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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4.06본문
Part 04. 진리의 샘
Chapter 14. 이것이 기독교이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쟁이를 싫어합니다. 그 책임의 일부는 물론 우리에게 있습니다. 즉 우리가 부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쟁이가 더 고약하다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에게 죄송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바울도 “자기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롬15:2)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쟁이가 더 고약하다.”는 이 말은 한편 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뭔고 하니, 이 말은 기독교를 수도의 한 방편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수도를 중요시하지만, 거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원죄와 유전죄 및 자범죄에 매인 인간이 그 죄를 주의 피로 씻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려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종지부를 찍고 눈물과 한숨을 모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여 영원한 복락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소망이나 욕구치고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환상적인 꿈이 아니라, 적어도 믿을만한 이론(말씀)과 체험의 터전 위에 서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실’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수도에 그친다면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노소와 우양(牛羊)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6:20-2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다음의 일이었으며,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을 여호와께 바치고,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수6:17)는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린이까지 죽이고 기생 라합은 건지다니, 여호와께서 너무하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생각이고, 여호와의 뜻은 이와 다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신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이 어긋나는 경우를 간혹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물론 여호와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차질이 생길까요?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의 크신 경륜과 기독교의 원리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귀히 여기시고(시116:15)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겔33:11) 하물며 죄 없는 어린아이가 죽는 것을 기뻐하실 리가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당신의 크신 뜻을 위해 작은 희생을 무릅쓴 처사라고 하겠습니다. 그 크신 뜻이란, 전에도 말했지만, 마귀의 세력을 소탕하고 복된 하늘나라를 이룩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지난 6천년 동안에 움직이신 모든 역사는 오직 이 뜻을 이루기 위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여리고성을 함락시켰을 때 ‘육체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무서운 위력(偉力)을 과시하여 당신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을 두렵게 섬기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군대가 될 자격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기르려고 하셨으며, 이 경우에 다소의 희생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여호와의 부득이한 일이며, 여호와의 본의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박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22:3)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여호와의 뜻을 모르면 구약에 나오는 무자비한 많은 살육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깊은 사정을 도외시하고, 인간의 생각으로 그 행적을 헤아리면 기독교 자체를 곡해하기 쉽습니다.
많은 사상가나 학자들이 기독교를 외면하는 이유의 대부분이 이런 데 있는 것으로 보아도 저간의 소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도 죄를 저지르면 가차 없이 벌을 내렸으며, 이방인은 마귀의 편에 선 자이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서슴지 않고 처단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을 함락시켰을 때 더욱 심각한 문제는 기생 라합의 구제에 있습니다. 즉 성내의 어린이까지도 무참히 죽였는데, 기생 라합은 여호수아의 사자(使者)를 숨겨 여호와의 역사에 동참했다고 해서 살려 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호와의 역사에서는 죄의 유무(有無)나 다소(多少)보다도 여호와의 뜻에 얼마나 이바지했느냐가 더 중요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는 것입니다.”(욥22:30)
만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누구보다도 중이나 도인(道人)들이 제일 먼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속세를 떠나 인적이 끊긴 한적한 데서 그야말로 눈길이나 마음이나 죄에서 멀리 떠나 깨끗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원의 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오늘날 주님의 복음은 세계만방에 널리 퍼져, 주를 믿노라하는 자가 너무 많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세계 방방곡곡에 교회가 들어서고 찬송가 소리가 하늘을 진동할 지경이지만, 여호와께서 필요로 하는 하늘의 군대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이겠습니까?
마지막 때 천군의 대열, 곧 멜기세덱의 반차에 서려면 이를 위해 하나님의 섭리가 베풀어지는 은총 가운데 부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몫을 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특별히 세우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선지자라고 해서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겔14:10) 이 경우에 선지자 자신은 물론,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똑같은 죄과의 응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영도자는 자기 일신상의 사정보다 자기를 따르는 양떼들을 먼저 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좋은 본보기를 모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로부터 자기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크게 당황했으나, 자기가 이끌어 온 양떼들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해 달라고 여호와께 구했던 것입니다. 모세의 위대한 점은 그 권능에 있지 않고 바로 이런 높은 덕성(德性)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때 모세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버틴다면 하나님도 일단 기름을 부어 세운 이상,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으므로 당장에 물러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어 초대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사울이 죄를 범하자 후회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삼상15:11)
사울은 모세와는 달리 다윗이 자기 후계자로 등장하는 것을 여러 모로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도 입장이 난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신이 몸소 기름을 부어 내세운 사울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사울 왕에게 격동의 악신이 내리게 하여(삼상18:10) 어느 정도의 시일을 두고 당신의 위신이 별로 손상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서서히 세대교체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움직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전과 같은 기분에 따라가는 어린 신앙생활에서 떠나 좀 더 무게 있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말씀으로 튼튼히 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