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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8.17본문
Part 01. 흰 돌의 증언
Chapter 1. 사랑에 대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기독교를 가리켜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나는 여기서 이 사랑에 대하여 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이성(異性)과 이성간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육적 및 감각적인 사랑 말입니다. 이 사랑은 옛날부터 문학의 중요한 테마(主題)가 되어 왔으며, 여러 모로 아름답게 장식되었지만, 요컨대 세상에 후손을 남기려는 것이 주요한 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사랑을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이보다 좀 더 단계가 높은 사랑으로서 정신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쾌락을 떠나 정신적인 기쁨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정신적인 사랑보다도 더 차원이 높은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이른바 ‘아가페의 사랑’으로,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성도들끼리의 사랑으로 나눠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사랑이, 즉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의 대강령(大綱領)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무리한 주문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피조물이 창조주를 사랑하다니 될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듯한 느낌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또 가능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대표적인 실례를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베드로나 스데반의 순교가 그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죽도록 사랑했던 것입니다. 이 경우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주님은 일체이시므로 하나님이 곧 주님이요, 주님이 곧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14:9)고 말씀했습니다.
주님을 이처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 그러니까 목숨까지 기꺼이 바쳐서 사랑하는 사람을 주께서는 당신의 아내로 삼으십니다. 이 주의 아내가 곧 하늘의 군대이며, 주께서는 이 하늘 군대의 수가 차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계6:11) 이 수가 차서 원수 마귀를 완전히 꺾어야 하늘나라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수를 채우는 역사가 오늘날 바로 이 단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 모인 여러분은 다 목숨을 바쳐서 너나없이 순교해야 하느냐? 그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는 특별한 은총 가운데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주께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웃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믿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이웃이요, 또 하나는 믿는 이웃입니다. 에덴성회의 식구들이 바로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그럼 믿지 않는 이웃에 대하여 우리가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들을 생명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주님을 기쁘게 하여 많은 죄를 가리며, 기도에 응답을 받는 하나의 조건이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은 관용(寬容)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우리는 그를 이해하기가 쉽고, 따라서 너그럽게 보아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저들을 사랑하기는커녕 미워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금기(禁忌)가 많습니다. 즉 성령을 거스르지 마라, 혈기를 내지 마라, 하고 온통 하지 말라는 것투성입니다. 그런데 이 ‘하지 말라’는 요구에 그치지 않고, 하라는 주문도 여간 많지 않습니다. 예배에 자주 참석하여라, 전도에 힘을 기울여라 등등, 아무튼 여간 귀찮지 않습니다.
사실 은혜를 받았으니 망정이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하라’ 또는 ‘하지 마라’ 하는 가르침은 요컨대 ‘사랑’ 하나에 흡수되며, 따라서 사랑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하였으며, 사랑이 있으면 온유하여 질투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연히 덕을 이루게 된다고 했습니다.(고전13:1, 4)
그런데 세상에서는 기독교의 사랑을 불교의 자비(慈悲)나 유교의 인(仁)과 같이 하나의 기본적인 덕목(德目)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기독교 자체가 도덕 이상의 생명의 종교이고 보면, 사랑도 덕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마5:44)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다니,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즉 우리가 원수로 생각하던 자가 원수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범죄만 놓고 상대방의 행위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 원죄와 유전죄까지 곁들여서 인간을 보시기 때문에 누구를 막론하고 새까만 죄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은, “네가 상대방을 원수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도 너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려면 이런 주님의 눈으로 인간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와 같은 참된 인간관(人間觀)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원수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무슨 짓을 하든지 오냐오냐하고 덮어주고 쓰다듬어 주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사랑에는 서릿발 같은 매서운 면이 있습니다.
바울도 만일 형제의 이름을 가진 자가 악한 짓을 하면 어울리지도 말라고 했습니다.(고전5:11) 우리는 그때그때의 정상(情狀)에 따라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고, 또 달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