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Part 02 - Chapter 0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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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2.09
[3권] Part 02 - Chapter 0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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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십자가는 살아 있다 

Chapter 03. 그 품에 안기리 (2)

 

3) 보혈의 의미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6:53) 이 말씀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너나없이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말씀이 갖고 있는 영적인 의미와 그 중요성에 대하여 이미 말씀드렸으므로 재론하지 않기로 하고, 여기서는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셔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시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말한 피와 살은 물론 주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의 승리의 피요 영광의 살을 가리키며, 따라서 이 말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피와 살은 주님의 육적인 그것이 아님은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또 주님이 제자들과 가진 이른바 최후의 만찬에서 먹고 마신 빵이나 포도주일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고 살을 찢기심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보내주시게 된 영적 양식, 성령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성령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기독교의 근본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령의 은사를 받았느냐, 받았으면 얼마나 받았느냐, 그리고 현재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이 땅에 보내주실 수 있습니다.(7:39 참조)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죽는다는 말에 놀라고 겁을 먹은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16:7)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의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가 훼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신 고충과 그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생축이 되게 한 것은 당신의 큰 경륜을 이루기 위해 계획하신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사람 이사야를 통하여 미리 예언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사람들이 곧이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마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성경을 기술적으로 기록하여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전에도 말했지만, 여호와께서 당신의 유일한 경륜, 곧 하늘나라를 이룩하기 위한 역사는 결코 많은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하늘 군병의 수는 그다지 많은 수가 아니며(144) 이들은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의로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옛날 아브라함을 구약시대에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 후손을 당신의 선민으로 택하신 후에, 이들 중에서도 당신의 손발이 되는 선지자를 따르는 자들만을 상종해 왔으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바울을 시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여 성령으로 오늘날까지 역사해 오셨지만, 역시 그 범위는 한정된 일부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는 부분적으로 명색을 유지해 오다가, 오늘날 이 땅에 이긴자 역사로 말미암아 성령의 붐이 일어났으며, 또 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역사에 부름을 받은 수많은 믿음의 형제들은 은혜의 창파 속에 젖어 열광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일찍이 수많은 선지자들도 꿈만 꾸고 맛보지 못한 놀라운 은총으로, 세상 사람들이야 뭐라고 하든, 그 은총을 받아본 사람은 그야말로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 저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의 피 권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었으며,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완성하시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 놀라운 은총이 차츰 식어가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금 못 박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 광경을 가만히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크게 노하고 계십니다. 구약시대는 당신의 율례를 조금만 어겨도 노하시던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주의 피를 헛되이 짓밟는 죄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 책임이 어디 있든 간에,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오늘날 뭇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도 안타까울 정도가 아니라 비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거늘, 주님이야 더 말해 뭐하겠습니까? 옛날 죄를 저지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몇 십 배의 책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나는 여기 대해 더 말할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내가 2년 전에 이 단상에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 드려야 한다.”고 외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주께서는 이 부족한 사람을 내세워 지금 그 뒷수습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니.”(58:12) 내가 바로 이런 치다꺼리를 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내 손발이 되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겁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일이 어려우면 그만큼 보람도 있는 법입니다.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루 24시간 내내 주께서 줄곧 나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은 하필이면 이 보잘것없는 이영수와 주야로 같이 하실까요? 이에 대한 답변도 하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인간을 가리고 주 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나 같은 못난 사람이 적격자였나 봅니다.

 

지금은 전과 같이 주께서 은혜를 마구 뿌려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세와 그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내린 은총의 경우를 상고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세 때에는 하나님께서 무작정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여호수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능을 나타내 보이면, 돌로 표적을 세워 저들이나 그 후손들로 하여금 이를 기념하여 명심하도록 했습니다.(4:4-7) 그만큼 여호와께서 은혜에 인색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 피와 살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단상을 통하여 불로, 이슬로, 생수로 내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나 여러분이 잘나고 예뻐서 이 역사에 불러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둠의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고 우리를 통하여 어둠 속에서 헤매는 무수한 형제들을 건지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여기 동참하는 긍지를 갖는 한편, 무거운 사명감을 느껴야 합니다. 아무쪼록 이 역사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자기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 산상수훈

무릇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 언제나 십자가를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의문입니다. 주님을 항상 가까이 모시고 그 가르침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십자가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며, 이렇게 되면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붙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십자가상을 쇠줄에 매어 목에 달고 다니면 그게 십자가를 붙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십자가를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일까요? 십자가상을 방안에 걸어 놓고, 드나들 적마다 자연히 눈에 뜨이게 하는 것이 십자가를 늘 바라보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마움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곧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나아가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라고 했습니다.(10:38) 이건 또 무슨 뜻일까요? 우리도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잘 참석하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전도에 힘쓰며, 십일조도 착실히 바치는 등등이 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을 무슨 어마어마한 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일부터 차곡차곡 해나가면 그것이 바로 주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동시에 주의 뒤를 따르는 것이 됩니다.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11:30)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지 않습니다. 짐을 져도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있으면 누구나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 보면, 예수를 믿으려고 해도 술, 담배를 끊어야 하기 때문에 못 믿겠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 담배 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좀 더 경건하게 가다듬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며, 이것 역시 주께서 쉽사리 끊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쟁이가 되면 제사를 드릴 수 없어 못 믿겠다고 합니다. , 예수쟁이는 제사를 안 드리나요? 다만, 추도예배라고 해서 제사의 형식을 달리할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행위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안 믿는 것까지도 우리의 의사에 맡기십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따르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여러분 중에는 용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께서 감당케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여느 종교의 경전처럼 세상에 대한 교훈적인 말은 별로 찾을 수 없고 거의 영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흔히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데, 이 사랑에 대해서도 내용이 많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기독교가 수도에 그치지 않는, 생명의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영적인 말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지만, 주님으로서는 극히 초보적인 이야기밖에 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이야기해 봤자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못 다한 말씀을 보혜사 성령에게 미루셨습니다.

 

주께서 희한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사람들을 주위에 많이 모여들게 했으나, 이들은 고작해야 주님을 큰 선지자 정도로 인정했을 뿐, 액면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라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은 산에서 야외집회를 많이 가졌습니다. 이분은 원래 산악인입니다. 생업이 목수라 언제나 산을 찾아다녔습니다. 이 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온 세례 요한과는 활동무대부터가 다릅니다. 주님은 그때그때 청중들의 동태에 따라 대체로 즉흥적인 설교를 하였습니다.

 

즉 우선 제자들을 시켜 어느 날 아무 데 사람들을 모이게 하라고 지시하고는, 이들 중에 어부가 많으면 고기 잡는 비유를 들어 말씀을 하고, 농부가 많으면 씨 뿌리는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좀 더 영의 세계를 알기 쉽게 풀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집회에 모여든 청중은 설교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보다 오히려 병을 고치러 온 환자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절름발이, 중풍 환자 등으로 붐비는 청중들 앞에서 주님은 돌 몇 개를 괴어 연단으로 삼고, 육성으로 고래고래 외쳐야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설교 중에서 비교적 짜임새가 있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5:3)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입니다. 흔히 이 산상수훈을 매우 중요한 주님의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초기의 설교로, 따지고 보면 세상적인 교훈에 기울어져 그다지 깊은 영적인 말씀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마치 주님의 가르침이 요약되어 있기나 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모럴이나 교훈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성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럴 이상의 종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경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내용이 기독교의 초보 단계에 해당된다는 것을 지적해 둘 뿐입니다.

 

주께서 영적인 말씀을 처음으로 발설하신 것은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고위 관리와 나눈, 이른 바 중생에 대한 이야기에서입니다. 그는 위신상 낮에는 창피하여 시골 목수였던 주님을 떳떳이 찾아가지 못하고, 밤에 남의 눈을 피해 조용히 주님을 찾아가서 구원의 도리를 물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어, “그렇다면 나더러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란 말입니까?” 하고 반문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날이 갈수록 점점 그 단계가 높아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날자가 촉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몇 달 앞두고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라.”느니, “내가 죽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느니, 본격적인 이야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설교 내용이 영적으로 깊어갈수록 듣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따라서 재미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간 이유의 하나입니다.(6:66)

 

따라서 주님의 가르침도 이러한 상황 변동에 따라 자연히 내용이 달라졌으며, 때로는 반대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주께서 한창 인기가 상승하여 지방에 12사도를 전도사로 파견했다가 성과가 좋으므로 다시 70문도를 방방곡곡에 파송할 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갖지 말라.”(10:4)고 일렀으나,

 

주님이 궁지에 몰려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제자들에게도 그 여파가 닥칠 터이므로, “전대 있는 자는 전대를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22:36)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귀가 무슨 탈을 쓰고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가르침은 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유연성을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임기응변하여 지혜롭게 대처해 나갔던 것입니다.

 

주께서 70문도를 전도에 파송했을 때,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졌습니다.(10:18) 그러니까 공중 권세를 잡고 있던 마귀는 주님이 사도를 지방에 보낼 때까지만 해도 크게 훼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대를 들고 가지 않아도 환영을 받아 주식에 불편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주님에게 우리가 귀신을 내쫓고 전도했더니 매우 좋아합디다.” 하고 의기양양하게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0:20) 여기서 우리는 주님과 제자들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님은 그 나라에 관심이 많고, 제자들은 이 나라에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