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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2.03본문
Part 02. 십자가는 살아 있다
Chapter 03. 그 품에 안기리 (1)
1) 둘째 언약의 주인공
나는 지금부터 꼭 1년 전, 우리 에덴성회의 첫 돌을 맞아 한 주일동안 특별 집회를 열고, 주께서 태어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하시기까지의 행적에 대하여, 주로 선지자들이 남긴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중심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될 한 주일 동안의 특별 집회에서는 둘째 언약의 주인공으로서 주께서 어떻게 움직였는가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배후를 더듬어 좀 더 깊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항간에는 성경 이외의 말을 하면 으레 상대방을 이단으로 모는 폐단이 없지 않지만, 이것이야말로 성경과 어긋나는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고 말하고,
바울은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고 말하였습니다. 즉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성경에 없는 깊은 것을 논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 그 말에 어디까지나 성경적인 밑받침이 있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그 길 예비자로서 먼저 뭇 사람들에게 주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모태에서부터 성령을 충만히 받고 교권을 쥔 제사장의 집안에 태어나 세도가 당당하게 자랐으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칠 때 주위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그 위세에 눌려 그의 말을 고분고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세례를 줄 때, 당시에 가장 지식층에 속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서슴지 않고 욕설을 퍼부은 것으로도 그가 얼마나 도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실로 처음부터 이렇게 고자세로 나와도 누구 하나 끽소리 못할 정도로 세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눅3:15)
이러한 그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곧 오신다고 예고했을 때 사람들의 기대는 부풀대로 부풀어 올랐습니다. “누가 과연 메시아일까? 그는 얼마나 훌륭한 가문에 태어났으며, 또 얼마나 잘 생겼을까?” 하고 저마다 여간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하나님께서는 주님에게 임무를 수행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가사를 정돈하고 당신의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요한이 물세례를 주는 곳에 가서 사람들의 동태를 주시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순간, 그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는 것을 보고 요한은 놀라고 또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예수가 분명히 그리스도라는 것이 드러나기는 했으나, 이렇게 초라한 사람을 뭇 사람들에게 구세주라고 증거하기가 난감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세상에 태어나 해야 할 유일한 임무가 오랫동안 전 이스라엘 백성이 손꼽아 기다리는 메시아가 누구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인데, 어느 모로 보나 자기보다 월등히 나아야 할 메시아가 꼭 자기 신들메나 풀기에 적합한 것 같은 볼품없는 목수라, 사람들이 자기 말을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 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의 머리 위에 성령이 내렸으니, 주님을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요한은 세례를 다 마치고 나서 주님을 찾아가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앞으로 할 일을 의논하고 사람들에게 서서히 주님을 증거하기로 했습니다.
주님이 우러러 보이는 훌륭한 인물로 나타났다면, “이분이 바로 메시아올시다!” 하고 소개하면 될 텐데, 그와는 정반대였으므로, 대뜸 주님을 백성들 앞에 내세우지 못하고 이를테면 얼마 동안 뜸을 들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세례를 계속하면서 백성들을 향해, “여러분들 중에 내가 말한 메시아가있는데, 나는 그의 신들메를 드는 것도 감당치 못 하겠소.”(요1:26-27) 하고 일단 암시를 주어 간접적으로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저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메시아가 과연 누구일까 하고 그럴싸한 사람을 찾아내어, 자기 나름대로 메시아라고 짚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튿날 주님은 다시 요한에게 가서 시치미를 뚝 떼고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또 세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요한은 이미 그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가만 계시지, 무엇 때문에 또 세례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하고 조용히 말하면서 깍듯이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서로 수군거렸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뭔데 요한이 저렇게 굽실거리나!” 또는 “이상한 걸, 아무리 봐도 천생 시골뜨기 같은데?”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자 요한은 비로소 실토를 했습니다. “여러분, 전에 내가 말한 메시아가 바로 이분이올시다! 이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요1:29)
이것은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주님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어딘가 잘못된 게 아냐?” 또는 “그럴 리가 없어.” 하고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입장이 곤란하게 된 것은 주님보다도 오히려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여기서 일이 순조롭게 잘 되면, 다시 말해서 세례요한을 따르던 무리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받아 주면, 세례 요한은 자기의 임무가 끝나게 되므로 깨끗이 물러설 수 있는데, 사람들이 자기 말을 좀처럼 믿어 주지 않고 반신반의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성사업의 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요한은 요한대로 여전히 세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까지도 손을 떼면 하늘의 역사가 중단되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뭇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한편, 계속해서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나도 여러분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누구인지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더러 하나님께서, ‘물세례를 줄 때 머리 위에 성령이 머무는 사람이 있을 테니 그가 바로 메시아인 줄 알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세례를 주고 있는데, 하늘에서 성령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이 내려와 머물지 않겠어요? 그래서 내가 아, 이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메시아로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요1:33 참조)
이렇게 세례 요한이 목청을 돋워 구세주가 오셨다고 열심히 증거하였으나, 사람들은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 중에서 주를 따른 사람은 겨우 두 사람, 안드레와 요한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님은 전도의 방법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세례 요한을 따르는 제사들 중에서 상당한 수를 흡수하여 이들을 기반으로 하여 하늘의 도를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현실은 이처럼 뜻대로 되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붙잡고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맨투맨 작전을 하신 것입니다.
이리하여 밥알 붙듯 주님에게 모여든 것은 고작해야 가난하고 병든 하찮은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에 대한 성경 말씀이 그대로 응해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 보기에 흠모할 만한 데가 없다.”(사53:2)고 했으며, “빈궁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한다.”(사29:19)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내로라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주의 언동에 일일이 꼬투리나 잡으려고 했을 뿐,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례 요한은 여전히 이들에게 세례를 줄 수밖에 없게 되고, 주님은 요한의 기반을 전혀 물려받지 못한 채 새로이 세례를 주면서 일을 해나갔던 것입니다.(요3:22) 이때 주께서 당신의 일꾼으로 택한 것이 열두 제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주님이 인계 받아 일을 시작하려던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주님과 요한이 따로따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자, 주님의 세례가 훨씬 더 위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이 주님 쪽으로 많이 모이는 반면에 요한에게서 하나 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루는 요한의 제자가 스승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 이것은 참으로 요한의 위치에서 의젓한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요한은 이때까지만 해도 ‘길 예비자’로서의 자기 위치를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차츰 두 분의 관계는 미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기 위해 이적과 기사를 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데는 제일 속한 방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마치 광대 구경이라도 가는 심정으로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예수라는 이상한 사람을 보러 모여들었습니다.
2) 주님과 시험
세상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유럽과 북미 여러 나라들의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자 습관이 되어 주일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모입니다. 설교도 들을 겸, 사람도 만날 겸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거나 참된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살아가는 방편의 일부로 교회 문을 드나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에는 타성이 생기고 때가 끼게 마련입니다. 교회 건물이 화려하고 예배 의식도 그럴 듯하지만, 영은 기갈에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함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그 폐풍은 우리라고 해서 물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은혜가 많은 곳에 으레 마귀가 극성을 부리게 마련이므로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온 세상의 마귀가 우리를 노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마귀를 무찌르고도 남을 큰 보혈의 은총이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마귀를 끝까지 대적하면 물러간다고 했습니다.(약4:7)
우리 에덴성회는 쉽게 말해서 하늘군병의 양성소입니다. 여러분이 예뻐서 주께서 남달리 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군병으로 뽑아 싸움터(아마겟돈)에 내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역사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 몇 명 모이느냐보다, 몇 명이나 이루어지는가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서야 하고 나는 여러분을 세워야 합니다. 내가 주께서 맡은 사명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좋든 싫든 이 일에 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청춘을 다 바쳐가면서 이렇게 외치겠습니까? 나도 남과 같이 편안히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 세상에서 사사로이 움직일 수 없는 몸입니다. 이런 나를 깊이 이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 이해하여 주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여태 누구에게도 이러한 심정을 호소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긴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좌정해 계셔서 모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좀 더 열심을 내어 잘 다듬어지면 주께서 먼저 알고 보여 주시므로 이것을 위안으로 삼다가도, 일이 순조롭게 되지 않아 속이 상하면 역시 주께서 아시고 힘을 주시므로 기운을 내곤 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것은 나뿐만이 아닙니다.
바울도 약해지면 주께서 이상 중에 나타나 힘을 주어 기운을 내게 했던 것입니다.(행23:11) 나에게 낙이 있다면 주님과 교류하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는 어떤 주의 종도 일을 해나가지 못합니다. 주의 종은 거기서 지혜와 힘과 기쁨까지도 얻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신비로울 것도 없습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실제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하늘의 도를 전하기에 앞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나가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시는 장면을 성경에서 읽어 잘 아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하게 말씀드렸으므로, 여러분은 설마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마귀에게 시험을 당할까, 또는 주님과 마귀가 어떻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이상 중에 나타나는 것으로, 직접 경험해 보면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도 이상 중에 수십 차례 사단과 대면도 하고 대화도 해 본 일이 있습니다. 이때 마귀는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사람을 꾀어서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술책을 쓰는 것입니다. 나는 마귀와 싸울 때마다 진땀을 흘리면서 물리치곤 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상 중에 더러 마귀와 겨뤄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가령 잠결에 마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목을 조르거나, 환상 가운데 마귀가 덤벼드는 광경을 목격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주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당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기서도 우리는 마귀의 위력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귀는 예수가 목수 일을 할 때에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예수가 가족을 위해 목수 일을 해서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마귀가 덤벼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하늘의 도를 전파하러 나서서 공적으로 움직이게 되면서 국면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귀가 가만두지 않고 이모저모로 가로막으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맨 먼저 알아본 것도 마귀입니다.(막1:26) 마귀는 인간 예수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영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내가 축복한 생수를 보고 미친 사람이 도망치는 것도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 속에 담긴 주의 피가 영체인 놈에게 보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