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Part 04 - Chapter 2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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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2.20
[2권] Part 04 - Chapter 2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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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4. 어둠을 헤치고      

Chapter 28. 방언(方言)에 대하여 (2)


3) 방언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총 가운데 부름을 받고 주의 일을 하기 위해 땅에서 움직일 때 언제나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주님을 앞세우고 주님 본위로 해 나가야 한다는 거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인간의 힘이나 지혜로 주의 일을 처리하면, 겉으로 아무리 잘하는 듯이 보여도, 주님이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에게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 반면에, 주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걷힌 후에 사람들이 중지(衆智)를 모아 하늘 높이 성과 대를 쌓아 올리고 스스로 높아지려고 했을 때 하나님이 못마땅하게 여겨,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시킨'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창11:1-9 참조) 노아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권능에 도전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자기 치하(治下)에 있는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하여 자기 힘으로 백성을 잘 다스려 보려고 한 것이 그만 여호와의 책벌을 면치 못하게 된 소치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께서 만인의 구주로 이 땅에 오셨을 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갖은 수모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심지어 신병으로 몹시 시달리는 사람을 약 한 첩 쓰지 않고 당신의 권능으로 낫게 해 주었을 때에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러니까 마귀의 능력으로 그런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믿노라 하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주님의 적대자들의 언동이었지만, 한편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류층에 속했던 제자들을 위시한 측근자들과 이른바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가난하고 미천한 사람들이 곧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때와 장소와 상대방의 처지에 따라서 하시는 말씀도 자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오묘한 진리를 말씀하셨지만, 당신을 마리아의 아들인 목수로만 알고 대적하는 무리들에게는 하늘의 도를 전하는 대신 그때그때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적절히 입을 막아 버렸던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진리를 말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잘 헤아려 보면 이 두가지 형태로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나사렛 동네의 목수로만 알고 사사건건 책잡으려고 하는 무리들은 제외하더라도, 소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자들, 심지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주님은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하시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들도 주님을 아직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땅에 계실 때, 당신이 죽은 후 3일 만에 부활하여 갈릴리로 갈 터이니 거기서 만나자고 제자와 측근들에게 당부했는데, 한 사람도 갈릴리로 가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마26:32) 그러니 주님은 얼마나 고독하고 또 답답했겠습니까?


 심지어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밤에 몰래 주님을 만나는 정도였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 당시에 유대의 공회원으로 있는 이른바 저명인사로서, 위신상 낮에는 남의 눈이 두려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같기는 하지만 떳떳이 만날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지만, 역대 하나님의 사람이 가는 길도 이와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또 오늘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이 땅에 영체로 계실 때, 당신을 믿는 사람은 방언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6:17) 


 일찍이 여호와께서 노아의 후손들이 당신을 외면하자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여 말이 달라진 후로, 특히 사도시대에 와서는 이것이 전도에 크게 장애가 되었으므로 주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의 은총으로서 방언하는 능력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조화였습니다. 


 그리하여 저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과 같은 성령을 받은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와 문도들은 이방인들이 모인 곳에서 이 방언의 은사로 말미암아, 적어도 자기 말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는 자들은 다 알아듣게 하여 전도에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문도들과 이방인들에게는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리둥절하여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2:7-11)


 이들은 방언을 듣고 상대방이 주의 종임을 알고는 은혜 받게 해 달라고 애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 사람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린다."(슥8:23)는 스가랴 선지의 말이 그대로 응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에 열심히 귀를 기울여도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성령을 충분히 받지 못했을 때입니다. 그럼 이 방언을 하는 성령의 은사는 어떻게 임하는 것일까요? 무릇 성령은 직접 오는 경우와 간접으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의 경우는 주님이 직접 주시는 성령이고, 뒤의 경우는 제3자를 통하여 임하는 성령입니다.


 그러나 이 성령은 대체로 그때만 임하고는 곧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하여 맨송맨송해지게 마련입니다. 그야말로 바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는 것입니다. 그 성령은 베드로를 통하여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베드로를 만나지 못했던들 그 성령이 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곧 주께서 기억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주님은 당신의 큰 종 베드로를 내세워 성령으로 크게 역사하시므로,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주님과 영적으로 연결될 기회를 갖게 됩니다. 원님 덕에 나팔을 분다고나 할까요? 베드로 덕에 성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성령은 그때뿐이고 오래 담겨 있지 못하고 쉬 떠나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당사자가 간구하여 그 놓친 은혜를 다시 붙잡아 성령의 연결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을 받았다가는 놓치고, 놓쳤다가는 다시 받고 하는 과정이 오래 계속되는 동안에 튼튼한 은혜줄을 잡아 성령을 좀처럼 놓치지 않게 되고, 나아가서는 언제나 성령의 연결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완전히 은혜의 사슬에 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성령을 부어 줄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참된 의미의 주의 종이란 성령을 양떼들에게 부어 줄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겨우 자기 하나에게만 성령이 떠나지 않고 언제나 담겨 있는 정도로는 남에게 부어 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섣불리 부어준답시고 남에게 안찰이라도 하게 되면 상대방의 악령이 덮쳐 씌우기가 일쑤입니다.(행19:11-16 참조)



4) 방언의 폐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는 인간들에게 역사하실 때 언제나 그 세대의 조류를 타고 세상의 여건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귀라는 강적이 있으므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1차와 2차 또는 3차와 4차 등의 예정 가운데, 1차에서 여의치 않으면 이를 거울삼아 2차에서 보완해 나가고, 3차, 4차에서 더욱 충실을 기하여 당신의 마지막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6천 년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한꺼번에 후딱 해치우지 않으며, 또 해치울 수도 없습니다. 적대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후에, 약 2천 년 동안에 걸쳐 이 땅에 수많은 당신의 사람을 보내어 역사하시다가, 독생자까지 보내어 십자가를 지게 하신 후, 오늘날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역사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방인에게도 하늘의 새로운 법도를 전하기 위해 방언의 은사까지 아울러 약속하였는데(막16:17)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120명의 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려서 돌아가신 주님을 추도하여 열심히 통성기도를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방 안에 강한 바람이 일더니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면서 성령을 받아 방언도 하게 되었습니다.(행2:1-4) 이것은 실로 창세 이후 인간이 처음으로 직접 받은 가장 복된 은혜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귀한 은혜는 당시에 살고 있던 수천만의 백성들이 다 받은 것이 아니라, 겨우 120명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즉 이들로 하여금 하늘의 큰 섭리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를 택하여 이들의 입을 전도의 나팔로 삼고 하나님의 새로운 법도를 널리 이방인에게까지 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과 그 밖의 문도들은 방언의 은사로 뭇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한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방언을 알아듣는다고 해서 곧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능력의 표시이지, 구원의 은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알아듣기만 하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결코 구원의 길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런 구원의 도리를 알 턱이 없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듣고 무척 신기해하면서 흥분하였습니다.(행2:5-8) 그리하여 방언을 하는 하나님의 큰 종들을 무척 부러워하게 되자,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은사를 받으려고 여호와에게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방언의 은사를 받기는 했으나, 워낙 그릇이 모자라서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하여 따따뚜따 하면서 방언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자, 듣는 사람들이 횡설수설하는 사람 같다고 조롱했습니다. 방언에 부작용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역사가 덕스럽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이만저만한 불영광이 아닙니다.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지나 해가 바뀔수록 방언을 제대로 하는 사람보다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어 하나님께 불영광이 날로 더해 갈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에서는 불가불 손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바울은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뭇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어 방언의 은사도 내리게 한 그가(행19:6) 갑자기 이것을 뒤집고 방언 무용론을 전해야 할 입장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어긴다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고 해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의 뜻을 완곡히 전하여 서서히 거두게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 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 우리는 이 대목에서 바울의 고충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섣불리 방언을 한답시고 이방인은커녕 자기 나라 사람들도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따따뚜따 떠들어대면 이건 참으로 난센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또 성령을 넉넉히 받은 자가 이 방언을 통역하게 마련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국 사람에게 우리말로 얼마든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영어로 말해서 통역으로 내세운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방언을 자기 나라 사람에게 통역을 하는 것도 이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을 적극 만류하지는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 중에 방언의 은사를 받기를 갈망하는자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은근히 타일렀습니다.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차서(次序)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 잠잠하고."(고전14:27-28) 이것은 바울이 갑자기 방언 폐지론을 내세워 일어날 파동을 염려하여 한 말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방언에 대하여 매우 소극적으로 완곡히 말한 이면에는 앞에서 말한 그의 난처한 사정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이 다 정말 덕스럽고 유익하며 하나님께 영광된 일이라면 바울이 이렇게 미온적인 태도를 취할 리가 만무합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고전14:2) 이 말씀은 방언보다도 예언을 우위에 두고 권장함으로써 방언을 암암리에 꺼리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 말씀에 "방언을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주객(主客)이 전도되었다고 할까요? 아무튼 방언이 본래의 여호와의 뜻에서 많이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방언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기 의사를 전하기 위한 것이지, 하나님에게 고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굳이 하나님에게 방언으로 고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리는 영인 천사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고할 무슨 비밀이 따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고전14:22)이라고 말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그것도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표적으로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예언과 방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30-40) 여기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바울의 말은, 위에서 말한 그의 입장과 그 가르침을 종합해 볼 때, 방언에 대한 긍정적(肯定的)인 표현이 아니라 부정적(否定的)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자기 의사를 좀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전13:1)고 하여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친다."(고전13:8)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계의 일각에서는 방언을 한다고 해서 옆에 있는 사람도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말을 하는 것을 성령의 은총이나 받은 줄로 착각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이 만일 성령이 역사하는 참된 방언이라면 그 방언을 미국 사람, 프랑스 사람, 중국 사람 등 이방인이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나라 동포도 통역을 해야 비로소 알아듣는 방언이라면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에 말하는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는(고전12:10) 성령을 충분히 받지 못해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을 때, 그 사람보다 성령을 충분히 받는 자가 풀이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미 방언을 거두셨는데, 믿는 자들이 방언을 하게 해 달라고 간구할 때 마귀가 틈타기 쉽습니다. 이 경우에 영을 분간 못하면 착각을 일으키는 것도 당연합니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한 교회 안에서 동포끼리 모여서 예배를 보는 데 방언이 필요합니까? 필요가 없는데 성령이 역사하게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는 주께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것을 여러분에게 전할 뿐입니다. 그러나 방언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이 옳은 줄 압니다.


 역대의 하나님의 종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하늘의 새로운 법도를 전할 때처럼 곤경에 처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때를 가리켜 신앙의 혁명기라고 합니다. 예컨대 바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약해지면 주께서 능력과 용기를 주어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실로 주의 지시대로 가시밭길을 헤쳐 갔습니다. "내가 나의 길을 다 달려가고, 내 면류관만 남았다."(딤후4:7)는 말은 이를 단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순교하여, 가장 큰 주의 종으로서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주님의 새 역사가 120문도에게 내린 성령으로 시작된 것처럼, 오늘날 이 마지막 역사도 먼저 부름을 받은 여러분을 발판으로 삼아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명이 크고 무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