 년 이전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믿음을 키워온 셈인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주의 뜻은 물론 주님의 말씀이 기록된 4복음서에 나타나 있으며, 우리는 이 말씀에 의해 행동 기준을 정합니다. 즉 이것은 주께서 기뻐하시니 해야 하고, 저것은 주님이 원치 않으시니 하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이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4복음서에 기록된 주의 뜻은 지금부터 이천 년 전의 것으로, 깊은 내용은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6:12-13)라는 주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주님은 제자들까지도 포함한 당시의 사람들이 당신의 정체를 알아주지 않으므로 정작 하나님의 아들로서 해야 할 깊은 말씀은 거의 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4복음서에는 중요한 말씀들이 많이 빠져 있습니다.

 

그 후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바울을 위시하여 성령을 받은 몇몇 사도들이 4복음서의 내용을 많이 보충하기는 했으나, 그들이 받은 성령이 불의 한 증거에 그쳤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연히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도 아직 더 보충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밧모 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주신 주님의 계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은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2:17)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물론 박 아무개, 이 아무개 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경륜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즉 불의 한 증거가 아니라, 불과 생수와 이슬 이 세 증거의 보다 강한 보혜사 성령으로 역사하는 이긴자가 나타나면 사도 바울보다도 더 깊은 말씀이 쏟아져, 그 역사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 인도하며, 주의 뜻이 더욱 분명히 부각되게 마련입니다.

 

이긴자는 물론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될 일을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주님은 세 증거의 다른 보혜사 성령을 충만히 받은 이긴자를 통하여 이 땅에서 생전에 못하신 말씀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긴자는 상대방의 신앙 단계에 따라 새로운 말씀을 서서히 터뜨리게 됩니다. 이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이상 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뵙고 새로운 지시를 받았으나 이 사실을 14년 후에야 발설하고, 그나마 그 내용은 상대방이 감당치 못할까봐 밝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젖을 주고, 좀 자라면 죽을 먹이고, 이가 돋아나면 밥을 주는 것처럼, 영의 양식인 말씀도 상대방의 소화 능력을 고려하여 차츰 깊은 내용을 들려주게 됩니다. 영적인 꼴을 먹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전도할 때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대하고,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할례 받은 사람에게는 할례 받은 사람처럼, 무할례자에게는 무할례자처럼 대하여 융통성을 보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나도 아직 여러분이 영의 단계가 어리기 때문에 보류하고 있는 말이 많습니다. 아니 이긴자에게 준 흰 돌에 기록된 이름에 대한 내용은 아직 거의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습니다. 감당치 못할 말은 안 하니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서서히 터뜨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계에서는 주께서 근 이천 년 전에 하신 말씀의 내용도 잘 알지 못하여 절절 매는 형편이며, 여기에 좀 색다른 해석을 첨가하면 대 신학자로 추앙을 받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주께서 하시지 못한 깊은 말씀을 터뜨린들 어떻게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강한 성령의 파이프는 아무 데나 있지 않고 한 곳에만 있습니다. 물론 그 파이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지만, 동시에 역사하지 않고 교체가 이루어져 항상 한 곳에서 은총의 샘이 솟아납니다.(14:8)

 

일찍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섭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치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상달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거치지 않고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든 의식은 헛수고에 그치고 맙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이렇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맡기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 하시고 베드로를 통하여 은혜를 받도록 했습니다. 주님은 이 언약에 충실하여 고넬료에게 은혜를 직접 베풀지 않고 천사를 시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서 그를 통하여 은혜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그 후 주님은 바울을 내세워 새로운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것은 곧 할례를 폐지시켜 이방인에게도 전도의 문을 활짝 개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신도들은 이구동성으로 바울을 몰아 세웠습니다. 시대에 따라 펼쳐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를 미처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똑같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면서도 서로 대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에덴성회의 역사는 크든 작든 하나님의 새로운 섭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 역사에 일일이 간섭하고 계시며, 주의 종은 그때그때 하늘의 지시에 따라 양떼들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당신의 종, 곧 이긴자를 통하여 역사하고 계시며, 이것이 바로 주의 뜻이자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주의 뜻을 받들어 그 섭리 안에 거하는 길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얻게 되어 있는데, 구태여 이긴자를 통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새로운 섭리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긴자에게 내린 큰 은총에 의해 하늘나라가 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긴자가 나타난 이상, 이 섭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것이 주의 뜻을 받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영수가 미워도 주께서 들어 쓰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따라야 하며, 이영수가 못나도 주께서 같이하시는 이상 그 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간 이영수는 부인해도 그를 통하여 흘러내리는 하나님의 금 기름’(4:12)은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실패했건 성공했건 초림하신 주의 유일한 길 예비자였던 것처럼, 이영수가 잘났건 못났건 주께서 세우신 이긴자라는 것은 성령이 증거하는 것입니다.

 

일찍이 주님은, 가까운 제자들까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어느 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빛과 같이 희어져 모세,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17:1-3)

 

갑자기 빛난 구름이 이들을 덮자,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17:5)는 음성이 들려와, 그제야 세 제자들은 주님의 정체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마음이 완악하다고만 탓할 수는 없는 것이, 육을 입고 세상에 묻혀 사는 인간은 워낙 영의 눈을 뜨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이 세 제자에게 당부했습니다.(17:9) 말해도 곧이듣지 않고 오히려 욕이 될 테니까요.

 

이것으로 우리는 주님 당시의 형편과 처지를 헤아릴 만합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들이 어슴푸레하나마 먼저 알게 되었다는 것은 여간 큰 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수제자 베드로만 하더라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을 확신하기까지는 많은 파란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영적인 말씀을 던졌을 때, 바리새인들은 네가 몇 살인데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거냐?”(8:57)고 윽박질렀습니다.

 

이런 말씀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 앞에서 주님은 차라리 벙어리 행세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보는 상대편인데, 주님이 거꾸로 바보 행세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 싸움의 한 양상입니다.

 

오늘날 이긴자의 원리에 대하여 깊이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긴자에 대해 대충 알고 있을 뿐, 아직 잘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원에 좀 더 분명히 알 날이 올 것입니다. 감람나무의 가지로 접붙임을 튼튼히 받으려면 이긴자가 무엇인가를 우선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계시록에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3:12)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긴자가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되어 주께서 그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