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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2.28본문
Part 01. 심원한 경륜
Chapter 01. 율법에 대하여 (1)
1) 제 2 르네상스
기독교는 인생의 가장 근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인간에게 죽지 않는 길을 제시해 주는 종교입니다. 나는 구태여 남의 종교에 대하여 말하고 싶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별로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 자체가 크게 문제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단상에서 새삼스럽게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자주 입에 올리는 것도 까닭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실상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충 윤곽만 드러났을 뿐, 정작 그 핵심은 많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가려진 데가 많은데, 이것은 마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이 진리의 면사포는 벗겨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그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이 단상을 통하여 그 거창한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중세기 유럽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으나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겨 인간 중심으로 살려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문예부흥)였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 중심의 생활도 그 후 허다한 폐단이 일어났으며, 수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커다란 벽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즉 핵무기니, 공해니, 인구 폭발이니 해서, 자칫하면 지구 자체가 송두리째 쑥밭이 될 위기가 닥쳐 온 것입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이것은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큰 과제입니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처방이 나와 있으나, 어느 하나도 만족스러운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현대를 '가치의 무정부상태'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목표도 소망도 없이 그때그때의 쾌락을 추구하기에 급급할 뿐, 갈 길을 못 찾아 헤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히피'니 '비트'니 하는 건달들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정확한 진단부터 내려야 합니다. 어디가 잘못되었을까요? 원인은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당시에 식자들이 희랍 세계로 돌아갔던 것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제 2 르네상스'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암흑시대로 표현되는 중세기로 후퇴하자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중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폐단이 많았으나, 이것은 인간의 잘못이지 결코 하나님의 탓은 아니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유를 잘못 사용했기 때문이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허용해 준 이상, 행동 하나하나에 간섭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릇된 인생관을 고쳐야 합니다. 요컨대 인간 본위의 생각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 1 르네상스는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돌아갔으나, 제 2 르네상스는 인본주의에서 신본주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전자는 후자에게 흡수되어야 합니다. 즉 인간본위의 모든 사고방식과 언동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세기의 신본주의와는 그 차원을 달리하며, 또 달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휴머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제 1 르네상스 이후의 그것과는 판이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은총 아래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재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 2 르네상스의 첫째 과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억압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까이하기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시켜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를 제일 얽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뭐니 뭐니 해도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해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굴복하게 마련입니다.
하긴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여러 가지 제약을 받습니다. 주일날 마음대로 놀러가지도 못하고, 연보도 내야하고, 그밖에 그래서는 안된다, 이래야 한다, 하고 간섭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작은 자유를 억제하려는 것이지, 결코 억압이 아닙니다.
이 밖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율법'이라는 이름의 하나님의 가르침 자체에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가르침이 납득이 가지 않을뿐더러, 때로는 '엉터리'라고 속단하게 될 정도로 유치하게 보입니다.
즉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례가 허다하며, 우상숭배와 같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 격분하며, 원수는 철저히 갚아야 하고, 당신의 백성들에게도 큰 책벌을 내리기가 일쑤입니다.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우리는 이것을 휴머니즘(인본주의)의 견지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동시에 두렵기 짝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비하시다고만 여기다가는 나중에 실망하게 됩니다. '무슨 하나님이 이래!' 하고 말이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도적 같은 아버지도 자식이 미워서 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미움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채찍을 이런 각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편애에 대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특히 구약시대에,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만을 골라서 은혜를 베풀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랜 경륜을 이루시는 데 필요한 영적인 군대를 기르기 위해 어느 일정한 지역의 백성에게 집중적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마귀의 훼방을 지혜롭게 물리치고 일을 보다 효율적으로 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리기는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역사해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불공평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는 말씀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것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이렇게 다스린다
아담,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오랫동안 미개한 가운데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려던 애초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에게 처음으로 역사하신 것은 신석기시대를 지나 인지가 어느 정도 발달한 아브라함 때이며, 그 후 이삭을 거쳐 야곱을 통해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만을 상대로 은총을 베푼 것은 그 당시의 일이요, 결코 언제까지나 변치 않는 하나님의 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와 같이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의 법도가 바뀌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열두 아들을 택하여 역사의 대상으로 삼고 이들이 지켜야 할 법도를 처음으로 반포하신 것은 모세 때였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영도자로 내세워 애굽의 압제에 시달리는 당신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할 때,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 제정한 법도의 요체가 이른바 10계명입니다.
이들은 400년 동안이나 애굽 풍속에 젖어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예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큰 이적과 기사를 저들에게 보여 주셨으나, 저들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우습게 여기기가 일쑤였으며,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쳐오면 불평불만을 퍼붓고, 심지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절을 하는 등, 주책도 이만저만 부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법도는, 세상의 법률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환경과 여건에 맞춰서 반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의 움직임에 따라 일단 반포된 하나님의 법도를 변경하기도 하십니다. 바울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할례를 폐지했는데, 이것은 주께서 피를 흘리신 뒤에 땅의 여건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모세 율법을 보면 광야에서 오랫동안 헤매는 이스라엘 민족의 참상이 그대로 반영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제 1조가 이방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고, 제 2조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계명 가운데서 제일 강조한 것이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10계명에 이어 모세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를 소상히 일러주었습니다. 여기 보면, 만일 타인으로부터 해를 입으면 철저히 복수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을지니라." (출21:24)
그러니까 누가 자기를 해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만큼 상대방에게 보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율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가혹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실망하기도 하고, 숫제 하나님을 외면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기중심의 속단이 낳는 폐단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마귀는 인간의 육을 사이에 두고 싸우기 때문에 이런 육적인 율례가 반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정도 엄격한 법도로 다스리지 않고서는 미개하고 완악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을 치리해 나갈 수 없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법도가 이처럼 엄격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만큼 미개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명을 하나님의 헌법이라고 한다면, 율례는 민법이나 형사 소송법과 같은 기타 법률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말씀을 주시고, 당신의 백성들이 준수하나 아니하나 시험하셨습니다(출16:4, 신8:2)
그리하여 잘 지키면 축복을 주시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는 원칙입니다. 따라서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크게 드러내야 할 모세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자기를 내셍운 연고로(민20:10)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여호와의 통고를 받았습니다. 모세가 자기의 후계자를 세워 줄 것을 여호와께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이미 여호수아를 내정해 두었다는 사실을 모세에게 알려 주어, 성업의 인계가 순조로워졌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이렇게 되고 보니,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는 필경 다 소멸되어" (민32:13)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이유를, "나에게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기 때문" (민32:11)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온전히'라는 말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들은 전혀 순종치 않은 것도 아니어서, 때로는 순종하기도 했습니다. 즉 홍해를 발로 걸어서 건너가거나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거나 할 때에는 여호와를 찬양하고 순종하였으나 그것은 그때뿐이고, 조금만 고생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면 피차에 이만저만한 타격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 소리를 듣지 않는" (신1:45) 그런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