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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5.25본문
Part 01. 생명으로 이르는 길
Chapter 10. 에덴성회는 한 교파(敎派)가 아니다
오늘 주님의 뜻과 은총 가운데 이와 같이 하나의 제단을 마련하게 된 것을 주님에게 감사하는 동시에, 여러분께서 물심양면으로 정성어린 협조를 해 주신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치하하는 바입니다.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이웃에 그 큰 교회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따로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기독교에는 교파가 많습니다. 같은 하나님과 주님을 섬기면서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또 무슨 교다 해서 시비가 많고 상당히 복잡합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래야 하는가? 이것은 좋게 해석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성경을 깊이 캐고 따지다 보니 견해의 차이가 생겨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 선의(善意)의 경쟁을 하면서 믿음을 키워 나가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여러 갈래로 쪼개질 리가 만무합니다. 더구나 각 교파끼리 질시와 반목을 일삼고, 나아가서는 분쟁까지도 일으키는 폐단이 있다면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파들은 서로 공동 분모(分母)를 찾아내어 차츰 뭉쳐 나가기는커녕, 점점 더 갈라지는 추세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흥 교회가 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안에 신흥 교파만 해도 무려 50여 개가 됩니다. 이는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교파가 자꾸 갈리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며, 또 그들 나름의 명분 같은 것도 있기는 하겠지만, 요컨대 성경에서 말하는, 당을 짓는 무리의 소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은 흔히 아무개가 좀 신령하다 해서 갈라지고, 누가 무엇을 연구했다 해서 따로 나가고, 목사파와 장로파가 서로 싸우다가 헤어지고―이렇게 해서 느는 것이 교파요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에덴성회도 도매금으로 넘어가, 또 딴 교파가 하나 더 생겼구나 하고 비웃음을 사게 되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이건 무리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 에덴성회는 새로 발족된 기독교의 한 교파요, 이영수가 교주이고 여러분은 그 양떼입니까? 그렇다면 당장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자질과 여건이 갖춰져 있습니다. 젊은 놈이 뭐가 답답해서 욕까지 먹어가며 청춘을 바쳐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희미하거나 알쏭달쏭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슨 역사라는 것은 지금쯤 여러분 자신이 주께서 제시해 준 산 증거를 보고, 듣고, 직접 체험을 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오늘 아침 집에서 노트를 뒤져보니, 주께서 제단을 또 하나 마련하라고 지시하신 것은 바로 작년 11월 29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크기도 꼭 그만한 제단을 이곳에 새로 세우고 오늘 처음으로 예배를 올리게 된 것입니다. 없는 가운데 일을 해 나가자니 애로도 적지 않았으나, 어쨌든 우리가 땅에서 힘을 합쳐 하늘의 지시를 그대로 준행하였으니 무척 흐뭇합니다.
우리 에덴성회는 이와 같이 일일이 주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여느 교회와 다릅니다. 이 단상을 통하여 터져 나가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여느 교회들처럼 신학 서적을 펴놓고 설교 준비를 하여 철학, 문학까지 섞어서 구수하게 이야기하는 데가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할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설교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또 그럴 시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그런 꼼꼼한 성격도 못됩니다. 그저 성경 한두 줄 읽어보는 것이 고작이고, 그나마 생략해 버리고 단에 서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니까, “내 입술을 당신의 마이크로 써 주십시오.” 하는 기도 한 마디로 설교 준비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경을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어제의 해석보다는 내일의 전망에 대하여 주께서 보여주신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재주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하늘에서 이 세대에 필요한 새로운 섭리를 베풀고 계시는 것입니다.
열여섯 살에 하나님을 알게 된 나는 석 달이 지나 성령의 불을 받고, 영광 중에 주님이 강림하신 광경을 본 후로, 영육 간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오다가, 21세 때부터 주와 항시 교류하는 가운데 내가 할 사명이 무엇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나를 거센 비바람과 진창 속에 던져 연단하실 때 나는 눈물 뿌려 주께 간구하면서 가시밭길을 헤쳐 왔습니다. 시일이 지나갈수록 주의 섭리는 크게 나타났으나, 나는 혹시 마귀가 틈탈까봐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고 혼자 간수해 오다가, 막상 73년에 정식으로 나가 외치라는 주의 지시를 받고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모아 시작하였습니다.
이 역사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오늘날 이만큼이라도 자란 것은 오직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늘에서 내리는 지시를 땅에서 그대로 준행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의 움직임이 합당치 못해 주의 눈 밖에 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움직이는 양떼들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세를 따르던 이스라엘 백성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바울을 괴롭힌 자들의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회개하라고 외칠 때 제사장을 비롯하여 당대에 내로라하는 자들은 다 손가락질을 하고 돌아섰던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도 한갓 무지한 뱃사공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으면 그 깊은 내막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고전2:10) 또 주의 일도 그렇습니다. 알고 깨닫고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수제자(首弟子)로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임을 알고도 남았으나, 위급해지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잡아뗐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에는 목숨을 내걸고 주님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남들에게 부어준 베드로의 손길이 소중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성령을 받으려고 혼자 아무리 몸부림치며 애써도 좀처럼 되지 않던 사람의 몸에 그의 손길이 한번 닿기만 하면 즉시 성령을 받게 마련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것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강한 성령은 주께서 당신의 종을 통해 부어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넬료는 하나님을 몹시 공경하는 사람이지만 베드로를 통해서 성령을 받았던 것입니다.(행8:17)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행19:6)
오늘날 이 사람을 통해 놀라운 성령의 은총이 여러 모로 베풀어지는 것은 여러분이 다 잘 아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썩은 시체를 놓고 한국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모여 철야기도를 해보십시오. 그 시체가 변하나. 이것은 사도시대 이후 근 2,000년이 지나 비로소 베풀어지는 성령의 역사이며, 그 위력에 있어서 당시보다 몇 갑절 더 강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오늘날 이 땅에서 이런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주님께서 살아 움직이시는 증거를 보여 기독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은총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을 신령한 말씀으로 다듬어 세우고 성령으로 씻어 하늘의 군대로 삼기 위해서입니다.(계19:14) 다시 말하면, 여러분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하여 멜기세덱의 반열에 세우려는 주의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계19:8, 20:4)
에덴성회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총이 깃든 곳이요, 우리가 따로 제단을 마련하여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여느 교회보다 좀 은혜롭다거나, 성경을 잘 소개하는 정도에 그친다면 에덴성회도 하나의 교파를 형성한 신흥 종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우리가 호주머니를 털어 남의 손가락질까지 받아가면서 따로 교회를 세울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당을 짓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역사는 지금 초창기라 이렇게 조촐한 가운데 조용히 주의 일을 해 나가고 있지만, 조금만 시일이 흐르면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새벽 제단도 쌓지 못하고 겨우 한 주일에 한 번 한데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므로 조용할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땅에서 움직이는 데 따라 하늘에서 주시는 것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먼저 이 은총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의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책임이란, 다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잘 받들어 이 귀한 하늘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건지려는 심정으로 전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이는 숫자만 늘여서 흥청거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양(量)보다도 질(質)을 보십니다. 요컨대 땅에서 의로운 수가 얼마나 이루어지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빼앗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동대문 에덴성회 개회식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