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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3.15본문
Part 03. 역사의 증인들
Chapter 07. 승리자 야곱
1) 12지파의 형성 과정
인류의 역사는, 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 당신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이며, 따라서 거기에는 자연히 하나의 계획이 필요합니다. 여호와께서는 하늘나라를 회복하기 위해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일을 처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직체계를 갖고 다스려 나가십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믿음의 조상을 내세우시고, 야곱을 통해 12지파를 형성케 하시며, 당신의 백성을 따로 선정하시고, 율례와 법도를 마련하셔서 그 백성들의 언동을 규제하시고, 일정한 절차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주께서 12사도를 세워 하늘의 법도를 전하게 하시고, 그 후로 교회라는 조직체를 통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해 오신 것입니다. 또한 성경 말씀대로 앞으로 형성될 영적 이스라엘의 치리(治理)도 12지파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계7:5-8)
여기서 잠깐 육적 이스라엘이 된 야곱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야곱은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그랬듯이, 아들 야곱도 여호와의 특별한 축복으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즉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이미 늙었고 잉태하지 못하였으나, 이삭의 간구가 상달되어 리브가가 쌍둥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가 태속에서 서로 싸우므로 견딜 수가 없어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이상중에 여호와께서,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뉘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우가 형을 물리치고 장자의 명분을 이어받아 크게 번성할 것을 미리 알려주신 것입니다.
리브가는 두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형은 에서요, 아우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야곱’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란 히브리어로 ‘발뒤꿈치를 붙잡는 자’라는 뜻이며, 이때 이삭의 나이는 60세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에서는 성격이 우락부락하여 사냥을 즐기고 야곱은 천성이 온순하여 가사를 돌보았으므로, 에서는 자연히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많이 받게되고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몹시 시장한 김에 마침 야곱이 먹으려던 죽을 달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농담 삼아 “형의 장자의 명분을 내게 팔라.”(창25:31)고 했더니, 에서는 시장기를 채우려는 생각이 앞서 장자의 명분을 선뜻 내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에서가 여호와의 축복이 담긴 이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긴 중대한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야곱은 이렇게 해서 넘겨받은 장자의 명분을 아주 자기것으로 완전히 굳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어머니와 짜고 눈이 어두워진 늙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까지 형 에서에게 주려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즉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 네가 형제들의 주(主)가 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7-29)는 이삭의 축복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장자인 에서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간계이든, 속임수이든 일단이와 같이 축복을 따내면 그만이며, 결코 취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에서는 이 사실을 뒤늦게야 알고, 야곱의 소행이 하도 괘씸하여 야곱을 죽여 버리려고 했으나, 야곱은 이미 하나님의 큰 은총을 입고 있는 몸이라 이미 형 에서는 그의 적수(敵手)가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다시 야곱을 불러, 가나안 사람을 아내로 취하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딸을 취하도록 일렀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겐 혈통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는 도중에 해가 저물어 돌을 베고 누워 자다가 꿈에 본즉, 웬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에 닿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더니,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야곱에게 이렇게 언약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즉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28:13-15)
그는 잠에서 깨어나 자기가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전’임을 알고 거기 돌기둥을 세우고, 하나님이 주는 것에서 십분의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릴 것을 아뢰었습니다.(창28:22)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두 딸 중에서 눈에 총기가 없는 언니 레아보다 얼굴이 한결 아름다운 라헬에게 마음이 쏠렸습니다. 그는 7년이나 봉사한 끝에, 동생을 먼저 시집보낼 수 없다는 외삼촌의 말에 따라 결국 레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창29:18-26 참조) 다시 7년 동안 더 봉사하기로 하고 라헬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야곱은 두 자매를 아내로 삼게 되었습니다.
전처인 레아는 아들을 넷(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이나 낳았으나 후처인 라헬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라헬은 질투심에 불타 야곱에게, 왜 언니만 사랑하느냐, 나도 아이를 낳게 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리겠다고 윽박질렀습니다. 야곱이 아이를 낳고 못 낳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대답하자, 라헬은 야곱을 자기의 몸종 빌하와 동침케 하여,
아들 둘(단, 납달리)을 낳게 되었고, 라헬은 자기가 언니와 경쟁하여 분풀이를 했노라고 자못 으스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레아도 자기 시녀 실바를 남편 야곱에게 첩으로 주어 이들 사이에 또 아들 둘(갓, 아셀)을 얻게 했습니다.
이후에 레아는 다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다섯째가 잇사갈이요, 여섯째는 스불론입니다. 이어서 라헬이 하나님의 긍휼함을 입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유명한 요셉(‘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는 뜻)입니다.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간 후 라헬은 둘째 아들 베냐민을 낳아(창35:17-18) 도합 12지파의 시조가 여호와의 뜻 가운데 탄생했습니다.
즉 야곱이 거느리게 된 네 아내 중에서 레아의 소생은 야곱의 장자 르우 벤과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고, 라헬의 소생은 요셉과 베냐민, 빌하의 소생은 단과 납달리이며, 실바의 소생은 갓과 아셀, 도합 12명이 그들입니다.
2) 이스라엘의 유래
우리가 야곱의 행적(行績)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은혜를 받기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그를 함부로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갖은 간계를 다 부려 형 에서에게 내릴 하나님의 은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배고파 허덕이는 에서의 허(虛)를 찔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슬쩍 앗아가는가 하면, 아버지를 속여가면서 에서에게 주려는 그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면 세상에 이런 후레자식도 없을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성급한 사람은, 그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불의와 불법을 권장한단 말이냐고 항의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도리로 볼 때에는 지당한 말이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법도와 일반 성도의 도덕 사이에 서로 부합되지않는 일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성경을 풀이하면 실망과 의혹이 앞서고 때로는 자기 나름의 의분 같은 것까지도 느끼게 됩니다.
야곱이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것은 앞에서도 말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입니다.(창25:23 참조) 결국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그만큼 귀중히 여겼다는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섣불리 야곱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전혀 해당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경우는 주님 당시의 극성스러운 중풍 환자와 도 다른 것입니다. 즉 주께서 병을 고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실 때, 주위에 사람들이 하도 많이 모여 붐비므로, 어떤 중풍환자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지붕을 뚫고 주님 앞에 내려와 축복 받고 병을 고쳤습니다.(막2:4)
그가 남의 집 지붕을 뚫은 것은 분명히 파괴 행위이지만, 주께서는 오히려 그의 극성을 너그럽게 보아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야곱은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했습니다. 야곱만큼 하나님 제일주의로 생활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형 에서와 화해하러 가는 도중에, 얍복 강가에서 이상 중에 천사와 씨름하여 환도뼈가 휘도록 안간힘을 다해 이겼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창32:25) 여기에도 우리는 야곱의 ‘극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천사와 겨뤄 이겼다 하여 이긴자, 곧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33:28)
야곱의 특수한 성격의 하나는 ‘적극성’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네 사람의 처, 첩을 통하여 아들 열둘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야곱의 경우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이 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것을 묵인했을 뿐더러 때로는 강요하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바로 이런 강요된 케이스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밖에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다윗,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아무튼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어 크게 들어 쓰신 일꾼은 거의 다 많은 처들을 거느렸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분은 이런 점을 들어 기독교를 공박하고 하나님을 등지는가 하면, 한편 어떤 사람은 이것을 곡해하여 자기가 저지른 음란죄를 변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일종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자기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바울의 말은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고전2:15) 또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만한 특권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여느 사람과 똑같은 위치에서 법도에 매어 있어야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나 나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인식을 주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지장이 많습니다. 이런 점은 오늘날 민주국가에서 대통령도 법률을 준수해야 하는 것과는 판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이 처첩을 많이 거느리는 데는 하나의 조건이 따르게 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인정된 일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는 물론이고 처첩을 거느린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미리 그런 육적인 축복도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왕상3:13)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들어 쓰실 때 반드시 어떤 언약을 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서가 아니라 자기의 정욕을 위해서 한 짓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견책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윗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이 자기의 정욕에 못 이겨 우리아의 아내를 취했을 때 다윗의 소행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 아들을 잃어야 하는 하나님의 견책을 받았던 것입니다.(삼하11:27 참조)
한편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여인을 멀리하고 독신으로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분부나 자의에 의해 그렇게 되는데, 전자의 예로서 예레미야를, 후자의 예로는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당시의 환경과 여건이 아내를 거느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