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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2.29본문
Part 01. 심원한 경륜
Chapter 01. 율법에 대하여 (4)
5) 바울의 사명
바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베드로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측근자로서 주님을 가까이 모셨으나 바울은 주님의 적대자로 생전에는 주님을 만나 뵌 적도 없으며, 베드로는 수석 사도이지만 바울은 자칭 사도이고, 베드로는 가족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바울은 독신으로 일생을 보냈으며,
베드로는 비교적 유리한 환경 가운데 하늘의 도를 전하였으나 바울은 가난과 핍박 속에서 선교 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지만 바울은 유식한 학자이며, 베드로는 하루에 3천 명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으나 바울은 욕을 먹으면서 기껏해야 하루에 열두 명 정도밖에 열매를 맺지 못하였고,
베드로는 할례를 주장했으나 바울은 할례를 폐지했습니다. 두 분 다 위대한 주의 종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두 분에게 공통된 점이 있다면 처참한 가운데 순교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만 남아 있다." (딤후4:7-8) 과연 바울다운 말입니다. 그는 역대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분이라, 능히 이렇게 자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목숨을 아껴 발발 떠는 졸장부와는 달리, 죽음을 완전히 이긴 대장부였습니다. 또한 가난에 매이지 않는 점에서도 따를 자가 없었으니, 저간의 소식은, "누가 자기 양식을 가지고 다니면서 병정 노릇을 하겠느냐?" (고전9:7)는 그의 말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지장이 있을까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주어진 특권을 쓰지 않고 범사에 참았습니다. 이것은 다른 어느 하나님의 사람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며, 다른 종들은 거의 다 뒤끝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반 신도들도 물질에 욕심을 부리면 믿음이 붙지 않는데, 하물며 단을 지키는 주의 종이야 더 말해 무얼 하겠습니까? 세상 재미를 다 보면서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마음씨를 요구하십니다. 마음이 흐리거나 금이 가면 벌써 하나님의 눈 밖에 나게 마련입니다.
바울과 가장 대조적인 하나님의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영화의 극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워낙 왕자의 귀한 몸으로 태어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특권을 십분 발휘했던 것입니다. 처첩을 합쳐서 1천명, 하긴 우리나라에도 3천 궁녀를 거느린 임금이 있었다고 하지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당신이 기름을 부은 자가 이처럼 부덕을 끼치는 것을 묵인했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에게 세상의 모럴(도덕)을 초월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합니다.(민12:8참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차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경륜을 이루어 나가자니 자연히 그렇게 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또 너의 요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나니,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3:13) 이것은 여호와께서 이상 중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소원을 말하라고 했을 때, 솔로몬이 지혜를 주십사 하고 아뢰는 말을 듣고 기특하게 여겨 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큰 부귀와 영화를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안목으로 볼 때는 솔로몬이 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것이 부덕이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허락(은혜) 가운데 누리는 영화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은 인간의 모럴을 초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고 우리가 끝까지 인간 본위로,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각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면 회의에 빠지고, 때로는 시험에 들어 떨어지는 수도 있습니다. 만일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영적으로 본인만 손해를 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나는 바울은 존경하지만, 솔로몬은 장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특혜를 받은 솔로몬의 영화가 하나님의 법도에는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을 성서적으로 해명해 드릴뿐입니다.
바울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물질적으로 아쉬운 것 없이 살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바울뿐만이 아니라 어느 하나님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그러한 특권을 행사하지 않고 신도들과 고락을 함께 나눴습니다.
아니 즐거움은 남에게 양보하고, 괴로움은 혼자서 당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주의 일을 하다가 맞는 곤장을 환영했습니다. 그리하여 곤장 한 대라도 더 얻어맞는 것을 다행하게 여겼으니, 누가 이런 사람을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물론, 마귀도 손을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 법도를 펴기 위해 오신 주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목이 곧아, 겨우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나 증거하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와 문도들은 여전히 할례를 주장하며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좇고 또 뭇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었으므로, 이를 폐지할 만한 일꾼으로 택하여 세운 것이 곧 바울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주님도 어렸을 때 할례를 받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눅2:21)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 부모가 당시의 관례를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폐지해야 할 할례며 모세의 율법을 그토록 오랫동안 실시하도록 하는 헛수고를 되풀이해 왔는가 하는 것이 또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왜 이 땅에 오셔야만 했느냐 하는 의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아브라함 이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가리켜 모세에게, "내가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겠다."(신18:18)고 말씀했으며, 이밖에 다윗이나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도 주님에 대해 누누이 언급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 자체가 신약의 그림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첫 언약에서 비롯된 모세의 율법은 세례 요한 때까지, 즉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치리하는 데 필요했던 것이며, 둘째 언약, 곧 새 언약의 보증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자유의 율법이 반포되면 마땅히 폐지될 성질의 것이었습니다.(창17:13, 히7:22)
그런데 이것은 말이 쉽지, 실로 난사 중의 난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시행되어 오던 하늘의 법도를 뒤바꿔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하늘의 일대 혁명으로, 하루아침에 될 수 잇는 성질의 것이 못 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지만, 그것은 문자 그대로 '개혁'이지 '혁명'은 아니었습니다.
하늘에서 낡은 법도를 폐지하고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는 일대 혁명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일으켰는가를 살펴봅시다. 전에도 이에 대하여 단편적으로 언급하였지만, 오늘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새로운 법도를 세우기 위해 등장한 하나님의 큰 종이 바로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였고, 주께서 천국 열쇠를 맡길 정도로 한동안 신임이 두터웠으며(마16:19)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들이 모여 불과 같은 성령을 받을 때에도 그 모임을 주재한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120문도는 주께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신 말씀을 한결같이 믿는 신도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모으신 500명 가운데 일부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3년 동안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면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전하여 인정을 받게 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겨우 500명 정도였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주님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대접을 받으셨는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극성스럽게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았는가를 단적으로 표시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저들은 그야말로 1등 공신(?)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하루에 주님에게 인도한 3천 명은 바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숫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말대로 죽을죄를 짓고 벌을 받아 사형을 당한 줄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죄인이 아니라, 생전에 하신 그분의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가 속죄의 제물이 되어 처참하게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그만큼 급속도로 늘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3천 명은 생각을 바꾼 숫자이지, 주를 믿는 숫자는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우선 당신의 누명부터 벗어야 했으며, 마가의 다락방에 불과 같은 성령을 내린 것은 당신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120문도들의 열띤 전도로, 주님이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그렇게 당하였다는 것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지시켰는데, 여기까지는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고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면서 이들을 능히 감화 감동시켰으므로, 그 정도로 말이 먹혀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마다 '예수라는 사람은 특별한 인물이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아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여 이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의 율법을 폐지하고 자유의 율법을 새로 세워 그대로 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담당한 하나님의 종이 바울이었습니다.
주님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데 그치고, 새 율법에 대해서는, "율법과 선지자는 세례 요한 때까지"(눅16:16)라고 발설했을 뿐,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씀을 못 하시고, 성령을 힘입어 상세히 사람들에게 전해 줄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후 베드로를 비롯한 문도들이 성령을 받아 주님에 대한 오해를 푸는 데 성공하여,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율법을 반포하기는커녕, 주님은 이 땅에서 영원히 죄인으로 매장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예수가 큰 죄를 저질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자기들의 경솔했던 행동을 크게 뉘우치는 동시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에 어리둥절하여졌습니다. 여기에 제일 큰 몫을 한 주의 종이 바로 베드로와 바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사명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이고, 바울의 그것은 주님의 새로운 법도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바울은 신약시대의 토대를 닦은 하늘의 큰 일꾼이지만, 맡은 바 사명은 각각 달랐던 것입니다.
이들은 한동안 서로 갈등을 일으킨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이윽고 시간이 모든 갈등을 원만히 해결해 주었습니다.(갈2:9)
여기서 어떤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못할 일이 없을 텐데, 무엇 때문에 번거롭게 베드로를 세웠다가 다시 바울을 택하여 하나님의 종들끼리 서로 아옹다옹하게 하느냐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의 사정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일을 마음대로 척척할 수 있었다면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릴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면, 그런 의문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주께서는 하필 당신의 적 바울을 종으로 삼았을까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주께서 바울이 예뻐서 쓰신 것이 아닙니다. 수천 년을 두고 대대손손 지켜온 하늘의 법도를 폐지하는 큰 일을 해내려면 베드로 정도로는 안 되었기 때문에 바울을 들어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당신의 종으로 삼을 때에는 그 장본인이 타고난 됨됨이부터 세밀히 살핍니다. 마른 막대기도 세우면 된다고 하지만, 아무나 들어 쓰시지는 않습니다.
주께서는 처음에 사도나 문도들 가운데서 새로운 사명을 맡기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그 배턴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결국 바울이 뽑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주의 큰 일꾼으로 바울만 한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주께서 바울에게 이상 중에 지시하지 않고, 직접 나타나 명령을 준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 바울, 아니 사울은 주를 믿는 자를 잡아 가두는 일에 앞장선 자로, 주님이 이상 중에 지시하는 정도로는 그를 깨우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직접 나타나 강하게 역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깨친 다음부터는 주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 여러 가지 지시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베드로가 내 피를 두고 옛날 제사를 그대로 드리고 있으니 이런 딱할 데가 어디 있느냐? 하늘에 영광이 별로 올라가지 않는다.
제사가 온전치 못하니 그럴 수밖에 있느냐? 그러니 내가 십자가를 지고 성령을 내려보낸 것이 헛 수고가 된다. 네가 시정해라. 할례는 필요없다.' 이런 식으로 지시가 오는 것입니다.
이 계시는 베드로에게도 내렸지만,(행10:10-16 참조)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내리는 지시는 바울의 주장에 동조하라는 내용에 그치고, 바울의 경우처럼 자주 지시가 간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크게 들어 쓰시는 종은 이미 베드로가 아니라 바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주장이 한동안 엇갈리게 되자 백성들은 어느 쪽이 옳은지 몰라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자가 백성을 사이에 두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니 말입니다. 그럼 주님은 당신의 종들에게 이렇게 싸움을 붙여놓고 '백군 이겨라. 홍군 이겨라.' 하시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이 경우에 주님은 바울의 편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하루에 3천 명을 회개시킨 베드로보다, 겨우 열두 명밖에 회개 시키지 못하는 바울의 일이 성취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날이 갈수록 바울을 따르는 무리가 점점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은혜의 줄기는 같아도, 한쪽 백성들은 정으로 쏠리고, 다른 쪽 백성들은 원리에 끌리니, 그 은혜가 판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바울을 따르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주를 가까이하는 길이 여기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와 바울, 3,000대 12, 뿌리는 종과 거두는 종은 이렇게 차이가 나지만, 하나님은 후자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의견이 엇갈린 것은 주의 지시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바울은 베드로의 움직임에 대하여 잘 알지만, 베드로는 바울의 움직임에 대하여 잘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바울에게만 새로운 지시를 내리기 때문입니다. 이건 또 왜 그럴까요? 베드로는 이미 한물갔으므로 지시를 내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과 동행한 성령은 같지만, 사명이 각자 다르므로 지시 내용이 판이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여기서 무턱대고 베드로를 깎아내리고 바울을 추켜올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뿐입니다. 두 분은 다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사명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1:12) 베드로에게는 이런 지시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말인 즉 하나님의 아들 운운하지만, 행동은 구태의연할 수밖에요.
할례란 요컨대 하나님의 백성임을 표시하는 증거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필요 없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바울이 욕 안먹게 생겼습니까? 게다가, 어제까지만 해도 예수를 믿는 자를 잡아 가두던 바울이 하루아침에 예수의 신도로 탈바꿈을 했으니, 잡아 죽이려고 할만도 합니다.(행23:12)
"내가 할례를 전했던들 내가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갈6:11) 바울이 이렇게 약해지면 주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 힘을 북돋아 주곤 하셨습니다.(행23:11) 실제로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실감이 나지 않을 테지만, 이것이 큰 종들이 가는 길입니다. "세상일을 하다가는 이 역사 못하겠구나!" 바울은 각오를 새롭게 하고 나가서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가 처자식을 원치 않고 일생을 독신으로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로서는 실로 이런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나서도 자기가 맡은 사명을 이룰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그의 어깨가 무거웠던 것입니다. 하물며 완성의 사명을 맡은 종이 해야 할 일이 얼마나 중대 하겠습니까? 이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