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Part 02 - Chapter 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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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7.19
[2권] Part 02 - Chapter 1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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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여호와의 비밀을 깨칠 때     

Chapter 14. 바울과 비밀 (3)



3) 바울과 계시

 바울은 유식한 학자로서 아는 것이 많았으나, 하나님의 비밀을 증거할 때 자기의 지혜로 생각해낸 입에 발린 말은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 이외에는 숫제 아무것도 모르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고전2:1-2)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하늘의 감춰진 도를 전할 때, 처음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와 그 밖의 듣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왔기에, 바울은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던 것입니다.(고전2:3)


 성경에는 언뜻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말 같지만, 줄줄이 여호와의 깊은 뜻이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누구나다 환히 알도록 쓰게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성경 기자로 하여금 이렇게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한 방법으로 기록하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전술상 지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종의 기밀문서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2:10)는 바울의 말대로, 이런 감춰진 말씀은 여호와께서 그때그때 성령을 충만히 받은 당신의 종을 통하여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이 감춰진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해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고전2:7)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만세 전에 정하였다."는 말은 '우리의 영광'을 예정한 것이지, 박 아무개, 김 아무개하고 특정인을 예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흙으로 빚어 여호와의 생기를 부어 만든 피조물이며, 결코 창조주인 여호와나 주님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창2:7)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생명과일을 먹지 않으면 영생할 수 없으며,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의 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생의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 도리를 모르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구원을 얻으려니 하고 막연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믿음은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요14:11) 경지를 가르키는 것으로, 주의 피와 살을 마시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요6:53) 이와 같은 영생의 원리를 모르면, 마치 부산행 기차표를 사들고 서울행 기차를 기다리는 격이 됩니다.


 생명과일과 대조적인 것이 선악과이며, 여기에는 마귀의 독소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은 선악과 속에 들어 있는 독소 때문이지,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의 탓이 아닙니다.


 곰팡이가 난 과자를 아들에게 먹지 말라고 일렀는데, 그것을 어기고 먹었다고 해서 아들을 죽여 버리는 아버지는 없을 것입니다. 아들이 죽은 것은 곰팡이로 인해 심한 배탈이 났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도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보혈, 곧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아담과 하와의 몸에 침투한 선악과의 독소가 우리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져 왔으나, 그 해독제가 되는 것이 다름 아닌 주의 보혈입니다.


 여호와의 깊은 섭리는 매우 오묘하며 인간의 머리로는 감히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비밀에 붙인 지혜는 마귀가 알지 못했으며, 만일 알았던들 영광의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고전2:8)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주께서 피를 흘리셔야만 했습니다. 이것 자체가 여호와의 크신 경륜을 이루시는 데 요긴한 비밀이며, 따라서 누구나 읽어서 알 수 있도록 이를 분명히 성경에 기록해 놓으면 여호와께서 뜻을 이루시는 데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감춰진 지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이며,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는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고전2:9)으로, 이것은 성령으로 헤아리게 되어 있으며, 성령이 충만한 바울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여 준 하늘의 새 법도를 가리켜, "천사도 이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면치 못한다."(갈1:8)고 경고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주의 종은 일반 신도가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전2:15)는 것입니다. 그는 주의 특별한 부름을 받은 후로 주께서 항상 같이하시면서 지켜 주었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이 만만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종이 판단합니다. 사울의 잘못을 사무엘이 지적하고, 다윗의 잘못은 나단이 지적하였습니다.(삼상15:19, 삼하12:9)


 모세는 자기의 후계자로 여호와께서 진작 여호수아를 점찍어 놓은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나안땅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자, 그러면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이 백성들을 그리로 인도할 사람을 세워야 하지 않느냐고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은 이미 여호수아를 내정했다고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여호와께서 일단 기름을 부어 내세운 당신의 종을 마구 갈아치우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모세가 완전히 가나안땅에 들어갈 것을 단념했을 때 처음으로 후계자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민27:17-20) 바울이 "나를 판단하는 이는 주시니라."(고전4:4)고 한 말도 주의 종의 위치를 단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도리를 분명히 알고, '내가 이렇게 믿으니 되겠지.'하고 막연히 기대할 것이 아니라,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하는 찬송가 그대로, 확고한 증거를 토대로 하여, 그 위에 명확한 주관을 갖고 자기의 신앙을 다져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나날이 자라는 가운데 주를 의지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변치 말아야 하며, 끝까지 참고 견디며 이겨 나가야 합니다. 


 바울이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데 앞장선 것은 자기 딴에는 여호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바울은 주님의 행적을 보도 듣도 못하고 다만 남들이 전하는 나쁜 소문에 따라 주님을 이단의 괴수라고 믿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모조리 없애 버려야 여호와께서 기뻐하실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대낮에 실제로 주님을 만나 뵙고 그 영음을 몸소 들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 소행이 여호와를 기쁘게 해 드리기는커녕, 여호와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임을 깊이 깨닫고 크게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빛이 바울을 에워싸고 환히 비치므로 바울은 감히 주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만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하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진작 바울을 점찍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자기를 가리켜 "내가 모태에서부터 택함을 받았노라."(갈1:15)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영음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그치면, 이것은 바울이 주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 아무 관계도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반역자인 바울을 한 신도로 만들어 준 동기가 된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난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바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며, 이 사실을 남에게 알려 줘도 그것은 하나의 간증담에 그치며, 듣는 사람에게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참고 자료를 제공해 줄 따름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바울을 불러 세운 것은 바울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을 당신의 종으로 삼고 그를 통하여 하늘의 새로운 법도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관심사는 바울 개인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뭇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경륜을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한 것"(엡3:3)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에게는 여호와의 특별한 지시(계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을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는 바울이 예뻐서가 아니라 바울을 따르는 성도들을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의 움직임 여하에 따라 하늘의 지시가 다르게 마련입니다.


 여호와께서 바울의 손에 성령을 부어 줄 권능을 맡기고, 병 고치는 신유의 은사를 주신 것도 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울을 따른 무수한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이와 같은 특별한 은총을 바울에게 주고 계시를 내려 뭇 심령들에게 이러저러하게 전하라고 했는데도 바울이 어떤 핑계를 앞세워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바울은 즉시 불순종의 죄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리고 바울이 지시대로 움직였는데도 다음의 지시가 내리지 않으면, 그것은 바울의 사명이 끝났거나 아니면 바울을 따르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외면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들의 움직임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합당치 않으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한 공인으로서, 자기를 따르는 양떼들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게끔 인도하는 것이 유일한 사명이자 본분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양떼들을 위해 당신의 종을 필요로 하며, 이 양떼들을 중심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덴성회는 여러분 각자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느냐 섭섭하게 해 드리느냐, 또 그 정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흥하고 쇠하는 분수령이 갈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잘 깨달아 끝까지 주님에게 충성하시기 바라며, 아울러 우리 성회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너희는 나를 위해 기도하라."(앱6:19)고 당부하였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늘 유의해 지켜보므로, 그 기도에 호소력이 그만큼 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