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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5.11본문
Part 01. 생명으로 이르는 길
Chapter 9. 주님의 행적(行蹟) -2
2) 말씀대로 움직인 주님
주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무척 고독하였습니다. 나이 열두 살에 이미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하늘의 도를 논할 정도로 머리가 뛰어난 주님은 자기 또래의 친구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아 어울리지 않았고,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지긋한 사람들은 너무 어리다고 상종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며 주님을 증거할 때 주님은 군중들 틈에 끼어 모든 동태를 유심히 살폈습니다.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외칠 때 요한도 메시아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으며, 그를 따르는 군중들은 말라기 선지 이후 430년이라는 긴 암흑기를 지나 비로소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되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습니다.
그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의 인도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공경하기는 했지만 냉랭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선지자를 보내어 지상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이 세례를 받는 군중들 틈에 끼어 자기 앞에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제야 자기가 증거할 메시아가 바로 자기와 한 집안 사람인 나사렛의 목수임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 집안이라고는 하지만 위세가 당당한 제사장 집에 태어난 세례 요한과는 너무나 처지가 달라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예수가 구세주라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메시아는 어느 모로 보나 그 길 예비자인 자기보다 월등 뛰어날 줄 알았던 것입니다.
선지자 엘리야의 분신으로 온 요한이 이렇게 생각할진대, 다른 사람들의 실망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을 따르던 권력층이나 지식층은 다 떨어져 나가고, 뱃사공인 베드로가 수제자로 뽑힐 정도로 주님의 측근에는 세상에서 내노라고 하는 사람은 모여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주께서 비유를 많이 든 것도 시편 78편에 “비유로 옛 비밀을 발표한다.”(시78:2)는 말씀에 따른 것이며, 그가 많은 병자를 고치신 것도 “유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사53:4)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간통한 여자를 정죄하지 않은 것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다.”(사42:3)는 말씀 그대로 하신 일이며, 병을 고치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도(마12:16)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사42:2)는 말씀대로 움직이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도 못한데 소문만 크게 나면 바리새인들이 그를 해치려고 할 것이며, 이리하여 바리새 교도들에게 맞아 죽기라도 한다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게 하려는 여호와의 계획은 낭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한 후에는 수도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당당히 입성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스가랴서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준행한 것입니다.(슥9:9) 만일 이때 주를 향해 호산나를 외치며 옷을 벗어 길에 까는 많은 지지자들이 없이 혼자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면서 ‘내가 메시아’라고 외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미친 사람으로 몰아버리고 상종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귀를 타도 때가 따로 있는 법입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41:9-10) 이것은 다윗이 주님의 측근자인 유다가 배반할 것을 예언한 것으로, 이 역시 그대로 적중되었습니다. 또한 성경에는 주님이 은 30냥에 팔려 간다는 것까지 미리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雇價)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30을 팔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30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11:12-13)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 예언도 고스란히 이루어졌습니다.
스가랴서에 기록된 이 말씀의 앞뒤를 보면 전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 속에 이 예언의 말씀을 살짝 삽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행적에 관한 모든 예언은 성경 여기저기에 토막 글로 삽입해 놓았으므로, 주님은 그것이 당신에 대한 말씀인 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전체의 내막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은 여호와께서 마귀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짐짓 숨겨 놓은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선지자에게 주께서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움직이다가 어떻게 죽는다는 이야기를 죽 들려줘 한 눈으로 누구나 환히 알아보게 했다면 마귀가 미리 다 알아차리고 훼방을 할 것은 빤한 노릇입니다.
주께서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실 계획이 이와 같이 미리 꽉 짜여 있었으므로, 그대로 움직여야할 성서적인 인물이라 그 예언들을 순서에 따라 착착 이루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가지 예언을 이루면 또 다음의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고, 이 예언을 이루면 또 다음 예언이 기다리고 있어서 예정된 계획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요19:30)
성경에는 주께서 어떻게 당하리라는 것도 일일이 세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빌라도와 대제사장의 심문에 아무 대꾸도 하시지 않는 것도(마26:63, 27:13) 입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사53:7)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당신에 대한 모든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기 위해 참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食物)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시69:21) 이 다윗의 예언도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요19:29)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매달려 두 발과 두 손에 쇠못이 박힐 것은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시22:16)라는 말씀 그대로이며, 심지어 주님의 겉옷을 나눠 갖고 속옷을 제비뽑아 가진다는 것도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시22:18)
또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십자가상의 마지막 말씀도, 시편(22:1)에 당신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을 읊조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애원이 아니며 불평은 더구나 아닙니다.
이리하여 주께서 미리 짜인 계획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운명하자 마귀는 자기가 승리한 줄 알고 기뻐 날뛰었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요, 그 주님의 피로 죄인을 다시 살리는 여호와의 거룩한 경륜을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여호와께서 수많은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단편적으로 예언하도록 한 말씀들은 오직 주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는 이 순간을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에서는 천군 천사가 승리의 나팔을 우렁차게 불었습니다. 그 보혈은 2천 년이 지나 오늘날 이 단상을 통하여 여러분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가는 심부름꾼으로, 주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바를 전할뿐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한다.”(고전9:16)는 바울의 말처럼, 나도 마찬가지 의무감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 손길을 통하여 죄가 무너져 나가는 것을 분명히 목격하였을 것이며, 내가 입김을 불어넣은 생수로 굳어 버린 시체가 부드럽게 피어나는 것도 눈으로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주께서 그와 같이 아프고 쓰린 고초를 당하시고 피를 흘려주신 덕택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