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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3.30본문
Part 03. 역사의 증인들
Chapter 10. 승천한 엘리야
1) 그는 왜 족보가 없는가?
엘리야에 대해서는 성경에 꽤 길게 언급되어 있지만, 그 족보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에녹과 마찬가지로 땅에서 역사하다가 승천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로 디셉에서 태어나 길르앗에서 자랐으며, 장성한 후에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지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같이하심을 처음으로 보여준 희한한 권능은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못하도록 한 일이었습니다.(왕상17장, 눅4:25) 그래서 곡식들은 다 말라 버리고 먹을 물도 구하기 힘들 지경이었으니, 그 참상이 어떠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내세워 바알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치셨던 것입니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엘리야에게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그 냇물을 마실 것을 지시하시고, 양식은 까마귀를 시켜 날라 주겠다고 이르셨습니다. 이윽고 그릿 시내가 말라 버리자 여호와께서는 사르밧에 가서 어떤 과부의 신세를 지도록 다시 지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지시대로 사르밧에 가서 성문에 이르렀을 때,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어떤 과부를 만나, 떡을 한 조각 달라고 청했더니, 그 과부가 하는 말이, 자기에게 남은 식량이라고는 다만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몇 방울뿐이며, 아들과 함께 이것을 마저 먹어 치우고 이제 죽을 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긴 3년 반 동안이나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으니, 굶어 죽는 사람은 이 가엾은 모자(母子)외에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여호와의 능력이 자신과 같이하심을 믿고, 그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자기에게 주면 여호와께서 다시 비를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할 테니, 염려 말라고 일렀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닥친 과부에게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언동이 무지한 과부의 눈에도 어딘가 믿음직스럽게 보이기도 했지만, 죽음을 각오한 마당이고 보니, 그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엘리야의 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같이하시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으면 과부가 손님을 푸대접하여 당신의 뜻을 펴 나가는 데 지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놀라운 기사(奇事)는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이틀 후에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어 버리자, 엘리야가 아이에게 세 번 기운을 불어넣은 다음 “이 아이의 혼을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고 여호와께 기도했더니 죽은 아이가 금세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왕상17:21-22) 과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분명히 깨닫고 더욱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 후 3년이 지나 다시 여호와의 지시가 내렸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은 여호와를 공경하면서도 이방 신을 섬기는 이세벨의 간청에 못 이겨 바알 신도 함께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엘리야를 내세워 이 적대 세력을 무찌를 심산이었습니다.
당시에 엘리야는 나라에 기근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이미 수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사람을 시켜 방방곡곡을 뒤졌으나 엘리야는 이방에서 과부에 집에 숨어 있었으므로 아무도 거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엘리야가 아합 왕을 찾아간다는 것은 마치 원수끼리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신이 자기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의 그의 심정은 마치 모세가 여호와의 지시를 받고 애굽의 바로에게 갈 때와 다름없었습니다. 엘리야는 때마침, 아합 왕과 좌우로 갈라져 짐승이 먹을 물을 찾고 있는 믿음이 독실한 대신 오바댜를 만나 아합 왕과의 면회를 부탁했습니다.
그리하여 아합 왕과 엘리야, 두 적수(敵手)는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습니다.
“네놈이 비를 막아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엘리야냐?”
왕은 대뜸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당신이 바알 신을 섬기기 때문이오.”
엘리야도 거침없이 한 마디 응수했습니다. 여호와의 힘을 믿고 있었으므로 네까짓 놈이 왕이면 다냐는 기세였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으로서는 엘리야의 이 말이 뜻밖일 뿐만 아니라 실로 웃기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합 자신도 딴에는 여호와를 극진히 섬기는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아내 이세벨의 간청에 못 이겨 바알 신을 겸하여 섬기기는 했지만, 여호와의 대한 그의 공경심은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땅에 큰 기갈이 있게 된 원인이 아합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데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합 왕의 큰 불찰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제일 싫어하는 일을 하면서 여호와를 공경하다니,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이와 같이 본의 아닌 실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르면서, 여호와를 열심히 섬기는 줄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합 왕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동시에 바알과 아세라 신을 겸하여 섬기면서도 마음이 전혀 거리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과 바알 중에서 하나를 택할 것을 역설하고,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을 불러 피차에 송아지를 잡아 제사를 드려 불로 응답하고 안 하는 것으로 그 제사의 참된 여부를 가리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아슬아슬 승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엘리야가 드리는 제사에 불의 응답이 없으면 즉석에서 목이 달아나는 판국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예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의 능력이 사람들 앞에 드러났습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이 갈멜산에 모여 목이 터져라고 바알 신을 불러대도 아무 대꾸도 없었으나, 엘리야가 혼자서 드리는 번제에는 여호와께서 즉시 불을 내려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왕상18:38)
2) 불수레
여기서 여호와께서 우상 숭배를 배격하시는 것을 사람들은 눈으로 분명히 목격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당신이 유일한 신이심을 뭇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아합 왕과 엘리야의 승패(勝敗)는 끝났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신을 섬기는 자칭 선지자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쳐 죽이고, 갈멜산에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비를 내려 주실 것을 여호와께 간구했습니다.
한편 이세벨은 남편인 아합 왕으로부터 엘리야가 바알 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는 말을 전해 듣고 노발대발하여 즉시 사자(使者)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제법 도도하게, 내일 목숨을 앗아가겠으니 그런 줄 알라고 사전에 통고했습니다.
엘리야는 얼른 몸을 피해 호렙산(시내산)으로 도망쳐 가다가 기진맥진하여 여호와께 차라리 죽기를 간구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모세가 여호와께 이와 비슷한 간구를 한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민11:15) 주의 종이란 때로는 이런 곤경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결코 이러한 당신의 종을 그냥 방치해 두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잠깐 눈을 붙이자 여호와께서는 천사를 시켜 떡과 물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을 먹고 기운을 차린 엘리야는 40주야를 걸어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한 토굴에서 쉬려고 하는데 여호와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들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엘리야가 대답하자 여호와께서는 지진을 일으켜서 땅을 뒤흔드시는 것이었습니다.(왕상19:12) 여호와께서는 이와 같이 당신의 종을 아끼고 옹호해 주십니다.
이 지진은 여호와께서 궁지에 몰려 약해진 당신의 종의 심정을 동정하시는 표시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엘리야를 그냥 방치하면 더욱 약해질 터이므로 “엘리사에게 뒷일을 물려주라.”(왕상19:16)고 지시하셨습니다. 자신이 없으면 후계자에게 배턴을 넘기는 것이 좋겠다는 여호와의 뜻이셨습니다.
엘리야는 모세와 함께 나중에 나타날 두 감람나무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러기에 주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인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 당신이 이 두 사람과 함께 이야기하는 광경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마17:1)
하나님께서는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5-6)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또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길 예비자로서 엘리야가 온다는 성경 구절만 알고 있었을 뿐, 정작 그 말씀이 땅에서 이루어져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여호와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지 430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으니 말입니다.
이 430년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과도기요, 여호와께서 하늘 문을 아주 닫아 버리고 백성들을 전혀 돌아보지 않은 ‘암흑기’였으므로, 그만큼 하나님과 멀어졌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은 어리석어 진리와 비진리를 분간하지 못하는데, 이런 공백 기간이 있었으니,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임의로 대한’(마17:12) 것도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제자들까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 ‘임의로 대했다.’는 말은 죽여 버렸다는 뜻입니다. 만일 성경 말씀 그대로 엘리야가 길 예비자로 오지 않았는데, 누가 나타나 내가 구세주라고 외친다면 우선 성경 말씀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성경에 두 감람나무가 역사한다는 것이 기록되고, 주께서 두 감람나무의 그림자로서 모세와 엘리야를 보여 주신 이상, 반드시 모세와 같은 권능을 행사한 이가 나타난 후에 엘리야와 같은 권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주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주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양떼들은 ‘양의 문’인 주를 통해 꼴을 먹게 마련입니다.(요10:9) 그런데 한편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에 이긴자가 나타나며, 주께서는 이 이긴자에게 권세를 맡겨서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계2:26-27)
그리고 다른 보혜사 성령이 깊은 진리를 드러낸다고 했습니다.(요14:26)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며, 또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을 여러분의 눈과 귀로 분명히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많은 이웃의 교회들을 지나 머나먼 이 꼭대기까지 찾아온 것은 여러분이 이것이 무슨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진리 가운데 서게 되었으니, 이 은혜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가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한 후로 엘리사는 줄곧 엘리야와 동행하면서 하늘의 법도를 배우는 동시에, 영의 영도자로서 손색이 없도록 성품을 길렀습니다. 세대교체가 매우 순조롭게 된 것입니다.
한편 엘리야는 자기가 키운 엘리사에게 선지자로서의 자격이 갖춰지자 자기 갈 길을 마련했습니다. ‘자기 길’이란, 여호와의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가 계시로 미리 보여 주셨으므로 자기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엘리야는 엘리사를 멀리하려고 했습니다. 되도록 조용한 가운데 하나님과 교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이러한 심정을 알 턱이 없는 엘리사는 여전히 스승을 가까이 모시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는 승천을 앞두고 엘리사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사는 자기에게 엘리야의 갑절이나 되는 영력(靈力)이 임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왕하2:9)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임을 사람들에게 보이려면 이 정도의 영력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어 닥쳐 엘리야를 휘몰아 하늘에 오르자 엘리사는 어리둥절하여 뒤로 주춤 물러섰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옷으로 요단강 물을 쳐서 길을 내어 건너가자 사람들은 엘리야의 영력이 엘리사에게 옮아온 것을 알고, 엘리사를 선지자로 맞아들였습니다. 엘리야의 옷은 승천할 때 벗어두었던 것입니다. 이때 육은 홀연히 영체로 변합니다.
이런 승천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이 시간에도 전 세계에 걸쳐 방속국의 전파가 퍼지고 있지만, 그 소리를 들으려면 우리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 성령은 멀리 여호와로부터 엄청난 속도로 우리에게 임하고 있으나,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그릇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게 됩니다.
그리고 KBS에서 아무개의 뉴스 해설은 몇 시에 어느 채널을 통해 나간다고 미리 예고하여 사람들이 듣게 하듯이, 여호와의 성령은 아무한테나 직접 연결이 되지 않고, 너희가 이러저러한 여건을 먼저 갖춰야 한다고 미리 가르쳐 주시고 나서 성령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당신을 빛으로 비유하여, “빛이 어둠 속에 내려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이 빛은 육적인 햇살보다도 더 빠른 속도입니다. 빛은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빠른 것인데, 멀리 있는 별에서 출발한 빛은 아직도 우리 지구에 닿지 못한 것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은 이 우주 밖 삼층천에서 눈 깜짝 할 사이에, 아니 그보다도 더 빨리 지상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속도를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모두가 다 여호와의 권능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호와께서 행사하시는 여러 가지 능력을 육안으로 직접 볼 수 없습니다. 만일 모세가 여호와를 정면으로 보았다면 그 강렬한 광채로 인하여 죽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여호와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주의 빛을 보고서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늘나라와 땅의 차이를 단편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은 못 보는 것이 없고, 어디나 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의 즐거움이나 지옥의 괴로움도 우리보다 몇 백 곱절이나 강하게 느끼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이 땅의 뉴스를 들으려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야 하는 것처럼, 하늘의 뉴스를 들으려면 이영수의 입을 통해야 합니다. 이영수가 라디오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늘의 뉴스를 모르면 여호와께서 어떻게 움직이시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지 못하며, 알지 못하고 덮어놓고 믿어봐야 마음이 냉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역사 가운데 접어든 것 자체가 큰 은총임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