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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5.09본문
Part 04. 진리의 샘
Chapter 21. 인간의 생각으로 성령의 역사를 판단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는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중대한 국면(局面)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분도 많을 것이며, 또 안다고 하더라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자다가도 눈을 뜨면 먼저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지금쯤 모두들 잠들어 있겠지. 무슨 꿈들을 꾸고 있을까? 아직도 세상에 매여 있는 이 어린 심령들을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주님 앞으로 인도해 가나?’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나이로 보면 내 아버지나 아저씨, 또는 어머니나 아주머니뻘 되는 분들도 많고, 목회의 경험으로 말해도 아득한 선배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 내가 감히 여러분을 ‘어린 심령’이라고 말한 것은 단상에서 젠체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날고 기고 해도, 미안하지만 이 손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언약 가운데 베풀어지는 주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따라서 그 반열에 설 수가 없습니다. 나도 어떻게 해서 이런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어리둥절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왈가왈부할 것이 못 됩니다.
마치 도끼를 든 사람이 맘대로 이리 찍고 저리 찍는 것을 보고 도끼가 군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내가 남달리 주님께 매달렸거나 똑똑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 것만은 사실입니다. 매달리기로 말하면 나보다 몇 곱절 눈물 뿌려 주님에게 매달리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며, 또 이 넓은 세상에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더욱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믿음이 전혀 없는 건달이거나 어리석은 바보라고 구태여 위악(僞惡)을 가장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아니, 나도 남 못지않게 주를 뜨겁게 사모한 것으로 자부하고 싶고, 나도 세상에 나가면 남만큼은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청춘을 바쳐가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 뛰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어디 예수 믿을 타입입니까? 그야 타입으로 예수 믿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마는. 나는 이제 사사로운 몸이 아닙니다. 좋든 싫든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선 나부터 크게 경치실 테니 어떡합니까? 그래서 내가 이 단을 지키는 것을 ‘팔자소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은 주님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쥐어진’(슥4:10) 격입니다. 이 은혜의 다림줄은 일찍이 수많은 선지자와 성도들이 꿈만 꾸고 구경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을 수밖에 없던 하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감히 상상조차 못할 일입니다. 심지어 앞선 하나님의 큰 종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끝난 성령의 앞선 역사는 거들떠보시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큰 은혜 가운데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좋아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남달리 여러분이 예뻐서 부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시키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영광이 클수록 그 사명도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이 역사는 요컨대 주께서 하시는 마지막 사업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하여 이러니저러니 논할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여러분 중에 만일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도 물론 하나님의 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이런 실수를 저지르기 쉽습니다.
하긴,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이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덕을 세우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예컨대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거나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전혀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신앙생활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이런 경우입니다.
여러분, 주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에게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위대한 선물, 곧 구원의 길을 트시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 몰골은 참 초라했습니다.
즉 어제까지만 해도 목수 노릇을 해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던 한 시골 청년이 불쑥 사람들 앞에 나타나, “날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요10:9 참조)고 큰 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2천 년 전에 살아서 그 광경을 보았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도 꽤 기가 찼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2천 년 역사가 주님을 인정해 주니까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러러보지만, 당시의 주님은 문자 그대로 한 시골 목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의 말을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주께서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병을 고친다고 사람들이 빈정대고, 제자들까지도 인간의 생각으로 주님을 판단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주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한 자리 하려고 했으며, 인간의 생각으로 주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히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을 결코 영적으로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돌아가신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언약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주의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으며, 따라서 주님에 대한 인간적인 자기 나름의 이미지를 좋아했을 뿐,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사랑하고 또 존경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음에 모세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봅시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그가 자기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패와 죄악에 못 이겨 격동한 나머지 이방인 구스의 여인을 아내로 삼았을 때, 그의 형제자매인 아론과 미리암까지도 모세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율법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간의 생각으로 그 혼인의 부당성을 지적하여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책벌을 받았습니다.(민12:8)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가 잘 되기를 바라고, 또 누구보다도 모세를 아꼈기 때문에 그렇게 했는데, 오히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모세의 후대 여호수아를 따르는 제2세대들은 여호수아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그 예로,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의 태도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에 여리고성은 가장 견고한 요새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면 이 성을 어떻게 해서든지 함락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일곱 제사장들을 앞세워 나팔을 불며 성 밖을 돌게 할 뿐, 무장한 장정들에게 쳐들어가 싸우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린 지시를 따른 것이지만, 모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대뜸 항의했을 것입니다.
“아니 강적을 맞아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나팔만 불고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기만 하니, 이런 비겁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여호수아가 섣불리 하나님의 지시 내용을 발설할 수도 없는 것이, 그렇게 하면 금세 마귀의 귀에까지 누설되어 여리고성의 적들은 더욱 방비를 튼튼히 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어련히 알아서 하랴 싶어, 말없이 순종함으로써 드디어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여리고성이 함락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란 이런 것입니다.
사울이 인간의 생각으로 여호와의 지시를 어겨가면서까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좋은 양과 소를 남겼을 때 여호와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삼상15:11) 선지자 사무엘이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고 충고하기에 이른 것도 사울이 하나님보다도 인간의 생각을 앞세워 일을 처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율법에 매이지 않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또 그래야 하나님의 일을 앞장서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자기의 특권을 좀처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설사 법도에는 어긋나지 않더라도 자기를 따르는 어린 심령들에게 누를 끼치고 부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이 방면에 제일 신경을 쓴 하나님의 사람은 바울이었습니다. 그는 형편이 어려운 교인들에게 폐가 될까 하여 식사 한 번 대접받는 것도 꺼려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의 심경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바울을 비방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의 언동이 바울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바울은 기가 막혀, “누가 자비량(自備糧)하고 병정(兵丁)을 다니겠느냐? … 우리가 너의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고전9:7-11 참조)고 이들에게 반문하고, “이런 권리를 쓰지 않고 범사에 참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서 낳았다.”(고전4:15)고 자부한 고린도 교회 신도들에게, 다시말해서 영의 젖으로 자식들을 기른 어머니가 그 자녀들에게 하는 책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을 이처럼 섭섭하게 한 건 이뿐만이 아닙니다.
당시의 바울은 주로 배를 타고 고린도 교회까지 전도 여행을 다니느라고 약간의 전도비가 들었는데, 이것을 일부 인사들이 비용이 많다 적다하며 물의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마게도냐 교회의 신도들은 어려운 중에도 풍성한 연보를 하여 하나님의 사람의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정성껏 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힘겹게 자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를 섬기는 일에 참여한 것을 치하했습니다. 그가 베드로와는 달리(고전9:5) 일생을 독신으로 마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긴 큰 사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도, 심심찮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 남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는 바울의 말은 이들을 겨냥한 설득이자 경고였습니다.
바울과는 정반대로 자기의 특권을 남용한 하나님의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세상에 부덕을 끼쳐 하나님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즉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친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고만 계실 리가 없습니다.
만일 그런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무능한 하나님이라기보다 죽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역사가 빗나가면 반드시 이를 바로잡으시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입증하는 바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을 되찾는 것이 우리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리고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는 유가 아닙니다. 모세 때는 눈에 보이는 육적인 역사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 역사의 그림자밖에 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내 말에 잘 따라 주지 않고,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조금 어려움이 닥친다고 해서 뒤에서 불평이나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해 두지만,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나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큰 소리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산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도 우리의 역사를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만일 그런 중차대한 역사가 아니라면 남의 욕을 먹으면서까지 내가 청춘을 바쳐 일할 필요가 어디 있으며, 또 여러분이 그 많은 교회를 두고 여기 따로 모여 예배를 볼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는 경제가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의 하나입니다. 남북통일도 그렇습니다.
통일은 하나님께서 남쪽을 날로 부강하게 하는 반면에 북쪽을 날로 쇠퇴 일로를 걷게 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만 해결하려 하면 될 것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 땅에 하나님께서 크신 은총을 내려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날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마10:39) 나는 주님의 이 뜻을 받들어 우리의 위대한 과업을 슬기롭게 완수하기 위해 목숨과 시간과 청춘을 다 바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 뒤를 따르는 여러분도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명예로운 하늘의 일꾼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전에는 멜기세덱의 반열에 참여하려면 순교해야 하였으나, 지금은 순교하지 않아도 되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앞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이것이 내기도의 제목입니다. 나는 어제를 돌아보지 않고, 언제나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심정으로 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나를 밀어줘야 내가 힘을 얻을 수 있고, 하늘에서는 더욱 큰 은총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달라고 투정하기 전에 우리는 땅에서 할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의 은혜가 공로의 대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게으른 자에게는 주의 은총이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이유가 많은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영의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라만 오십시오.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라기보다 큰 불찰입니다. 그 때문에 시험에 들어 떨어진다면 그 사람만 손해를 보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여러분에게 무조건 맹종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 종이 하나님의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일에 대해선 말없이 순종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 경우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주의 종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잘 도울 수 있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얼마든지 건설적인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또 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는 순종이 있을 뿐이며, 일을 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서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순종할 일과 비판할 일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금년은 도약의 해입니다. 여러분은 심령이 더욱 맑아지는 동시에 이 역사를 이웃에 전하여 한 생명이라도 더 많이 이 은총 가운데 인도해 주셔야합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우리의 울타리가 확대되면 나는 하나님께 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길 고하려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주께서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떳떳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여건만 마련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영적으로 보다 더 깨끗해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별로 힘쓰지도 않는다면 내가 하나님에게 은혜를 더 달라고 간구할 수 없을뿐더러, 간구해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