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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2.29본문
Part 01. 심원한 경륜
Chapter 01. 율법에 대하여 (3)
4) 자유의 율법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에는 흔히,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인을 상대하여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만을 살피고 보호하고 은혜를 베푸는 한편, 범죄 하면 책망과 때로는 채찍도 내리면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방인들, 즉 이스라엘 민족 이외의 모든 족속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해도 그만, 선한 일을 해도 그만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 그들에게 선한 일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을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자기 나름대로 창조주를 찾아 섬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생각해낸 것으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공경하는 것이 못 되므로 역시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행동반경, 즉 활동 범위는 결코 넓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약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렸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대상은 사실상 극히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즉 만인에게 은총의 문은 열려 있으나, 실제로 그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와 신령한 꼴을 먹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변에는 영적인 이방인이 수두룩합니다.
그럼 어찌하여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좁게 움직이실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시며, 여기 필요한 당신의 일정한 군대를 확보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범위를 좁혀서 집중적으로 강하게 역사하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하늘의 군대, 곧 주의 아내에 대해서는 주께서 땅에 계실 때에도 말씀이 있으셨지만, 승천하시고 나서 사도 요한에게 이상 중에 상세한 청사진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설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군대는 무슨 군대냐고 반문하지는 않을 줄 압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성경적으로 누누이 밝힌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즉 할례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선민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표시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집안에 태어나도 할례라는 절차를 밟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으며, 이방인이라도 유대인과 한 식구가 되어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머슴이건 서생이건 간에 유대인과 같은 지붕 밑에서 한솥밥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할례란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의 '시민권'과 같은 것으로, 여기에는 이런 권리와 함께 하나님의 법도(율법)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따르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다른 법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통치자는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방인처럼 손수 지켜야 할 법률을 만들 필요도 없지만, 또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도 그때그때 땅의 여건에 따라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시면 마귀의 침입으로 제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대마다 선지자를 세워 그를 통하여 명령과 지시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본다면 이 땅에 세운 선지자는 국무총리 격이라고나 할까요? 왕이 총리를 앞세워 나라를 다스리듯이,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을 처리하신 것입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드보라에게는 백성들로 하여금 싸울 것을 명령하시고(삿4:4이하) 예레미야에게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복종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습니다.(렘38:17)
그러나 구약시대의 모세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며,(행13:3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하지 못하므로,(히7:19) 하나님께서는 이미 주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새로운 법도를 실시하실 것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땅에 오셔서 예언된 대로 하늘의 새로운 법도를 전하려고 하다가 벽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행색이 초라한데다가, 세례 요한이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천여 년 동안 모세의 율법을 지켜오는 가운데 그것이 몸에 배어 주님의 말씀이 먹혀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께서 우선 할례부터 폐지해야 할 터인데, 이것은 요지부동의 오랜 습성이라 건드리지도 못하고, 겨우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주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어 당신이 미처 하지 못한 말씀을 대언케 하겠다고 약속한 이유의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2-13)
주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의 광경을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칼날 같은 말씀으로 상대방을 치시는가 하면, 때로는 부드러운 말씀으로 조용히 타이르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비유만 하더라도, 씨를 뿌리는 비유, 고기를 낚는 비유, 돈을 꾸고 갚는 비유 등 여러 가지입니다.
주께서는 설교하실 때 미리 제자들을 시켜 일정한 장소에 사람들을 모이게하고, 흔히 바위 같은데 올라서서 육성으로 말씀하였으므로 2, 30미터 이상은 잘 들리지 않아 자주 장소를 옮겼습니다.
청중들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가 어떻게 생기고, 또 무슨 말을 하나 알아보려는 호기심에서, 대체로 농부는 일이 한가할 때, 어부는 고기잡이를 나가지 않을 때, 장사꾼은 물건이 잘 팔리지 않을 때 떼를 지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청중에 따라 적절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였습니다.
게다가 오늘날과 같이 마이크가 없어 많은 청중에게 한꺼번에 말씀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시면서 하늘의 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입에서는 자연히 이 말 저 말이 나가게 되었지만 듣는 사람들의 귀에는 잘 들어왔던 것입니다.
만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 같은 유식층이 많이 모여 율법에 관한 질문을 해서 주님을 책잡으려고 하면 그때에는 저들보다 몇 곱절 오묘하고 깊은 말씀으로 꺾어 버리곤 하셨습니다. 예컨대 저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 일입니까, 합당치 못한 일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주께서 서슴지 않고 저들을 향하여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라."(눅20:25) 하고 말씀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저들은 주님을 올가미에 걸려고 하다가 오히려 깜짝 놀랐습니다. 시골 목수가 어쩌면 이렇게 능수능란할까 해서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형식에만 치중하는 저들을 여지없이 들이쳤습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 이렇게 되니 저들이 주님을 좋아할 리가 만무합니다.
저들은 모세 율법을 내세워 사사건건 주님을 물고 늘어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때로는 저들보다 선수를 쓰기도 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의 가르침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온전케 하려는 것이다."(마5:17)
주께서 이렇게 율법의 귀중성을 내세우는 데야 저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본의는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 때까지"(눅16:16)라고 분명히 못을 박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 하기 때문입니다.(히7:19)
그러나 이것을 폐지하고 새로운 자유의 율법을 반포한다는 것은 여간 난공사가 아니었습니다. 전에 배운 것이 골수에 배어 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면 너희도 님을 대접하라."(마7:12)
이것은 물론 누구나 명심해야 할 훌륭한 가르침이지만, 주님은 특히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치니깐 나도 너희를 친다.'는 뜻을 암암리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식자층은 이런 말귀를 금방 알아듣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워낙 배우지 못하여 센스(지적 감각)가 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님인들 오죽 답답했겠습니까? 제자들은 매사에 서툴고 눈치가 없고 거칠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바알세불을 힘입어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고 꼬집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도깨비라는 소리입니다. 그러니 예수와 그를 따르는 무리와는 아예 상종도 하지 말고 외면해 버리라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 당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바뀔 때마다 언제나 그런 것입니다. 바울 때에도 그랬으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