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Part 01 - Chapter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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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4.06
[2권] Part 01 - Chapter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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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1. 생명으로 이르는 길 

Chapter 6. 생명줄을 잡으라


 기독교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사랑의 종교입니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 사랑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이웃에 좋은 옷감을 싸게 파는 상점을 알려 주거나, 돈을 빌려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또 이웃에 굶는 사람이 있을 때 쌀을 갖다 주고, 이웃에 병든 사람이 생겼을 때 문병을 가는 것, 물론 이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이웃의 굶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거나 또는 병든 사람에게 유능한 의사를 데려가 그 병을 고칠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것은 더욱 큰 사랑을 베풀어 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사람에게 덕을 세우고 본을 보여 선한 마음씨를 갖게 해준다면 그것은 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랑에는 작은 사랑에서 큰 사랑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요컨대 상대방이 아쉬워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제일 아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죽지 않고 사는 것, 즉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상대방을 생명길로 인도하여 구원의 문에 들어서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우리가 전도에 힘쓰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거나, 교회 문을 드나들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줄 아는 이웃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에게 돈보다도 직장보다도 그 밖에 어떤 선심보다도 더 큰 혜택을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을 생명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주위에서 죽어가는 생명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격이 됩니다. 그런데도, 아무개가 굶을 때 내가 쌀 한 되 줬지 하는 식으로 자위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습니까? 전도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며 또한 복 받는 비결의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고약한 자가 더 많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긴 예수를 믿는다고 대뜸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죄를 안 짓는 것보다 지은 죄를 씻는 데 더 치중하는 종교입니다.

 

 즉 주의 권세로 어둠의 세력을 제거하여 죄를 씻고 구원을 얻자는 것이 기독교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선량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그는 무엇보다도 사탄의 그늘에서 하나님을 외면한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어린애의 경우도 주의 피로 씻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린애에게 무슨 책임을 물어서가 아니라, 그 아이에게 전해진 원죄, 유전죄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린애를 안찰했을 때 그 애가 몹시 아파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갓난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처럼 아파서 보채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이것을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증인이 되어 입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전도는 성도로서의 가장 큰 의무인 동시에 영광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집에서 성경이나 보고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고 예배에나 빠짐없이 참석하면 할 일을 다 한 줄 아는데, 이것은 오산입니다.

 

 기도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상달이 될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가 상달이 되어 응답을 받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성을 다해 간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정신이 산만하여 마음이 하나로 집중되지 않으면, 일단 마음의 준비부터 하고 나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약 10분쯤 기도하고 나서 혹시 잡념이 들어오면 기도를 중단해야 합니다.

 

 기도드릴 때에는 십자가를 먼저 마음에 그려보고, 주의 피를 받아 마시는 심정으로 안타까이 매달리며 한두 주일 기도를 해 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임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불이나 향취나 이슬이 여러분에게 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물리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신비스럽게만 생각할 성질의 것도 못 됩니다. 영이 육에 그런 느낌을 줄 수 있기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내 말대로 했는데도 감감 소식이라면 그건 내가 거짓 목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단에서 내려서야겠지요.

 

 믿음이 하늘의 선물이라고 하더라도,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11:12)는 말씀 그대로, 신앙생활에서 우리의 노력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기도생활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가로막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한걸음 한 걸음 주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마음이 냉랭하면 정신을 가다듬어 주께 호소하십시오. 자기를 온전히 주께 내맡기고 은혜를 간구하십시오. 이런 생활을 거듭하면 자연히 심령이 다듬어지고 세상과 싸워 이기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저분한 욕심을 품지 않게 되고, 시기, 질투, 걱정이 사라지면서 감사의 눈물이 솟구치고, 언제나 주와 동행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반드시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아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엌에서 일을 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고, 길을 가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란, 요컨대, 주님을 사모하고 마음을 십자가에 집중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서나 주와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에 응답을 받는 비결의 하나가 바로 전도입니다.(15:16)

 

 신앙이란 약자를 위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갖는 데 강자와 약자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 앞에서 누가 강자며, 누가 약자겠습니까? 다 똑같이 어리석고 미련한 죄인입니다. 강자니 약자니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평가이며, 이것은 하늘나라에까지 통용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가장 요긴한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여건이 유리한 처지에 있으면 자연히 주님과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불우한 처지에 있는 것이 좋기도 합니다.

 

 이것은 물론 믿음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환경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우리는 이를 시정, 또는 조절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처한 모든 여건을 기도생활을 하는데 유리하도록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을 가장 뜨겁게 사모한 사람은 영의 세계에 제일 깊이 들어간 다윗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러니까 권세, 명성 할 것 없이 이른바 모든 면에서 최대의 강자이면서도 하나님을 눈물 뿌려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 중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가령, 주님보다 자식이나 남편 혹은 아내를 더 사랑한다면 일종의 우상 숭배가 됩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10:37) 그래서 예수를 믿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주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진심으로 뜨겁게 사모하고,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심정이 우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여도 마음이 냉랭하다면 평소에 세상에 지나치게 매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의 각오를 할 때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나는 대체로 혼자 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주와 교류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리하여 길을 가면서도 주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통입니다. 바울이 단조롭고 고달픈 생활을 하면서 주의 도를 전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환경이 편안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데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됩니다. “희락을 애통으로 바꾸라.”는 성경 말씀은 이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안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를 씻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죄를 씻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회개나 전도나 기도가 그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쉬운 방법은 주의 종을 통하여 성령을 받고 죄를 소멸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성과를 올리지 못하지만, 주의 종을 통하면 손쉽게 해결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어보고, 손으로 안수해 준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19:6) 그런데 문제는 오늘에 있습니다. 바울이 2천 년 전에 성령을 부어 준 것은 그때 일이요,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오늘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날 성령을 받아 죄가 얼마나 소멸되어 주의 아내 될 자격을 얻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천사가 생명책에 기록하고, 여러분을 지켜 주게 되어 있습니다.(3:5)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의 이런 움직임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