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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4.25본문
Part 04. 진리의 샘
Chapter 17. 교회의 일꾼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 구약시대와는 달리, 특히 오늘에 와서는 여러 가지 교회 사업에 부인들의 힘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여호와께서 육적으로 역사하였으므로 나약한 여자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특히 현대에 와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사회 각 분야에 여성들이 적극 참여하여 일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여성들에게 많은 일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실제로 부녀자들의 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이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여호와의 새로운 복음(딤전1:11)을 전할 때, 부녀자들이 그 뒷바라지로 많은 수고를 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녀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애로가 많습니다. 남편 시중을 들랴, 아이들을 기르랴, 그밖에 자질구레한 가정 살림에 매어 심방 한 번 하려고 해도 시간을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 생활을 하려고 해도 방 하나 변변히 마련되어 있지 않아 밤에나 조용히 기도하려고 하면 애가 보채기 일쑤이고, 할 수 없이 이불 속에서 기도하려고 하면 이번에는 자던 아이가 깨어나서 울어대어 정신을 빼앗기기 쉬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마귀는 참 악착스러워 좀 잘 믿어 보려고 하면 으레 훼방을 놓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기 위해 돈을 떼어놓으면 딴 데 쓸 일이 생깁니다. 마귀가 뒤에서 교묘히 조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돈을 쓰고 나면 좀처럼 다시 메우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역시 뒤로 미루지 말고 먼저 바쳐야 합니다. 나도 전에 생활고에 몹시 허덕여 봤기 때문에 없는 가운데 하나님께 헌금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흔히 가까운 사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가령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눈물 뿌려 기도하고 한동안이나마 은혜 가운데 깊숙이 젖어 있다가 집에 돌아가면 아이가 속을 썩이거나 남편이 시비를 걸어와 비위를 잔뜩 긁어 놓기가 일쑤입니다. 이때 이것이 마귀의 농간이라는 것을 알고 감정 처리를 잘 해야합니다.
그렇지 못하여 화를 발끈 내거나 맞싸움을 하면, 이건 여러분이 마귀에게 당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모처럼 받은 은혜는 고스란히 쏟아버리고 백지로 돌아가,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은혜 받기가 훨씬 어려워집니다.
이와 같이 은혜를 쏟았다가는 다시 받고, 받았다가는 또 쏟아버리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 여러분의 실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나마 착실히 믿어보려는 사람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일이며, 그렇지도 못한 사람에게는 이처럼 마귀가 괴롭히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괴롭힐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조리 자기의 변변치 못한 신앙과 결부시켜, 사사건건 마귀의 농간이라고 자기 나름의 해석을 내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식구들에게 이런 마귀의 농간이 따르는 것은 부인 못할 사실입니다. 이런 시험은 직분을 맡은 사람에게도 으레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만큼 마귀의 눈에 난 것입니다. 이들은 괜히 교회 일이 싫어지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짜증을 내기 쉽습니다. 이럴 때 마귀의 계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 쉽지, 실제로 당해 보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경우에 여러분의 제일 큰 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주께 고하여 이것을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몇 번 이기면 마귀는 단념하고 다른 수법을 쓰게 됩니다. 즉 전술(戰術)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을 물리치면 마귀는 또 다른 데를 찌릅니다. 이것도 물리치고 해서, 번번이 이기고 또 이기면 나중에는 마귀가 손을 들게 됩니다.
이와 같이 환경에 시달리면서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가는 길입니다. 예수 믿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쉬운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자세로 적당히 따라가는 믿음이 그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마10:38) 이래서 되겠습니까?
마귀는 우리보다 단수가 더 높습니다. 그러므로 여간해서는 이기지 못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마귀를 피할 생각을 말고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피하면 그만큼 약세에 몰려 불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환경을 바꿀 필요도 있습니다. 즉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지장이 없도록 자기 주위를 정돈하는 것입니다.
가령 생활 방식을 바꿔 본다든지, 대인 관계를 달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식구 중에 믿지 않는 분이 있으면 어디까지나 사랑으로 대하여 그들에게 부덕을 끼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남이야 어찌되었든 나만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벌써 마귀의 올가미에 걸려든 것입니다.
나는 나이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마귀가 주는 시험은 누구보다도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모든 시험을 무난히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은혜가 줄곧 연결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딜 가나 주께서 나와 같이한다는 생각이 앞서면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국무총리와 같은 직위에 있었던 사람이지만 무서운 이상을 보고 기절하여 며칠 자리에 누워 앓았는데,(단8:27) 사도 요한이 다니엘보다 몇 곱절 더 무서운 계시를 보고도 끄덕하지 않은 것은 지켜 주는 성령의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의 주의 종도 보혜사 성령이 지켜 주지 않으시면 감당하지 못합니다.
내가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에덴성회는 한 교파가 아니며, 여느 교회와는 다릅니다. 마귀가 우리 식구들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그렇습니다. 즉 마귀는 여러분을 제일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알게 모르게 괴롭히려고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자주 체험할 것입니다.
마귀는 무엇 때문에 여러분을 그처럼 미워할까요? 여러분께 하나님의 은총이 강하게 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 중에 마귀의 도전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을 반성해 보면 잘 아실 것입니다.
식구만 늘면 일단 부흥한 것으로 알았다가는 오산입니다. 교인의 수가 늘어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심령이 다듬어져 변화되는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양(量)보다 질(質)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이는 숫자보다 깨끗한 심령을 귀히 여기십니다.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주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조금만 짐이 무거우면 곧 벗어 동댕이치려고 하고, 상대방의 언동이 조금만 비위에 거슬려도 토라지는 따위의 성격은 고쳐져야 합니다.
사랑은 기독교의 대강령(大綱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사랑하기는 고사하고, 미워한대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너는 없어도 나만 있으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요컨대 주가 내 안에 있으면 그만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전력투구(全力投球) 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아도 주님이 몰라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눅16:15)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은 하나님은 물론, 사람에게도 칭찬 받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역시 누구나 명심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해서 성령이 “꽁치만 먹고 갈치는 먹지 말라.”는 식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감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