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Part 03 - Chapt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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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6.27
[6권] Part 03 - Chapt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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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3. 새벽별이 빛날 때 

Chapter 14. 믿음과 의심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것은 어미니 뱃속에서부터 죄를 짊어지고 태어나 육에 매여 있는데다가 마귀가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여건 아래서 살고 있으므로 영의 세계를 잘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믿음을 잘 간수할 수 있겠습니까? 큰 은혜 가운데 부름을 받아 신령한 것을 맛보고도 믿음이 제대로 서지 못하여 비틀거리는 것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물론 육만이 아니라 혼도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기로 된 것입니다. 이 혼은 많이 더럽혀지고 적게 더럽혀진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은 이것을 발판으로 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즉 우리의 혼은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수신기(受信機)입니다.

 

그런데 이 수신기는 녹이 잘 슬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이켜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다 육의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깊은 철학적인 진리를 탐구하고 아름다운 예술을 창조하는 것도 영의 세계와 인연이 먼 경우가 태반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거의가 인간의 재능으로 하는 일이며, 성령을 힘입어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의 외부세계를 살펴봅시다. 우리를 에워싼 이 우주는 해와 달과 별이 찬란하고 광대무변하여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우주의 공간에 있는 수백억의 별에서 출발한 빛이 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우주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넓고 큽니까! 실로 천문학적(天文學的)인 숫자로도 측량할 수 없는 것이 이 우주입니다.

 

그러니 이 별들이 무너지고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의 세계를 어찌 인간의 머리로 짐작할 수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고전2:10) 영의 것은 영의 것으로만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많은 과학자들은 다른 천체에도 생물체가 살고 있지 않나 해서 깊이 연구해왔으며 오늘날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구에서 제일 가까운 달에 인간도 살고 있을지 모른다고 예상했으나, 막상 가보니 인간은커녕 공기도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수많은 천체 중에서 오직 이 지구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인간이 살 수 있도록 공기를 갖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 밖에서 태초에 인간보다도 천체를 먼저 지으셨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 우주에 그 많은 천체를 지으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자식이라, 지구에서 밤에나 저 무수한 천체를 한낱 허공에 반짝이는 별로 희미하게 바라볼 뿐, 우리에게 직접 쓸모가 없지만, 죄짓기 이전의 신령한 아담, 하와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육을 입고 있으므로 달에 가려고 해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특수한 우주복을 입고서야 비로소 1초에 40리 가는 속도로 사흘 반 걸려 달을 밟아볼 수 있으나, 흠과 티가 없던 아담, 하와는 영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눈 깜빡할 사이에 달은 물론 다른 모든 천체에 자유롭게 내왕할 수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우리가 이웃마을에 가듯이 천체에 놀러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이 우주는 한 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지음을 받은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였으니까요.

 

그러나 타락한 아담, 하와의 후손인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겨우 제 발로 걸어서 해발 8,847미터의 에베레스트에 올랐다고 해서 장하다고 떠들어대는 처지입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그 후손인 우리는 육을 입고 있어 영이 그만큼 크게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육을 벗어버리고 신령한 영체가 되면 신의 요소로 온전히 환원하기 때문에 범죄 이전의 아담, 하와와 같은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우주에 끝이 있느냐의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해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의 신비를 운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우주보다 훨씬 신비로운 세계에 가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세계는 막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신문에서 보아 알고 계시겠지만,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공자나 석가와 같은 한갓 성인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영의 것을 알 수 없다는 대표적인 한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반대하는 다른 신학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양쪽 다 막연하기는 매일반입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긴가민가한 것입니다. 그래도 영생의 소망 하나 바라고 일생을 고생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하늘에서 오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유일한 사자(使者)입니다. 우리는 이 사자를 통하여 영계와 접선이 됩니다. 이런 영적인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떻게 영의 세계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는 적어도 지금부터 2천 년 이전에 있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사도 요한이 주님과 교류한 내용이 오늘날 20세기에 와서 비로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비밀이 이 단상을 통하여 터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 가운데 부름을 받아도 듣는 사람의 귀가 신령해지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그릇의 신령한 정도에 따라 이해하는 깊이가 다르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것은 주 앞에 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이것을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곧 주님 중심의 생활입니다.

 

여러분은 설사 불우한 역경에 놓여 있을지라도 그것을 괴롭고 귀찮게만 여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여건으로 간주하고 믿음을 키워나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시키십시오. 평안한 환경 속에서는 믿음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자기 신상에 원치 않는 어떤 구멍이 생기면 채우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므로, 이것을 신앙의 활력소로 삼아야 합니다.

 

바울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어찌 이 길을 가면서 태평하기만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각자 제 몫에 매인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