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Part 04 - Chapter 30

페이지 정보

DATE. 2021.12.26
[2권] Part 04 - Chapter 30

본문

Part 04. 어둠을 헤치고  

Chapter 30. 고난의 도(道)


믿음은 하늘의 선물이므로 위에서 주셔야 받을 수 있지만, 장본인이 이를 마다하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므로 하늘에서 주시는 믿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평양감사도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는 속담 그대로, 믿음이 우리에게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싫다는 데야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 가끔 벽에 부딪치게 마련입니다.


하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에도,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의 모든 위신이나 자존심 따위는 초개(草芥)같이 버리고 순수한 동심(童心)으로 돌아가서, 빈손들고 간절히 하나님을 사모하는 심정으로 경건하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마음을 고스란히 마귀에게 빼앗기고, 오만가지 잡생각이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입술로만 주님을 골백번 찾은들 가슴이 냉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일수록 은혜 투정은 남보다 더한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몸 된 제단에 나와 무릎을 꿇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려면 정한 그릇부터 마련해야 합니다. 은혜는 지저분한 그릇에 담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묶어 바쳐 여호와에게 산제사를 드릴 때 비로소 주님에게 상달이 되어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여 이 시간에도 나왔습니다.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사오니, 저에게 흡족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하고 열심히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여러분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것입니다.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여러분의 주의력을 세상으로 돌리기 위해 덤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끝까지 물리쳐야 합니다. 예배도 하나의 싸움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마귀의 정체를 안다면 예수 믿는 목적을 더욱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귀는 이 지상은 물론(마4:9) 공중 권세까지도 잡고(엡2:2)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마귀의 위력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태평스럽게 눈길이 자꾸 세상에 쏠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되도록 쉬운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교회에 몇 번 얼굴을 내놓았다가, 조금만 시험을 당하면 곧 자라 모가지처럼 쏙 들어가 숨어 버리는 그런 신앙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없는 가운데, 어려움 속에서 당신에게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좁은 길을 가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세상 볼일을 다 마치고 남는 시간을 주 앞에 드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귀가 차지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어디서나 꾸준히 주님을 의지하며, 그 뜻 가운데 움직여 나날이 변하고 달라지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동안 성령을 충만히 받아 잠시 주를 위해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 순교보다도 오히려 더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이 자리를 빌려 내 지난날의 신앙생활을 잠깐 더듬어 보려고 합니다.

나는 본래 마귀를 섬기는 집안에 태어나, 예수의 '예' 자(字)도 모르고 자라다가, 열여섯 살 났을 때 처음으로 교회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때부터 아주 예수에 미치다시피 했습니다.


아침에 책가방을 끼고 나서면 학교까지 10리 길을 줄곧 찬송가를 부르면서 걸어갔으며, 학교가 파하여 집에 돌아올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시험 때가 되어도 책을 들여다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성경만 읽곤 하였습니다. 잠도 집에서보다 교회에서 자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랫동안 병환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곧 홀어머니와 우리 일곱 남매는 입에 풀칠을 할 끼니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먹을 것을 구해 와야 할 판인데, 친척들은 손을 내밀까봐 일찌감치 거리를 멀리하고, 그렇다고 우리를 돌봐 주려는 독지가가 갑자기 나설 리도 없고 하여 나는 할 수 없이 주님에게 매달려 몰래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식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어찌하오리까? 살아 계신 주께서 우리 집 사정을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응답을 주옵소서." 기도를 마치고 나서 나는, "주께서 내 기도를 들으셨을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들으셨다면 언제 응답을 주실까?" 이리하여 생각은 항상 주님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도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주께서는 내 기도를 어쩌면 들어주실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매달려 간구하리라고 마음먹고, 나는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자다가 깨어나 이불 속에서도 엎드려 기도하고, 네 시에 새벽 예배에 나가서도 물론 기도했습니다.


"주여, 오늘 하루를 주의 뜻대로 움직이게 하여 주옵소서! 좀 더 주님을 깊이 알게 하여 주시고, 주님에게 가까이 가게 하여 주소서."

이렇게 주님을 찾고 부르면서 하루하루 지내다가, 한번은 새벽예배에 나가 기도하는데 갑자기 주께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환상으로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열심히 주님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디 가나 마음속으로 주님을 부르는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어쩌다가 심부름 값으로 50원 생기면 몰래 헌금하고, 날품을 팔아 몇 푼 손에 들어오면 전도사님에게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라도 사다 드리곤 하였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나는 차츰 주님과 직접 간접으로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나로서는 이보다 더 큰 기쁨과 위로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남들이 좋아하는 세상 재미는 시들하게 생각되어 자연히 멀어져 갔습니다.


나는 자나 깨나 주님과 동행하기를 간구하고, 또 실제로 그런 은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운 불덩이가 떨어져 전신을 마구 사러버리는 것 같더니, 얼마 후에는 향취가 온통 코를 찌르는 것처럼 풍기다가, 그 다음에는 생수와 이슬로 온몸을 씻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움과 기쁨을 세상의 무엇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아마 체험해 보지 않고는 잘 모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은혜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나는 자연히 주님만 의지하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들을 때면 잘하든 못하든 주의 종의 말이라 해서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주의 종을 정성껏 받들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내 자신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물질로 주의 종을 충분히 돕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님에게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무척 간구하였습니다. "물질을 주옵소서. 주님, 저는 헌금을 하고 주의 종을 받들려고 해도 물질이 없습니다."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끝내 나한테 물질을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는 일마다 실패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가난에 몹시 시달려 왔습니다. "웬일일까?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번번이 낭패만 보아야 하는가?"


하긴 세상에서 일해 나가려면 불가불 세상과 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가 줄곧 연결이 되니, 남들과 어울려 쓴 막걸리 한 잔 나눌 수 없는 처지고 보면, 생존 경쟁에 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남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그건 뒷전이고, 생각은 언제나 딴 데 가 있었으니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주의 은혜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발 벗고 나서서 한번 마음껏 뛰기라도 해 보겠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이리하여 나는 진퇴유곡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궁지에 몰릴수록 나는 주님에게 호소하였습니다. 밤중까지 정신없이 기도하다가 잠자리에 들면 이불 속에서 박하사탕을 물었을 때처럼 입 속이 싸아 하고, 성령의 바람이 일면서 나는 은혜의 창파에 싸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여전히 은혜가 연결되어, 어느 장소에 가든지 주께서 항상 같이하는 가운데, 때때로 비몽사몽간에 주님이 몸소 나타나 보이기도 했습니다. "나를 진실히 사모하는 자에게 내가 나타나 보이리라."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나는 주께서 멀리 계시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즉 주님이 계신 곳에 이영수가 있고, 이영수가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합한 자는 한 신을 이룬다."는 말씀 그대로, 주와 하나가 되면 주님이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도 나는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주께서 물질을 달라는 내 기도에 응답을 하시지 않고 나를 가난 속에 놓아둔 것은 주의 은혜였습니다. 만일 내가 물질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했더라면 세상으로 흘러 주님을 멀리하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주님과 가까이하는 방법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하는 것은 역시 기도입니다. 기도란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선생을 찾아가서 세상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논을 하는 것처럼, 신앙 가운데 일어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알리고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경우에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믿고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체로 너무 부유하거나 시간에 얽매이면 믿음을 지키고 키워 나가는 데 지장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정리하여 좀 더 하나님과 가까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열심히 매달려 믿음이 몸에 깊이 배어 하나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억지가 개재되므로, 귀찮고 성가시고 때로는 짜증도 나게 마련입니다.


내가 노총각으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결혼 자체가 영적으로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정성과 시간을 주님에게 더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더구나 나는 여러분에게 은혜를 끼쳐 주는 주의 심부름을 해야 할 입장에 있으므로 여기에 알맞은 환경을 스스로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그 속에서 주의 신이 약동하면 자연히 인간의 4대 욕망을 초월하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깃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들이 나에게 뭐라고 해도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욕해도 그만, 칭찬해도 그만, 나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이런 데 구애되기에는 내가 할 일이 너무나 태산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면 으레 밖으로부터 핍박과 시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리 여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우려면 이런 고난의 철학도 아울러 깨달아야 합니다.


방금 여러분이 부른 찬송가와 여러분이 친 박수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의 예배 의식이 아니라, 마귀와 싸우는 일종의 방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부르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반면에, 여호와는 매우 기뻐하십니다. 찬송가가 흔히들 부르는 유행가는 말할 것도 없고, 명곡과도 다른 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똑같이 가사에 곡을 붙여 부르는 노래라도 그 효능은 이와 같이 하늘과 땅만 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가 찬송가 소리를 싫어하여 훼방한다는 것은 여러분이 가끔 체험할 줄압니다. 가령 초상집에 가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면 처음에 목이 꽉 잠기는 것도 그 하나의 보기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치는 손뼉도 그렇습니다. 시편에 '손뼉을 치면서 여호와를 찬양하라.'(시47:1)는 말씀에 따라 손뼉을 치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마귀가 몹시 싫어하여 못 치도록 훼방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처음 나온 분들은 박수를 치는 것을 쑥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 자체도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수를 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곧 마귀와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