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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4.06본문
Part 04. 진리의 샘
Chapter 13. 지(知)와 덕(德)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세상에는 위대한 사상가도 많고 유명한 과학자도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일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큰 공적을 세운 박사나 교수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뭇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남 못지않은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서도, 겉으로 화려한 출세를 한 동료들의 그늘에서 묵묵히 학술 연구에 종사하여 한 몸을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동시에, 덕망이 높기 때문인 줄 압니다. 그러므로 나도 이들에게 응분의 경의를 표하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쓰였으면 하는 일말의 아쉬움이 남습니다. 무릇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유용하게 쓰였을 때 비로소 크게 빛나게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지식이 세상 일에나 도움을 준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노벨상이나 그 밖의 무슨 표창감이나 될 뿐입니다.
도대체 지식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선 “번제(燔祭)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보물창고라, 하나님을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며, 진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무엇이며, 선과 악이 무엇이라는 해답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우주관(宇宙觀)과 인생관 및 역사관, 윤리관 등을 가지려면 우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인간의 머리로 짜낸 지식은 고작 우리가 한 세상을 사는 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道具)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지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지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참된 지식을 얻는 데 가로 거칠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훼방하기가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지식인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은 대부분 쥐꼬리만 한 자기의 지식에 만족하여, 큰 지식, 곧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는 방금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지식이요, 세상 지식은 하나의 생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지식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 덕(德)에 대해서도 해당됩니다. 즉 덕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여호와의 덕과 인간의 덕이 그것입니다. 한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중생하여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몸에 배인 덕과, 인간의 힘으로 수도하거나 배워서 얻는 덕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덕이요, 후자는 인간의 능력을 나타내는 덕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예수쟁이가 더 고약하다고. 이 말은 물론 적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남에게 그런 인상을 주지 않도록 유의해야 하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말하는 덕과 믿는 사람의 그것은 질적(質的)으로 다릅니다.
즉 전자가 말하는 덕은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인간적인 가치평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으며, 인간이 대인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같은 덕이지만, 믿는 자의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구원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은혜 가운데 성신의 열매를 맺는 것이 구원의 지름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롬15:2)라고 강조한 것이 바로 이런 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덕은 자기 힘으로 수도에 의해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총으로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많이 받고 덜 받은 것은 그 사람의 덕성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수도에 힘쓰면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더구나 산 속에 깊숙이 파묻혀 경이나 읽고 마음을 맑게 하면 죄를 짓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범죄를 더하지 않는 것이지, 결코 원죄나 유전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안찰을 해 보면 곧 드러납니다.
자범죄는 물론 원죄나 유전죄까지 씻음을 받아 구원에 이르려면 주의 피 권세를 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아무리 덕스럽게 보여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 믿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제일 싫어하시는 일, 곧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뵙기 전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 사람으로, 그 법도 안에서 움직이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이 같이하게 되자 자기의 죄상을 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전에 잘못 배운 그릇된 지식을 다 ‘똥으로 여겨’ 내버리기로 했습니다.(빌3:8)
그러니까 여기서 바울의 가치기준과 사고방식이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돌(주님)에 부딪치면 가루가 된다.”(마21:44)는 말씀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가 마음속에 주의 신을 모시면 우선 이와 같이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미처 모르고 있던 죄의식(罪意識)을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아니, 주를 믿고 주의 피로 죄를 씻을수록 죄가 더 많이 드러나고, 죄가 드러날수록 자기의 연약함을 느껴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며, 주님을 의지할수록 은혜를 충만히 받게 마련입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풍성하다.”(롬5:20)는 말씀은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