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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7.19본문
Part 02. 여호와의 비밀을 깨칠 때
Chapter 14. 믿음의 비밀 (4)
4) 믿음의 비밀
바울이 '비밀' 운운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만 당대의 긴요한 하늘의 도를 가르쳐 주시고 뭇 백성들에게 이를 전하게 하였으므로, 자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여호와의 새로운 경륜을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여호와를 기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에 하나님의 백성임을 표시하는 피의 언약인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려는 여호와의 뜻은 바울 이외에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바울의 입을 거쳐서 비로소 이 새로운 여호와의 법도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여호와께서 당대에 가서 터뜨릴 필요가 있는 감춰진 비밀이었지만, 바울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당시의 많은 교역자들과 소위 믿노라하는 사람들은 바울 안에서 약동하는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하여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비단 바울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고로 하나님의 사람 치고 세상에서 고분고분 받아준 예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세상은 마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집사로 임명할 수 있는 사람이 갖춰야 할 자격의 하나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딜3:9) 이 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믿음의 비밀'은 물론 바울이 전한 여호와의 감추었던 경륜입니다. 당대에 요긴한 여호와의 경륜을 모르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직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이른바 비밀은 여호와로부터 그것을 터뜨리도록 지시를 받은 하나님의 종에 따라 그 내용이 다릅니다. 예컨대 세례요한은 주님의 길 예비자로서, 베드로는 천국열쇠를 받은 종으로서, 각각 여호와의 지시, 즉 비밀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초대 기독교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이며, 오늘날 마지막 때에 와서는 이 세대에 필요한 하나님의 비밀이 당신의 종의 입을 통하여 터져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의 특별한 은사를 받고 당대에 주님이 오실 것을 담대히 증거했으며, 바울과 같은 다른 종이 나타나 하늘의 새로운 도를 증거할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기를 마지막 종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신앙 체계를 온전케 하기 위해 바울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성령을 부어 주는 동시에 말씀으로 다듬어 믿음을 굳건히 다져 나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기에게서 하늘의 새로운 법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말씀으로 서지 못하는 자에게는 집사의 직분을 주지않기로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설사 직분을 주어도,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를 기쁘게 하는 일인지 알 수 없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 튼튼히 다져 나가려면 우선 오늘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종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만 해도 자칭 재림주라는 적그리스도가 있는가 하면, 여호와의 특별한 부름을 받은 종으로 자처하는 거짓 선지자도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양떼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적어도 하나님의 참 종이라면 말로만 무엇을 받았다, 무엇을 보았다 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양떼들에게 신령한 영의 양식을 먹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권능에 의해 뭇 심령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고, 물을 피되게 하는 등, 행동으로 자기의 위치를 입증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말로만 그럴듯하게 떠들어봐야, 그것은 몰지각한 자들을 미혹하는 감언이설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육적인 것을 앞세우면 될 것도 되지 않습니다. 돈으로 으리으리한 교회를 짓고 모든 시설을 잘 갖춰 놓았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찢어지게 가난해야만 한다면 이것도 모순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는 나와 주가 얼마나 밀착되어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물질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와 상관이 없을 때 반가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영육을 아울러 주 안에서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