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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3.01본문
Part 03. 역사의 증인들
Chapter 06. 어린 양 이삭
1) 믿음과 순종
아브라함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나타나 예고한 말씀 그대로 소돔, 고모라의 두 성을 멸하는 것을 목격하고, 악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움직임이 어떻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어 여호와를 더욱 두렵게 섬겼습니다.
또한 나이가 이미 백 세나 된 자기에게 역시 예언 그대로 아들을 낳게 하신 여호와의 크신 권능과 특별한 은총에 감격하였습니다. 그가 아들 이삭을 애지중지하며 고이 기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이삭이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젖을 떼는 날을 기념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자리에서 여종 하갈의 소생인 열다섯 난 이스마엘이 시기하여 이삭을 조롱하므로, 사라가 하녀의 자식으로 감히 무슨 건방진 수작이냐고 아니꼽게 생각하여, 남편 아브라함에게 당장 그들 모자(母子)를 내쫓으라고 성화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으로서는 비록 여종의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어엿한 자기의 핏줄이므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심히 번민하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사라를 두둔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들도 네 씨이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21:12-30)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눈을 피해 이튿날 새벽에 떡과 물을 주고 하갈로 하여금 정든 집을 떠나게 했으며, 이스마엘이 장성하여 애굽인 아내를 맞아서 자손을 두었으니, 이들의 후손이 곧 오늘날 석유 파동으로 유명한 아랍 국가들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가로 거치는 자를 제거하여 아브라함의 사랑을 독점하도록 환경을 조성하였으므로, 이삭은 부친의 사랑을 이스마엘보다 백 배나 더 받아 귀염둥이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이삭을 당신에게 번제(燔祭)물로 드리라고 일렀습니다.(창22:2)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절초풍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은혜 체험에 의해 믿음이 독실해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백 세에 얻은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이튿날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 이삭에게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힌 후, 하인 두 사람을 데리고 이삭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곳을 향해 먼 길을 가면서 마음의 착잡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도, 한편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손으로 하여금 땅의 티끌처럼 셀 수 없을 만큼 번성케 하리라던 언약을 상기하였습니다.
‘이삭이 죽으면 대가 끊기는데, 그렇다면 여호와의 언약은 거짓말이 되는 게 아닌가? 정말 이삭을 처참하게 불살라 죽이실까? 그럴 리가 없겠지.’ 아브라함은 이 생각 저 생각이 수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길을 가던 이삭이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그런데 제물로 드릴 양은 어디 있어요?”
여러분, 이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시치미를 떼고 아들에게 대답했습니다.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이미 마련해 두셨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상 중에 보여 주신 장소에 단을 쌓고 장작을 얹은 다음, 아들을 결박하여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때 여느 자식들 같으면 아버지에게 항의하여 도망칠 테지만, 이삭은 아버지가 하는 대로 묵묵히 몸을 내맡겼습니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딱 감고 칼을 들어 아들을 찌르려는 순간, 천사가 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실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하나님의 사자가 말했습니다.
2) 주님의 그림자로서의 이삭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신앙 척도를 시험하신 데 그치지 않으며,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어린 양의 역할을 하여 일단 단상에 제물로 오른 이삭은 바로 주님의 그림자로서, 여호와께서는 일찍이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보내기로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리라고 지시한 모리아 산으로 말하자면 감람나무가 많아 감람산이라고 불렸는데, 솔로몬 왕 때 성전을 건축하였으며,(대하3:1) 이 감람산 중턱에 바로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 언덕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저주 받은 바 되어 이 땅에 오셔서,(갈3:13) 죄인이 달리는 형틀을 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떤 조건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서는 ‘저주받은 자’요 ‘인자’요 ‘천사보다 조금 못한’(시8:5)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예언한 대로,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이’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또한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사53장 참조) 주께서 이와 같이 천사보다 못한 존재로 속죄의 제물이 되시지 않으면 죄에 빠진, 저주받은 인간을 구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한’ 주님의 얼굴은 육적인 어머니 마리아를 닮았으나, 진정한 주님의 얼굴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마17:2) 감히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땅에 계실 때 평소에 각별히 가까이한 세 사람의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및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 모세와 엘리야를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실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들 세 제자는 이상 중에 잠깐 눈부신 주님을 뵈었고, 또한 구약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의 지팡이를 짚은 모세와 약대 털옷에 가죽 띠를 두른 엘리야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된 주의 피는 오늘날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주님의 죽음은 이른바 많은 성현(聖賢)들의 죽음처럼 흙으로 돌아가 버리고, 생전의 가르침이 우리의 정신적인 유산으로 남아 있어 수시로 우리를 일깨워 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주께서 흘려주신 피는 산 제물이 되어 오늘날 우리 죄를 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진실(眞實)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짐승(송아지, 양, 비둘기)을 잡아 제사를 드리고 사함을 받았지만, 이들 제물 자체의 피가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제사는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 흠과 티가 없는 정결한 주께서 우리 죄를 위해 산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가 저지른 죄를 완전히 씻어 소멸시키는 길이 열렸으며, 따라서 구약시대처럼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 주께서 산 제물이 되었으니 아무나 교회에 나가 앉기만 하면 다 구원을 받게 되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구원이 그렇게 쉽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주님이 십자가에서 산 제물이 되었다고 해서 교회 문을 드나들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 것입니다.
그 조건이 바로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물론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살과 피는 무엇을 가리키며, 또 어떻게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단 말입니까? 이 살과 피가 문자 그대로 주님의 육적인 살과 피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천 년 전에 돌아가신 주님의 살과 피를 지금 먹고 마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살과 피는 죄를 씻는 생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슥13:1) 따라서 이 생수를 받는 것이 다름 아닌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이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 이긴자를 통해 불과 생수와 이슬로 내리고 있습니다.(계21:6-7) 이것은 여러분이 직접 체험하는 그대로이며, 이와 같은 하늘의 은총은 아무 때나 그리고 어디서나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의 종을 잘 만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세상에서, 초등학교 수준밖에 가르칠 수 없는 선생에게 가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대학을 졸업한 학사의 자격을 갖출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키워 나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목자의 권능과 영력(靈力)이 양떼를 어느 단계까지 인도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양(量)보다 질(質)을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시들한 만 명보다 믿음이 독실한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