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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2.03본문
Part 01. 심원한 경륜
Chapter 02. 제사에 대하여 (3)
5) 완전한 제사와 불완전한 제사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16:23) 이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죽음을 며칠 앞두고 처음으로 당신이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려 죽을 것을 제자들에게 발설하였을 때, “그리 마옵소서.” 하고 간하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수제자로 침식을 같이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베드로도 자기 스승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제자가 선생을 몰라보다니,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못났거나 무식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마 오늘날 유명한 신학박사를 베드로의 자리에 앉혀 놓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이 죽는다는데 말리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 된 도리로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스승으로부터 최대의 모욕을 당했습니다. 죽으려는 스승의 옷자락을 잡고 만류했다고 해서, ‘사단’이라고 하다니, 이건 또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 하긴 이렇게 반문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망발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물음도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마 여러분 중에는, “아니, 사람이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먼저 생각하란 말인가?” 하고 반박하는 분은 없을 줄 압니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사람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영의 일을 육적으로만 생각하여, 구세주가 오시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려니 하고 기대에 부푼 제자들이 당신이 죽는다는 말을 듣고 실망할 때, 주께서는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로 오시지 않을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16:7) 옳은 말씀입니다마는, 이 말씀이 당시의 제자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겠습니까? 오히려 원망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이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왕이 되면 한 자리 하려고 잔뜩 노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대체 주님은 무엇 때문에 죽어야 했을까요? 우주의 창조에 동참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제물이 되다니, 이런 못난 짓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마냥 조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한번 뛰어내려와 보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에게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무능한가?” 영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는 어느 의미에서 당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귀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신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데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계셨다면 그런 매정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제물로 받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희생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하는 주님의 호소를 묵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알게 되면 이것은 곧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바친 제물은 비둘기와 양과 송아지였는데, 죄과의 경중에 따라 드리는 제물도 다르게 마련이었습니다.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었을 때에는 구하기 쉬운 비둘기를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제사장을 통하여 깨끗하지 못한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로는 지은 죄를 도저히 눈과 같이 씻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런 자범죄뿐만 아니라 원죄와 유전죄까지도 걸머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까지도 완전히 도말 받으려면 흠과 티가 없는 제사장과 제물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동참하신 주님이 직접 당신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한 번 드린 제사로 속죄의 길을 열고, 돌에 새긴 모세 율법을 폐지하는 동시에, 마음과 생각에 새기는 자유의 율법을 선포하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생축이 되어 드린 신령한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그 대가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곧 생수의 성령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 성령은 사람을 통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고넬료에게 성령을 내리실 때에도 베드로의 손을 거치게 했던 것입니다.(행10:1 참조)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려면, 아무래도 그런 중개자를 세워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긴자도 주께서 세운 이런 성령의 중개자입니다.
그를 통해 주의 피는 이슬같이 내리고, 불과 생수의 강한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그의 입을 통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마음의 평안을 주게 마련입니다.(요14:26) 이 경우에 그는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말해 주게 되어 있습니다.(요16:13)
그러니까 모든 것이 스스로 되는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혜의 연결을 받아 하나님의 영으로 움직이는 자가 비로소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롬8:1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6) 예배에 대하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태도는 천층만층이지만, 이것을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공경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전자의 생활 태도를 인본주의적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신본주의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적인 구분이고, 실제로는 거의 다 전자와 같은 생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오늘날 하나님을 공경하노라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인간본위의 생활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깊이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하기야 인간이 육을 갖고 있는 이상, 먹고 살아야 하므로 세상과 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공기만 마시고 살 수 있습니까? 내가 말하는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란 세상과 짝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라,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컨대 빨래를 하더라도 영의 때를 씻는 심정으로 찬송가를 입 속으로 나직이 부르면서 빠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때를 씻는 데만 온 정신을 빼앗기는 사람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되 적당히 하고, 생활은 생활대로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신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볼일 때문에 예배에 빠지는 사람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자기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사고방식이나 신앙 자세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크고 작고 간에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영위되어야 하며, 일거일동이 하나님과 어떤 형태로나 선이 닿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의 것은 결코 신령하지 못합니다. 설사 고귀한 인격이나 순수한 양심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인격을 ‘고귀하다’고 할 수 없고, 하나님과 동떨어진 양심에 ‘순수한’ 이란 형용사를 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무릇 신령한 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지, 결코 땅에서 솟아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주의 은총이 담길 때 비로소 그 그릇이 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그릇에 금은보화가 담긴 격이라고 할까요? 이 금은 보화를 오래 간수하고 있어야 합니다. 금방 쏟아 버리면, 보잘것없는 질그릇이 되어버릴 뿐더러, 다시 주워 담기가 무척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는 그때그때 잘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현재 주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모하고 충성을 다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어제까지 주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충성했어도 오늘 어찌어찌 해서 떨어지면, 전에 애쓴 보람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와는 반대로, 어제까지는 마귀의 괴수 노릇을 했더라도, 오늘 회개하고 매달리면 은총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연조가 필요 없으며, 우리는 언제나 새로 출발하는 심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혼이 주와 연결되어 있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받아들일 때 그 영이 우리 안에 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악령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악령이 우리를 덮치려고 하여도 우리 자신이 마음의 무장을 튼튼히 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침범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나 악령은 우리가 기회를 제공했을 때 비로소 들어와 좌정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찬송을 부르면서 세상 생각을 하게 되면 성령이 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귀한 손님을 맞으려고 해도 집안을 깨끗이 정돈하는데, 하물며 보배로운 성령을 맞아들이기 위해 찬송을 부르면서 그처럼 한눈을 팔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집안 정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경우에 신령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고, 정성은 인간이 드리는 것으로, 이 양자는 떼려고 해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입니다. 즉 신령해지면 정성을 기울이게 되고, 정성을 기울이면 신령해지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는 개성과 처지에 따라 다르게 내립니다. 가령 대체로 할머니나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들은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은혜가 내리고, 지성인에게는 깨달아 알 수 있도록 내립니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개성에 따라 지적, 정적 및 의적인 요소에 강약이 있듯이, 믿음에도 이 세 가지 유형에 강약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 지적인 면이 앞서는 경우도 있고, 정적인 면이나 의적인 면이 앞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기도를 하게 되면 으레 눈물이 앞을 가리는 사람은 정적인 신앙이 우월하고, 설교 말씀에서 남달리 큰 감동을 느끼는 사람은 지적인 신앙이 강하며, 교회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은 의적인 믿음이 우세한 것입니다.
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신앙에 이 3자, 즉 지적, 정적 및 의적인 면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셋을 고루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마음대로는 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땅의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즉 땅에서 아무리 잘 믿어보려고 발버둥을 쳐도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에서 올 것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옴으로써 베드로는 목숨을 내걸고 주를 증거 했으며, 그것이 옴으로써 주의 반역자 바울은 주의 충신으로 돌변했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 하고 궁금히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이 바울의 경우는 특별 케이스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그릇의 됨됨이를 보고 주께서 당신의 사람으로 특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늘의 선물’이라고 하고, 또 그래서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 한 번 부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성경에 보면 “시와 찬미의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골3:16)고 했습니다. 찬송은 마귀와 싸우는 무기의 하나요, 은혜 받는 비결의 하나입니다.
은혜는 안다고 되는 게 아니며, 모른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와 연결되고 안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 눈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남이 볼 때는 된 것 같아도 되지 않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고, 되지 않은 것 같아도 된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이렇게 된 사람끼리 두셋만 모여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마18:19)
예배는 하나의 교회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와 싸우는 거룩한 의식이 형식에 그치는 폐단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배에 대하여 좀 더 인식을 달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