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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3.15본문
Part 03. 역사의 증인들
Chapter 08. 총리 요셉
1) 그는 하나님이 키웠다.
12지파를 이룬 야곱의 아들들은 장성하여 각각 자기 분깃을 차지하고 개성대로 치리해 나갔습니다. 이들 열두 아들 중에서 야곱이 제일 아낀 것은 늘그막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요셉이었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들의 됨됨이와 행동거지(行動擧止)를 유심히 살펴볼 때, 요셉이 제일 총명하고 또 성품이 선량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마음속으로 요셉을 자기 유업을 이을 후계자로서 점찍어놓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에게 특별히 채색 옷을 지어 입힌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창37:3)
그러므로 요셉의 형들은 은근히 요셉을 백안시(白眼視)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17세 때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 저들의 비행을 부친에게 고해바치자, 저들은 더욱 요셉을 미워하여 언동이 자못 거칠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자기가 꾼 꿈까지 동원하여 형들의 기세를 꺾으려고 했습니다.
“내 꿈 이야기를 좀 들어보세요. 우리가 밭에서 곡식단을 묶는데, 아 글쎄 내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은 내 단을 중심으로 삥 둘러서서 절을 하지 않겠어요.”(창37:6-7)
이런 맹랑한 꿈이 어디 있겠습니까? 형들은 이구동성으로 요셉에게 대들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세상에 그 따위 꿈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래 네가 우리 왕이 되어 우리를 다스리게 된단 말이냐?”
이것은 요컨대, ‘그건 엉터리 꿈이다. 도대체 아우가 형들을 다스리는 데가 어디 있느냐?’ 하는 항의 겸 위협이기도 하였습니다. 며칠 지나 요셉은 또 다른 꿈 이야기를 꺼내었습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세요.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아, 저 해와 달과 열한 별들까지도 나한테 절하던 걸요.”(창37:9)
요셉은 이 꿈 이야기를 아버지 야곱에게도 했습니다. 그러자 형들은 요셉을 더욱 시기했으나, 아버지 야곱은 그의 이야기를 마음에 깊이 새겨 두었던 것입니다.(창37:11)
하루는 야곱이 아들 요셉을 불러 세겜에 가서 형들이 양을 잘 기르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일렀습니다. 이때 이들은 이미 거처를 도단으로 옮긴 후였습니다. 요셉이 길을 물어 도단에 이르자, 형들은 요셉이 찾아오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쑥덕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저기 신령한 꿈을 꾼다는 녀석이 오는군 그래.”
“이 기회에 아주 없애 버리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목을 비틀어 구덩이에 던지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소문을 퍼뜨리면 그만 아냐?”
이때 맏형 르우벤이 말렸습니다.
“피까지 흘릴 거야 뭐 있냐. 그냥 구덩이 속에 던져 넣은 정도로 그치는 게 좋겠다.”
르우벤은 요셉을 저들의 손에서 건져 아버지 야곱에게 돌려보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흙구덩이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윽고 유다(레아가 낳은 넷째 아들)가 형제들에게 이렇게 제의했습니다.
“우리가 동생의 피를 흘려서 유익할 게 무어냐?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아 버리자.”
이리하여 요셉은 이방인에게 은 20냥에 팔렸다가, 다시 애굽에서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요셉의 행적을 이렇게 죽 적어놓고 보면 이런 이야기는 당시에 흔히 있을 수 있던 가정불화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배후에 여호와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즉 요셉은 여호와의 섭리 가운데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는 여호와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의 일부를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수난(受難)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는 ‘형통한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창39:2) 그러니 누가 감히 요셉을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한편 요셉을 종으로 사간 주인 보디발은 처음에는 요셉에게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별로 딴 일은 맡기지 않았으나, 요셉이 남달리 총명한데다가 자기를 극진히 섬기므로, 집안일을 아주 다 맡기다시피 하였습니다. 요셉은 주인으로부터 그만큼 두터운 신임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자 주인 보디발에게는 큰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보디발은 여호와의 신이 같이하는 요셉을 가까이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에게 시험이 또 닥쳐왔습니다. 요셉의 얼굴이 준수하고 아담하여 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이에 응하지 않자, 하루는 그녀가 요셉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이 당황하여 윗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뛰쳐나왔더니, 여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번에는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고 뒤집어씌우고는, 그 옷을 증거물로 삼아 남편에게 고해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노발대발하여 당장 요셉을 묶어 감옥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은 옥중에서도 요셉과 같이하여 요셉은 여러 죄수들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자연히 많은 죄수들과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수들 중에는 이른바 정치범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 왕(바로)을 가까이 모시다가 반역을 꾀했거나, 모략을 당하여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살인이나 절도 같은 죄로 감옥에 끌려온 이른바 흉악범보다 이들을 더 가까이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궁중의 여러 가지 법도며 풍습 같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감옥은 요셉에게 학교나 다름없는 구실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여호와께서 장차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등용하기 위한 정지작업(整地作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 요셉의 환경을 바꿔가면서 이와 같이 연단하신 것입니다.
다음에 하늘에서는 요셉이 바로에게 선(線)이 닿도록 주선하였습니다. 즉 바로의 측근에서 일하던 두 관원장(官員長)이 잘못을 저질러 요셉이 갇힌 감옥으로 들어와서 요셉과 가까이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므로 요셉이 까닭을 물었더니, 웬 꿈 이야기를 꺼내었습니다.
요셉이 이 꿈을 풀어 사흘 후에 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옥에서 풀려날 것을 알아맞힌 것이 계기가 되어, 이 관원장의 주선으로 왕의 괴상한 꿈을 풀이하기 위해 바로와 접선이 되었던 것입니다.(창40:8-참조) 이것은 물론 요셉을 야곱의 열두 지파 중에서 제일 큰 인물로 들어 쓰기 위해 여호와께서 왕의 측근을 움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큰 그릇으로 쓰시는 사람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일을 두고 연단에 연단을 거듭한 후에 비로소 등용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의 하나님과 오늘의 하나님이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행동 원리는 고금을 통하여 시종일관(始終一貫) 변함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은 ‘자기’가 살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의 경우를 두고 보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가 요셉을 옥에서 데려다가 해몽해 줄 것을 부탁하였을 때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41:16) 즉 왕의 꿈을 푸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자기 해몽에 권위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여호와의 신이 자기 안에 거하여 신령한 해몽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과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나름으로 판단하면 무의식중에 여호와의 일을 가로막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모세를 비난한 아론과 미리암은 자기들 딴에는 당연한 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합당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하늘의 일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세에게 접붙임을 받은 가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모세 덕분에 하늘에서 귀히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모세를 비난했을 때 하늘의 은혜줄이 끊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한 죄로 여호와의 벌을 받아 문둥병에 걸린 것을 아론이 보고 모세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민12:12) 아론이 기도해 봤자 응답이 올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과 여느 사람이 다른 점입니다. 이런 하늘의 이치를 잘 모르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도 우습게 여기기 쉽습니다. 그도 하루 세끼 밥 먹고사는 사람으로, 언뜻 보면 조금도 별스럽지 않습니다. 학식으로 치면 당대의 학자를 따를 수 없고, 인격적으로도 부족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인격적으로 고결한 사람은 오히려 산 속에 묻힌 고승(高僧)들 중 에 많을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말하는 성인군자(聖人君子) 하고도 다릅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바탕이 선한데다가 땅에서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성령과는 인연이 먼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크신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 들어 쓰시는 종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우선 그가 당신의 뜻대로 잘 움직여 줄 것을 원하십니다.
한편, 하나님의 종 역시 무엇보다도 이 뜻에 충실해야 함은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맡은 소임을 다하느냐, 다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평가를 받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이러한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도 인간이라 약해질 때도 있고, 또 육의 제약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성령이 충만한 이상 범죄에 빠질 수 없으며, 따라서 그의 말과 행동 등은 의롭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위 도인(道人)들처럼 의롭게 되는 것이 지상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교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씨가 아무리 곱고 행실이 착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인간은 선에 엄격할수록 죄인임을 더욱 깨닫게 마련입니다. 선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마19:17) 또 주님 자신도 육을 갖고 계신 이상 그 영향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세상적인 도인에 그친다면 기독교는 하나의 도덕으로 격하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세상 모럴(도덕)을 척도로 하여 기독교를 평가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비판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고전2:15) 기독교는 구령(救靈)의 도요, 생명의 길이므로, 모럴에 그치지 않고 이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백성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상고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의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印章)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를 입히고.”(창41-42)
인장 반지란 임금의 도장으로 쓰는 반지, 즉 옥새(玉璽)나 마찬가진데, 이것을 넘겨준다는 것은 왕이 권한을 이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이방인에게 이런 대우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보면 요셉에게 ‘세마포 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이 세마포 옷은 ‘굵은 베옷’과 대조를 이루어, 전자는 경사스러울 때 입고, 후자는 비통할 때 입게 되어 있습니다. 즉 어린 양의 아내는 빛난 세마포 옷을 입으며(계19:8) 두 증인이 마귀가 득세하는 1,260일을 예언할 때는 굵은 베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바로는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고 고치게 하고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시켰습니다. 이를테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하여 완전히 애굽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작정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이 충만한 요셉이 이런 올무에 걸려들 리가 만무합니다.
그는 여호와를 더욱 공경하여, 두 아들의 이름까지도 신앙과 관련시켜 지었습니다. 즉 장자는 하나님께 자기의 고난과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잊게 했다고 해서 ‘므낫세’라고 부르고, 차남은 하나님이 자기가 수고한 땅에서 영화를 누리게 했다고 해서 ‘에브라임’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애굽 총리로서 오랫동안 꿈에 그리던 고국 형제들을 만나는 극적인 장면에 이르러 절정에 도달하게 됩니다. 요셉이 형들의 시기와 모해(謀害)로 말미암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서 갖은 시련을 겪은 끝에, 드디어 총리의 중책을 맡은 뒤로 7년이 지났습니다.
때마침 온 땅에 흉년이 들어, 가나안에 살고 있던 야곱은 아들들을 불러 애굽 정부에서 모아둔 비축미(쌀)를 사오도록 일렀습니다. 그리하여 베냐민을 제외한 아들 열 명이 나귀에 돈과 금은보화를 싣고 애굽에 가서 국무총리인 아우 요셉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사랑하는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줄은 전혀 모르고 요셉의 형들의 말대로 짐승이 잡아먹은 줄만 알고 있었습니다.(창37:33 참조) 그리고 요셉의 형들은 아우 요셉이 애굽에서 노예로 팔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형들을 대뜸 알아보고, 17세 소년 시절에 꾼 꿈, 밭에서 형들과 추수할 때 자기의 곡식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곡식단은 엎드려 절하던 것을 상기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실로 20여년 만에 형제간에 서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아우는 애굽을 주름잡는 재상이요, 형들은 식량을 구하러 와서 그 앞에 고개 숙인 이방인으로서, 아우 요셉은 남의 눈이 아니면 한바탕 얼싸안고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일국의 총리로서 위신상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여 짐짓 시치미를 떼고 물었습니다.
“어디서 온 웬 사람들인고?”
“네, 가나안에서 청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소리야! 보아하니 정탐꾼 같은데.”
요셉은 딴전을 부렸습니다. 저들은 당황하여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대답했습니다.
“아, 아니올시다. 저희들은 식량을 구하러 왔습니다.”
“아무래도 수상한 걸. 얼굴들이 비슷비슷하군 그래.”
“저희들은 모두 열두 형제로, 막내는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에 남아 있고, 또 동생 하나는 온데간데없어져 버렸습니다.”
이 ‘온데간데없어진’ 동생은 물론 요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속으로 사뭇 울먹이던 요셉은 특히 아버지 야곱의 소식을 듣고 복받치는 눈물을 감당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체 내색을 하지 않고 여전히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면서, 친동생 베냐민을 불러들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처럼 궁지에 몰리자 저들은 서로 마주보면서 한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벌을 받아서 싸지. 같은 핏줄인 아우를 생매장해 버리려다가 이방인에게 아주 팔아 넘겼으니.”
“그때 요셉이 얼마나 우리에게 애걸했는지 몰라. 그런데 어쩌자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내가 뭐랬어. 죄 짓지 말라고 하잖았어?”
르우벤이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들은 요셉이 애굽 사람이라, 자기네 말을 알아듣지 못할 줄 알고 이렇게 수군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말을 옆에서 다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너무나 기이한 상봉 앞에 어리둥절하고, 또 형들을 측은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복받치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어 잠시 몸을 피해 실컷 울고 나서 그들 앞에 나타나, 시므온을 볼모로 삼아 옥에 가두고,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라고 일렀습니다.
이리하여 요셉은 자기의 친동생(배가 같은) 베냐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함께 온 형들과 베냐민을 총리 관저에 안내하여 진수성찬을 베풀었습니다. 요셉은 다시 저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나서, 친동생에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네가 베냐민이냐?”
“네”
“하나님께서 네게 특별히 축복을 베푸시기 바란다!”
요셉은 목이 메어 안방에 들어가 마냥 울고 나서, 다시 나타나 이들과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 총리의 관저에 야곱의 열두 아들이 자리를 같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좌석을 두루 살펴보니 맏형 르우벤에서 시작하여 나이 순서대로 앉아 있을 뿐 아니라, 막내 베냐민 앞에는 음식이 다섯 곱절이나 더 많이 놓여있었습니다. 저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애굽의 총리가 어떻게 우리들의 집안 사정을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한편 요셉은 늙은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나머지 하나의 간계를 생각해 냈습니다. 즉 아무래도 형제들에게 그냥 말로만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일러서는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형제들의 나귀에 양식을 잔뜩 실어 보내게 하고는 베냐민이 몰고 온 나귀 등에 실은 쌀자루 속에 자기가 애용하던 은잔을 슬쩍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이것을 트집 잡아 인질(人質)로 베냐민을 잡아 두고 아버지를 꼭 데려오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이 꾸민 각본(脚本)대로 베냐민이 인질로 잡히자, 다른 형제들은 걱정이 태산 같아 요셉 앞에 하소연 했습니다. 뭔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요셉을 잃은 후에 아버님은 크게 상심하다가 막내인 베냐민에게 정을 붙이며 그럭저럭 여생을 꾸려 나가고 있는데, 베냐민이 애굽 땅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보나마나 기절해 버릴 것이 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고 베냐민 대신 자기를 인질로 잡아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요셉은 복받쳐 오르는 핏줄의 정을 감당할 길이 없어, 주위에 늘어선 측근들을 다 물러가게 하고, 비로소 자기 정체를 밝혔습니다.
“내가 바로 형들이 애굽에 팔아넘긴 요셉이오. 아버님이 그저 살아 계시다니.”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크게 흐느껴 울었습니다.
“아직 5년은 흉년이 더 계속될 테지만, 하나님이 형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후손을 남기려고 나를 먼저 애굽에 보내신 거요. 어서 아버님께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오.”(창45:2-13)
이 이야기가 궁중에 알려지고 바로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자, 왕은 옷과 나귀를 보내어 야곱 일가족을 애굽으로 데려오게 했습니다. 한편 야곱은 이미 짐승의 밥이 된 지 오랜 것으로 알고 있던 요셉의 소식을 전해 듣고,
하도 꿈같은 이야기라 몇 번이나 까무러쳐 정신을 잃었다가 소생하여, 아들 요셉을 만나러 애굽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다시 이상 중에 야곱에게 나타나 지시하였습니다.
“내가 거기(애굽)에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창46:3-4)
야곱은 한 가족 70명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가서 아들 요셉과 극적으로 만나게 됐습니다. 실로 20여년 만에 이루어진 부자(父子)간의 상봉(相逢)이었습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창46:30) 이 말 한마디가 당시의 야곱의 모든 심정을 대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