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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2.14본문
Part 02. 십자가는 살아 있다
Chapter 04. 성령은 이렇게 역사한다 (3)
5) 성령의 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는 있지만, 실은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느냐 하는 것부터 의심할 정도로 한심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긴 우리가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끝내 당신 자신을 우리 앞에 나타내지 않고, 다만 성령으로 당신의 살아 계심을 입증해 주십니다. 이것은 신, 구약시대를 통틀어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인간 앞에 드러내지 않으실까요? 드러내야 하나님은 영체이므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며, 혹시 영안이 띄어 그 모습의 일부를 보더라도 눈이 부셔서 그 정체를 알 수 없습니다.(출19:18, 행9:8)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즉 성령의 은사를 전혀 받지 못했거나, 받아도 쥐꼬리 만큼밖에 받지 못한 사람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가 의심스럽게 생각된다는 것 자체가 성령을 받지 못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일찍이 초대교회 때 사도들에 의해 막을 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그 후 세계 방방곡곡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에 와서는 저 아프리카의 산간벽지에도 교회가 세워지고, 흑인들의 두툼한 입술에서도 찬송가 소리가 흘러나오는 형편입니다.
이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좋아만 할 수 없는 것이, 그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에게 과연 얼마나 영광을 돌리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드느냐 하는 것보다도, 얼마나 진심으로 당신을 공경하고 덕스럽게 사느냐 하는 데 관심이 있으십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온 지도 어느덧 2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나, 급속도로 부흥된 것은 6.25동란 이후의 일입니다. 그 당시에 전란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외국의 원조까지 곁들여, 교회는 우선 구호기관으로서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른바, ‘섰다 하면 교회’라고 할 정도로 곳곳에 교회가 들어서고, 수많은 사람들은 구호물자라도 타는 맛으로 교회에 몰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개중에는 빈약한 성령 체험만으로도 죽음을 맞아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숨져간 신도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2십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양적으로는 그처럼 교회가 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데도 불구하고, 처음에 일어난 신앙 붐에 비하면 영적으로는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그만큼 믿음이 식은 셈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독교의 신앙이 여느 종교처럼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이런 폐단이 없었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언약한 대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그처럼 돌아가시게 되자 실망한 제자와 문도들에게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40일 동안이나 이모저모로 보여주셨습니다.
즉 저들로 하여금 영안을 뜨게 하여, 때로는 산지기로, 때로는 길손으로 나타나 보여주셨기 때문에 잃었던 소망을 되찾은 무리가 약 500명쯤 되었습니다.(고전15:6) 그러나 이들 중에 오순절이 되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수는 120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다락방치고는 상당히 넓은 편으로, 마가는 꽤 부자였던 모양입니다.
이 다락방에서 비로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향연이 베풀어졌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몸이 화끈거리면서 술에 취한 사람같이 되고, 방언을 받아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아무튼 저들은 이 불과 같은 성령을 받은 후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불의 성령은 기독교를 널리 세상에 전파하는 터전을 다진 봉화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제까지만 해도 몰래 숨어서 주님을 증거하던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대담하게 주님이 누구라는 것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에 불과 같은 성령은 인간의 혼을 새롭게 하는 동시에 육체에도 큰 자극을 줍니다.
즉 그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감각적으로도 강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하늘의 것이 와서 닿았다는 자의식을 분명히 갖게 됩니다. 이들이 성령을 받아 얼굴이 술 취한 사람처럼 벌겋게 상기되었다는 것으로도 당시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행2:13)
초대교회 당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우선 육신에 열기로 큰 자극을 주지 않으면 목숨을 내걸고 주님을 증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때의 사회 여건과 인간의 지능에 알맞게 움직이십니다.
오늘에 와서도 불과 같은 성령이 내리기는 하지만, 하늘에서는 생수의 권능에 더욱 치중하고 계십니다. 이미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목숨을 내걸고 예수를 증거할 필요성보다도 죄에서 깨끗이 씻음을 받아 주 앞에 서는 것이 소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실까요? 당신의 일(경륜)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시대에도 물론 성령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여호수아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 마귀도 물론 가만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힘껏 도전하게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마귀의 도전을 성경에서 많이 보아 왔으며, 또 실제로 여러 차례 체험했을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눅16:16) 따라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으로 선지자를 내세워 직접 역사하시던 시대는 신약시대에 와서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2천 년간 주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역사하시다가, 앞으로 천 년이 지나 마귀가 멸망되고 하늘나라가 임하면 그 권세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고전15:25)
세례 요한을 길잡이로 하여 주께서 오신 후로는 영을 살리는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모세의 율법과는 정반대되는 설교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마10:39)
즉 주를 위해 육이 죽으면 영이 살고, 육이 살고자 하면 영이 죽는다는 뜻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주님은 이와 같이 영과 육을 명백히 구분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21:24) 하나님의 백성은 남에게 이마를 얻어맞으면 뒤통수라도 때려야 하는 것입니다. 마귀와 육적으로 싸우는 시대의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육이 죽는 한이 있어도 영은 살려야 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성령이 충만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 하고 여유를 보인 것도 그 한 실례입니다.
6) 이긴자의 소명
그런데 불과 같은 성령이 초대교회 때 강하게 역사하여 곳곳에 교회가 섬으로 기독교의 기반이 잡히기는 하였으나, 해를 거듭하여 10년, 20년 지나는 동안에 어느새 그 열기가 차츰 식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계2:4)고 책망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당시의 여러 교회 가운데서 이긴자가 나타나기를 원하시고, 만일 이긴자가 나타나면 불과 같은 성령이 아니라 ‘생명나무 과일을 먹게’ 하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등, 도합 일곱 가지 특권을 주어 역사하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께서 성령의 역사가 시들어가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새 것을 원했습니다. 따라서 이때의 성령의 역사는 이전과 강도가 달라야 합니다. 이긴자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는 이런 강한 성령의 역사를 내리시겠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긴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따라서 마귀는 땅에서 이긴자가 나타나기를 한사코 훼방합니다. 하늘에서 원하여도 땅에서 호응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됩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이긴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비로소 오늘에 와서야 이 땅에서 이긴자 감람나무가 나타나 전무후무한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으며, 지금까지 진행 중인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각자 받은 바 은총으로 산 증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맙고도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서는 이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손가락질을 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리하여 마가의 다락방에서 내린 불과 같은 성령을 또 내려 주십사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의문을 갖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매스컴(통신)이 발달된 시대에 그런 큰 역사가 일어났다면 국내는 물론, 온 세계에 삽시간에 알려져서 만백성이 다 호응할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영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치가 않습니다. 가로막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렇게 큰 권능을 행하였는데도, 딴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제자들까지 주를 반신반의했다는 사실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경륜을 이루실 때에는 반드시 두 종을 택해 세웠던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는 종과 일을 마무리 짓는 종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역사에 부름을 받은 후로, 많은 신앙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이긴자가 소명을 받아 하는 역사는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귀한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사람은 여기 모인 여러분 이외에는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주께서 같이하면 알고, 같이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게 안타까워할 것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고, 올 만한 사람은 다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많은 숫자가 모여서 형식적으로 북적거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듬어 세우는 때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새로워져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