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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8.17본문
Part 01. 흰 돌의 증언
Chapter 2. 부활의 의미
성경에는 하나님의 감춰진 경륜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아리송한 데가 많으며, 또 영이 맑지 못한 우리로서는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여느 책들과 다른 특징의 하나입니다. 오늘은 우리 에덴성회를 발족하고 세 번째 맞이하는 ‘부활절’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에 그치고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면 기독교 자체가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기록은 주를 따르던 제자들이 보고 들은 내용을 당시에 바로 쓴 것이 아니라 수십 년 후에 쓴 것이며,
성령을 받은 은혜의 단계가 각각 다르므로 부분적으로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핵심은 동일합니다. 그 중에서 마태가 이상 중에 본 아래와 같은 장면은 좀 특이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27:50-53)
이 말씀은 마태가 본 계시를 그대로 기록한 것이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히 실명했습니다. 휘장이 찢기는 순간, 구약시대의 제사는 폐지되며,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란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종들과 순교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죽음을 며칠 앞두고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마16:13)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선지자의 한 사람, 이렇게 여러 가지였습니다. 이것으로도 우리는 주님이 당시에 얼마나 수수께끼의 인물로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사람들은 주님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께서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인 줄 아느냐?”(마16:15) 시몬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그를 베드로(반석)라고 부르시고,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고, 그에게 천국 열쇠를 맡길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16:19)라고 말씀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최대의 특권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다음에 주께서는 오랫동안 숨겨온 심각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잡혀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베드로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 마옵소서.”(마16:22) 하고 만류했습니다. 주님은 물론 베드로의 이런 심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는 것이므로, “사단아 물러가라!”(마16:23) 라고 크게 책망하시고 사사로운 정(情)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은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진 스승의 이와 같은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육과 영의 견해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성미가 괄괄한 베드로는 몰래 칼을 품고 다녔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해치려는 자가 나타나면 처치하려는 심산에서였습니다. 즉 베드로는 어디까지나 육적으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님을 잡으려는 제사장의 하수인을 쳐서 그 귀를 떨어뜨렸을 때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하고 주님은 책망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께 제공한 무덤에 묻혀 있던 사흘 동안에, 하늘에서는 주님의 시신을 천사를 시켜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본래 영체로 우주의 창업에 하나님과 동참하신(요1:1) 주님에게 죽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창조주 되시는 주께서 희생의 제물이 되기 위해 이 지구에서 잠시 입었던 육신을 벗어버렸을 뿐입니다.
죽음이란 육신에서 혼이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일단 육신을 떠난 혼이 다시 육신에 깃들면 장본인은 살아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예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요11:43)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런 재생(再生)이 아니라, 육신이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주의 생명, 곧 성령을 받은 자들이 홀연히 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고전15:51)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마28:1-3) 이 천사는 일찍이 마리아에게 주님의 잉태를 예고한 가브리엘 천사장입니다.
하늘에서는 주님이 태어났을 때부터 부활하실 때까지 줄곧 이 천사장을 시켜 보호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 천사장이 주님의 육적인 장막을 순식간에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무덤 속에 세마포만 남고 주의 시체가 없어진 것은 이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영의 세계에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 부활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어떻게 된 걸까요? 영의 세계를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신학자나 교역자들 중에도 기독교의 진수인 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원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며,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관하지 못할 줄을 앎이라.”(롬6:8-9)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모시고 죽으면, 그리스도가 사신 것처럼 우리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란 혼이 육(肉)을 떠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인간의 혼은 언제까지나 살아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그 혼이 육의 장막에 있을 때 하나님의 편에서 움직여 영원한 빛 가운데 거하느냐, 아니면 그 혼이 마귀의 편에서 움직이다가 영원한 암흑 속에 떨어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신은 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것으로, 그릇은 깨어져도 혼은 그대로 남게 됩니다. 성경에 “육은 무익하다.”(요6:63)고 말한 것은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간수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결국 부활을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그렇게 쉽게 몸에 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베드로를 비롯한 주의 제자들과 측근들의 움직임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과 날마다 침식을 같이하다시피 하면서 주님의 귀한 말씀을 직접 듣고 놀라운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목격했으나, 주를 메시아로 거의 믿지 않았다는 것이 행동에서 드러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만두고 수제자인 베드로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는 주님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주님의 예언대로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마26:75) 이것은 제사장들 앞에서 무참히 당하는 주님을 보고 베드로가 겁이 더럭 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지 못한 탓도 있지만, 그 때 혼자 있었으니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도, 다른 제자나 주를 따르던 당시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유대 나라의 해방자로서 왕이 될 줄로 생각하고, 평소에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는 주님이라,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쩔쩔매도 록 권능을 행하여 굴복시킬 줄 알고 있었는데,
웬걸 제사장들에게 붙들려가서는 뺨을 얻어맞고, 발길에 채여도 꼼짝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베드로는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는 예수를 전혀 모르며 본 일도 없다고 세 번이나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까지는 괜찮다고 칩시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얼마 전에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부활하여 갈릴리로 가겠다고 일렀습니다.(마26:32) 갈릴리로 말하면 주께서 처음으로 전도를 시작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부활하신 증거를 되도록 여러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해 제자들과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혜택만을 기대했던 베드로는 주께서 세상을 떠나자 크게 실망한 나머지, 부활이고 뭐고 생각할 경황도 없었습니다. 그는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주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를 확인하려고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까지도 눈 감아 준다고 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육을 벗어버리고 영체로 화하였으므로 인간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로 가려면 이와 같이 변해야 합니다.
만일 주님이 나사로처럼 부활이 아니라 소생되었다면 하늘나라로 갈 수 없으나, 당신이 육을 입고 다시 사신 것을 제자나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는 쉬웠을 것입니다. 이들을 한데 모이게 하고 실제로 다시 사신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면 되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께서 당신을 이렇게 증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미 영체로 화하여 사람들의 눈에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잠깐 영안(靈眼)을 뜨게 하여 당신을 보여 주었다가 곧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귀신이 되어 나타난 줄 알고 경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막달라 마리아의 뒤를 따라 무덤에 달려가서 주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온 것을 우리는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하려고 해도 어딘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쩌면 이토록 미련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주께서 부활하신 후 두 번씩이나 나타나 보였는데도 전도할 생각은 않고 여전히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했습니다.(요21:3) 수제자가 이 모양이니 딴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당시에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서 주님의 부활을 믿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주께서 열한 제자가 한데 모여 있을 때 나타나 ‘믿음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은 것도 당연합니다.(막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