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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07본문
Part 02. 성령의 검을 차고
Chapter 20. 물세례와 불세례
1) 세례 요한
성경에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 일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게 하는 경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100세 때, 90세 된 사라로 하여금 다시 경도가 있게 하여 이삭을 낳을 수 있도록 한 일도 그 한 예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사자가 와서 당신의 아내가 잉태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역사하여 그 생식을 도왔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도 이와 비슷합니다. 요한의 부친인 제사장 사가랴와 그 어머니 엘리사벳은 이미 늙었으나 여호와의 은총으로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요한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은 사가랴나 엘리사벳 어느 쪽도 닮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대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갖고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일찍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말한바,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미리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한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응해진 것입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의 직분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뭇사람들에게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엘리야가 길 예비자로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길 예비자가 설마 자기 아들로 태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사가랴에게, 그의 아들이 주 앞에 큰 이가 되며 엘리야의 심령으로 주보다 앞서 가서 주를 위해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을 말했을 때, 사가랴는 자기 내외가 이미 늙은 사람인데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때가 되면 이 일이 이루어질 터이니 그런 줄 알고 입을 봉하고 있으라.”고 이른 다음, 그를 숫제 당분간 벙어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눅1:20) 만일 그가 사람들에게 섣불리 나팔을 불면 마귀가 가만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곧 늙은 엘리사벳은 수태하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처녀가 아닌 엘리사벳이라는 유부녀의 배를 빌려 태어난 것입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영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럼 왜 주의 길 예비자를 사가랴의 자식으로 보냈을까요? 그것은 사가랴가 제사장으로, 많은 사람을 그 수하에 거느리고 있으며, 엘리야의 존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데 지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미 사가랴 내외를 점찍어 놓고, 그들 사이에 자식을 못 낳게 하여 기도하는 중에 그 간구를 들어 아기를 낳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라는 뜻으로, 하늘나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친척들은 아버지가 사가랴이므로, 사가랴 2세로 이름을 지을 것을 고집했습니다. 그래서 왈가왈부하던 끝에, 벙어리가 된 사가랴가 서판(書板)에 ‘요한’이라고 써서 이름 문제가 일단락되자, 그의 입이 비로소 열렸습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깊은 영적인 문제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엘리야는 하늘의 존재로 불수레를 타고 승천할 때에 다 큰 체격을 지니고 있었는데, 어떻게 어린애로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오늘날 과학자는 물론, 적어도 건전한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긴 영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것투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성만으로 영의 세계를 헤아리려고 하면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간의 지성에 여호와의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의 일은커녕 성경 한마디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이 말씀이 누구라는 것은 이미 알려 드렸습니다. 이 말씀은 영으로 계셨던 예수님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태어났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왔으니, 그가 곧 빛이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빛’에 대해 증거한 자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2) 성령의 효능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기독교의 한 성례로서 세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에는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었으며, 주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 120문도가 불과 같은 성령을 받은 것이 그것이며, 베드로와 바울이 안수하여 성령을 부어 준 것이 그것입니다. 물세례보다 성령의 세례가 더 온전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오면, 온전치 못한 것은 폐하는’ 것이 마땅한데, 오순절에 성령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물세례를 계속해서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지 2,000년이 가깝도록,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은 것처럼, 신부가 ‘고해 성사’라는 것을 하여 죄를 사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 이후로 지켜 온 모든 율례가 세례 요한 때까지요,(눅16:16) 그 이후에는 성령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는데도 구태의연하게 옛것을 숭상한다는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주께서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도를 전할 때, “내가 죽었다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면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신 연후에, 일찍이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에게 내린 성령을 받아 하루에 3,000명을 회개 시키는 큰 역사를 하였고, 나중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데, 구태여 물세례는 받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긴 하나님께서는 물세례를 주는 것을 묵인하고, 거두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까지는 좋은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일단 받은 성령을 당사자의 불찰로 놓쳐 버리면, 다시 말해서 성령이 떠나면, 그 대신 7배나 강한 마귀가 그를 점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요5:14) 차라리 불신자에게는 이런 폐단은 없습니다. 성령을 받아 잘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라고 해서 무작정 받기만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며, 물세례는 이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즉 물세례로 축복을 받아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볼로를 따르던 제자들은 성령의 세례라는 말도 듣지 못하였으나 바울이 안수하니 곧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행19:6) 이것은 바울이 물세례를 폐지시킨 것을 의미합니다.(눅3:16 참조)
그런데 같은 성령도 시대와 땅의 여건에 따라 위력이 달라집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 내린 성령은 불과 같은 성령이었습니다. 이때 마귀는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처음 당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귀는 이 새로운 무기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턱도 없습니다. 마귀가 이에 대한 대비책을 충분히 강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일전쟁 때 일본군이 제일 애먹은 것이 러시아의 기관총이었습니다. 워낙에 일본 사람들은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전쟁을 좋아하는 백성이며, 이들의 장기(長技)는 육박전입니다. 즉 총자루 끝에 단도를 꽂고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전술에 능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목숨을 걸고 쏜살같이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가도 러시아 군대가 따르르 하고 쏘아 대는 기관총 앞에서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남아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크게 희생을 내다가, 겨우 입수한 적의 기관총을 분해하여 연구한 끝에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기관총을 만들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신무기인 기관총으로도 강적 일본을 패배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2차 대전 때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습니다. 기관총 따위는 물론 골동품이 되어 버리고 원자폭탄으로 일본을 겨우 쓰러뜨렸던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내린 불과 같은 성령은 하나님의 역사를 진행하는 데 큰 무기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70년쯤 지나서는 교인들 사이에 맥이 쭉 빠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위해 불이 붙어 열성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즉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잃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책망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동안에 이미 마귀가 침투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마귀가 침투하면 하늘에서는 손을 달리 써야 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은 자를 마귀가 사로잡으면 날로 믿음이 약해지므로 하늘에서는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위를 살펴봅시다. 마귀는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 내린 불과 같은 한 증거의 성령을 가지고 마귀를 무찌를 수 있겠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세례도 이처럼 한 증거 정도 가지고서는 명함도 못 내놓는데, 물세례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여러분, 구원이 어렵다는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오늘날에는 옛날의 불과 같은 성령보다 몇 갑절 더 위력이 있는 성령이 내려야 하고, 또 실제로 내리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땅에서 돌아가는 형편에 따라 당신의 사람을 내세워 적절한 지시를 내리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시면서 일일이 참견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땅에서 ‘만유를 회복하는’ 기틀이 마련될 때까지 여호와의 우편에 앉아 계시게 되어 있습니다.(시110:1, 행2:35)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일단 당신이 들어 쓰신 종도 그 사명을 다 마쳤거나 또는 다하지 못하면 다른 종을 내세워 새로운 사명을 맡기든지, 아니면 앞선 종이 다 못한 일의 뒷수습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대교체가 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를 우리는 세례 요한과 주님, 모세와 여호수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움직인 사람이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움직였으나, 각자 자기 분야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세례 요한이 할 일까지 간섭하지 않고, 세례 요한도 주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자기 사명을 끝냈던 것입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제멋대로 하려고 했던들 주님의 일까지도 침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과 세례 요한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주님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세례 요한이 주님보다 더 우세한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요,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자이며, 대예언자로서 위세가 당당한 반면에, 주님은 한낱 목수의 아들로 그 역시 목수 일을 하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서 소위 권력층이나 지식층에 속하는 자들 중에는 선생이 주님을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양다리 놀음을 하여 두 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어느 모로 보나 자기 선생보다 못한 자가 더 위대하다니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언동은 세례 요한에게 일러바치고, 세례 요한의 이야기는 주님에게 고해바쳤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는 세례 요한을 제거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으로 말하면 하늘이 내린 사람으로, 교권을 쥐고 있으며 돈 많고 권세 있는 자라, 만일 그가 계속해서 버티고 있으면 같은 하늘의 사람 둘이서 더욱 혼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일단 자기의 사명을 마친 후에는 깨끗이 물러나야 했을 텐데,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 중에 상당수가 아무리 주를 증거해도 여전히 자기 그늘 아래 머물러 있으므로, 주님의 영역은 터치하지 않았지만, 이들에게 계속해서 물세례만은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요한의 착각
그럼 여호와께서는 세례 요한을 어떻게 제거하려고 했는지 살펴봅시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례 요한은 당대의 거물이므로 헤롯왕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헤롯왕은 동생의 아내 되는 헤로디아와의 불륜관계로 인하여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자, 그를 감옥에 가둔 후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를 선지자로 알고 있어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헤롯왕은 자기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 석상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자리를 더욱 빛나게 해 주므로, 그 어린 딸에게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딸이 요한의 목을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무척 당황하여 꽤나 고민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의 위력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많은 신하들 앞에서 한 약속이라, 왕의 체면상 할 수 없이 목을 베어 오라고 일렀습니다. 한편 옥중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에게 면회를 오는 사람은 가족과 제자들뿐이었는데, 이들은 물론, 요한 자신도 주님이 당신의 권능으로 옥에서 풀려나게 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구세주가 이스라엘 왕으로 오실 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 제자들은 주님이 왕으로 등극하면 저마다 큼직한 감투를 하나씩 얻어 쓰려고 잔뜩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구세주는 육적인 이스라엘의 임금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온 것을 그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요한의 감옥살이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태도는 세례 요한을 면회하러 간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곧 요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가짜 구세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님이 가르친 영적인 말씀은 입신출세를 노리는 당시의 제자들에게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자신도 이런 깊은 영적인 이야기는 꼭 필요한 것만 언급하였을 뿐, 그나마도 대개 비유로 말씀하시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적, 기사를 많이 행하였습니다.
주께서 환자들의 병을 많이 고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입에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탄식이 나올 법하지 않습니까? 또 주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수제자들까지도 다 도망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을 가짜라고 생각한 것도 있을 법한 일입니다. 감옥에 갇혀 물에 빠진 사람처럼 자기를 건져 줄 것을 태산같이 믿은 요한의 귀에 날이 갈수록 괴상한 소리만 들려왔으니 말입니다. “선생님이 구세주라고 증거하신 그분은 뱃사공이나 세리 나부랭이들을 거느리고 허튼소리만 하고, 선생님께서 감옥살이로 고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으니 웬 일입니까?” 드디어 세례 요한은 ‘속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이렇게 돌아가니 제자들더러 주님을 따르라고 하겠습니까? 여기서 세례 요한은 가로막는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보통사람이면 장본인 한 사람으로 그치지만, 세례 요한은 비중이 큰 하늘의 사람이고 보니, 말 한마디가 여호와의 역사를 좌우하는 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손을 쓰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가 곁길로 가거나 크게 어긋날 때는 여호와께서 반드시 조처를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영수가 지금 단에서 외치게 된 동기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 몇 년 전부터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고자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 후에, 더 이상 감추어 두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이제부터 나가서 열심히 전하라고 명령하시기에, 몇 달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신학교란 문턱에도 못 가 본 사람으로, 오직 보여 주시고 지시한 것을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신학을 공부하여 하나님의 깊은 뜻을 전한다고 하면 나에게는 영광이 돌아올지 몰라도, 주님에게는 영광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배운 사람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어리고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주의 깊은 사정을 세상 기독교 신자들한테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욕을 먹고 비방을 받을지 몰라도, 주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