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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1.14본문
Part 01. 심원한 경륜
Chapter 01. 율법에 대하여 (5)
7) 율법과 은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 이 말씀은 모세 율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주 앞에 의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죄를 온전히 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려 어느 정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 ‘어느 정도’라는 말에는 깊은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죄상의 경중에 따라 송아지나 양 또는 비둘기를 잡아 그 피로 제사를 드렸는데, 이들 제물의 피가 정결한 만큼 지은 죄가 씻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에 의하면, 죄는 피가 아니면 씻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히9:22)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제물은 물론, 제사장도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죄가 다 사해지지 못하고 일부는 그대로 남게 됩니다. 그렇다고 꿀 먹은 벙어리 모양 잠자코 있을 수는 없는 일이므로, 온전치 못하나마 최선의 도리를 다하여 죄를 씻은 것이 곧 짐승의 피로 드린 구약시대의 제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런 제사라도 올리라고 지시한 것은 주의 피가 없기 때문에 취한 잠정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드리는 제사가 온전치 못하니 죄를 온전히 씻을 수 없고, 죄를 온전히 씻을 수 없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의인이 생길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의인’이란 모두가 이런 온전치 못한 의미의 의인을 가리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는 말이 나올 법하지 않습니까?
만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드리는 제사로 죄를 온전히 씻을 수 있다면 구태여 주께서 십자가에서 산 제물이 되어 피를 흘리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흠과 티가 없는 깨끗한 주께서 이 땅에 육을 입고 오셔서 피를 흘려주셔야만 우리가 죄에서 놓여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유월절 어린 양의 역할을 하셨기에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구약시대의 위대한 선지자들도 다 이 문을 지나야만 하늘나라에 가게 됩니다.(계5:9) 그들에게 인격이나 하나님에의 충성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참된 의인이 만들어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구약시대에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해 왔으나,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주님의 속죄로 말미암아 ‘생명이 왕 노릇’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즉 첫째 아담의 죄를 둘째 아담이 온전히 씻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물론, 선지자들까지도 꿈꾸던 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율법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 율법에서 풀려나와 은혜의 사슬에 묶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은 우리를 주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3:24) 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구약시대의 율법은 오늘날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나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율법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은 아직 주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은혜(성령)가 같이하지 않는 사람은 율법이 그를 주관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기까지는 율법이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며, 또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선생을 만나면 몽학선생은 자연히 필요 없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은혜를 흡족하게 받으면 모세의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자유의 율법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으려면 율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몽학선생한테 가지 않으면 온전한 선생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의 율법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그보다도 훨씬 차원이 높은 자유의 율법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를 입는 것은 우리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선물로, 위에서 주셔야 합니다.(엡2:8)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이런 성령의 큰 은총은 언약 가운데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을 때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대를 가리켜, ‘지금은 은혜 받을 때’(고후6:2)라고 말하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빌1:7)고 하였지만, 오늘날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바울의 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직접 그 은혜 가운데 부름을 받아, 몸소 체험한 여러분 자신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주께서 약속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처음으로 불과 같은 성령을 보내신 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천 년 가까운 동안에 꾸준히 역사하여,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교회가 들어서고 수억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과 같은 성령의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불과 같은 성령은 주로 하늘의 도를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이긴자를 통하여 내리는 불과 이슬과 생수의 세 가지 성령의 은사는 그 역할이 이전과 다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세 가지 은혜는 요컨대 아직도 모자라는 ‘멜기세덱의 반열에 참여하는 주의 아내감’을 다듬어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계20:4 참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이 땅위에서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 성령의 역사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 에덴성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시오.’ 하고 전도에 힘쓰기보다는,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부름을 받은 사람을 깨끗이 씻어 주님 앞에 바치는 사명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내세우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의 이긴자가 바로 그 사명을 맡은 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마귀를 발등상 시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은 한결 쉽습니다. 그러나 주의 피로 씻어 알곡을 채우는 일은 몇 십 곱절 어렵습니다. 따라서 주께서 주시는 지시의 내용도 다르며, 치리하는 방법이나 은혜도 판이합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교회가 너무 많으며, 드나드는 사람이 넘칠 정도입니다. 문제는 주의 편에서 마귀를 소탕할 수 있는 십자가의 군병의 수에 있는 것이지, 이런 겉에 나타난 머릿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부흥’의 개념부터가 다릅니다.
일반교회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기만 하면 곧 부흥된다고 생각하지만, 참된 부흥은 주께서 쓸 만한 그릇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정치적 현실과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전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것은 그럴 만한 영적인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는 오늘날 세계 4대 강국과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데,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이것은 결코 정치의 역학관계에서만 비롯된 일이 아닙니다.
이긴자란 성경에 이미 예언된 인물로,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슥4:6) 또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어느 한 국가를 상대하여 역사하지 않고 전 세계를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대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환경이 조성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앞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세가 영적으로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큰 일은 반드시 두 사람이 하게 되어 있으며, 마지막 때에 마귀를 발등상 시켜 주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역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온 세계의 주를 모신 감람나무는 분명히 둘이고,(슥4:12) 강 가운데 서 있는 세마포를 입은 분의 양쪽에 두 사람이 서 있다고 했으며,(단12:6)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절반은 동해로 흐르고, 절반은 서해로 흐른다고 했고,(슥14:8) 또 주님도 생전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상징적인 의미에서 예표로 보여 주셨는데,(막9:4) 세마포를 입은 자, 예루살렘 등은 다 주님을 가리킵니다.
즉 두 사람의 가운데 으레 주님이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주인공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종은 주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께서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들을 주께서 ‘나의 두 증거자’라고 부르신 것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계11:3-4)
그런데 마지막 주의 역사를 이루는 두 종은 각각 사명이 다르기도 하지만, 전자가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이 있으면 후자가 그것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책임이 무거운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씨를 뿌리는 직분을 맡게 되고, 후자는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부터도 다르게 터져 나가게 됩니다.
또한, 후자에게는 전자의 모든 잘잘못을 주께서 영적으로 가르쳐 주게 되어 있습니다. 알아야 무너진 데를 보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58:12) 예컨대, “전자에게 부엌을 이렇게 지으라고 했는데 저 모양으로 지어 놓았으니 고쳐라.”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후자는 전자가 쓰던 기둥이며 서까래를 하나하나 뜯어다가 썩은 곳은 잘라내고, 더러운 곳은 깎아 내고, 짧은 데를 이어 대고 해서, 견고하고 훌륭한 집을 다시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