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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07본문
Part 03. 승리의 대열에서
Chapter 21. 사단아 물러가라!
1) 주님의 시련
하나님의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여호와로부터 맡은 분야만 관여하지, 그 밖의 일은 일체 터치하지 않는 법입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태어난 세례 요한이 주님을 증거하는 날이 되자 몹시 긴장하였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내가 증거할 하나님의 아들일까 하고 그는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그가 요단강에서 자기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물세례를 주고 있을 때 나사렛 동네의 예수가 얼굴에 유난히 광채를 띠고 자기 앞으로 걸어와 세례를 받더니, 홀연히 하늘에서 비둘기같이 성령이 그 머리 위에 임하고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3:16-17)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때부터 주님을 증거하였으며, 이어서 그리스도의 구령 사업이 시작되는 동시에 요한의 사명은 끝나,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예수의 머리 위에 비둘기같이 성령이 내리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매우 기뻐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터인즉, 나는 그의 신들메도 풀기 어렵다.”(눅3:16)고 자기를 낮추어 말하였습니다. 그는 예상과는 180도를 달리하여 오시리라 약속한 구세주가 자기도 잘 아는 나사렛 동네의 목수, 예수라는 것에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30년을 목수 일을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났을 때 세례 요한은 그저 어안이 벙벙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모든 여건과 처지와 형편이 너무나 초라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주님은 곧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나갔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광야에 나가 마귀의 시험을 받아야 했을까요? 우리는 그 까닭을 잘 알아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으면 어찌 전하리오.”(롬10:14) 한 대로, 주님의 오묘한 진리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보여 주고 가르쳐 주신 자가 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보여 주고 가르쳐 준 자라고 해서 혼자서 모든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맡은 분야의 것만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가 곧 여호와의 종이며 그가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면 으레 비방과 공격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여호와는 중심을 보지만 인간들은 외모를 보기 때문입니다. 목수이신 주님은 평상시엔 마귀의 유혹을 받은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한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주님이 나타나심으로 인하여 하늘의 권세가 그의 손에 쥐어져 하늘과 땅 사이에 연결되어 있으므로, 마귀는 이를 가로막는 역사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당신의 과업을 이루시기 위한 구상을 하면서 금식 기도를 하여 극도로 굶주리셨는데, 사단이 나타나 돌을 가지고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했습니다.(마4:3) 그런데 돌을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마귀는 이미 예수는 능히 돌을 떡이 되게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주님이 보통 선지자 정도였던들 마귀가 이런 주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할 수도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한 번 슬쩍 떠본 것입니다.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꼬일 때에도 먹을 것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수법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인간은 먹는 일에 그만큼 약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또 당시의 주님의 여건으로는 굶주림이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주께서 만일 당신의 능력으로 마귀의 요구를 받아들여 돌을 떡이 되게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마귀의 비위를 맞춘 것이 되므로 여지없이 시험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음 시험은 오지 않습니다. 일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마4:4)고 대꾸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물러가지 않고 수법을 달리하여 다시 달려들었습니다. 즉 주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봐라. 성경에도 이런 경우에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게 되어 있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주가 얼마나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나 떠보기 위해 성경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마4:6) 얼마나 거드럭거리는 말입니까? 이것은 마귀가 주의 원수라서 그렇게 내뱉는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만만치 않은 적수(敵手)로서 으스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쳐 버립니다.(마4:7) 그러나 마귀는 물러가지 않고 또다시 방법을 달리하여 덤벼듭니다. 이것이 마귀의 수법입니다. 이번에는 명예욕에 호소하여 주님을 쓰러뜨리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천하만국을 보여 주고, “내게 절하면 이것을 다 주겠노라.”(마4:9, 눅4:5-7)고 제의하였습니다.
‘천하만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은 산’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험의 장면은 다 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높은 산에 오른 것은 주님의 육체가 아니라 영이요, 천하만국을 바라본 것은 육안(肉眼)이 아니라 영안입니다. 천하만국을 바라볼 수 있는 산이나 눈은 실제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천하만국’을 주님에게 주겠다는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마귀가 천하만국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마귀의 시험에 대하여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호령으로 물리쳐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체험은 제3자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제자들에게 간증으로 들려주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2) 말씀의 위력
이와 같은 내막은 실제로 비슷한 일을 당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항상 같이하지 않으면 체험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께서 목수 일을 할 때는 잠자코 있다가 성령이 임하여 하늘과 교류가 시작되니까 그 중간을 가로막은 것이 곧 마귀였습니다.
하늘나라와의 영적인 내왕이 없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아무리 분주히 돌아다닌다고 해 봤자 마귀가 이런 차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그를 하나님이 내세운 자라고 하더라도 하늘과의 교류가 없으면 가만두는 것입니다.
사단의 세계에도 왕초가 있고, 장수, 졸병이 다 있습니다. 주님을 시험한 사단은 왕초가 아니라 왕초의 오른팔쯤 되는 놈입니다. 왕초는 여호와를 직접 상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광야로 이끌고 간 것은 성령이며, 따라서 주님이 혼자 계신 것이 아니라 성령도 같이 계셨습니다.
주님은 처녀의 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여호와께로부터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구세주로 오셨지만 목수로 있을 때에는 한 집안의 가장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기 전과 온 후는 판이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씨를 받아 태어난 자들이므로 성령이 우리 혼과의 연결이 잘될 때와 그렇지 못한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혼은 주님의 성령을 오래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하고 때 묻기 쉬운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에게 와도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고저(高低)와 기복이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대하는 마귀의 태도도 일정치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이 자기의 심령을 들여다보면 알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들락날락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으면 우리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지 않습니다. 또 그런 사람은 마귀가 덤벼들어도 뚫고 들어갈 틈이 없으므로 마귀는 침범하기를 포기합니다. 마귀가 주님을 세 번 시험한 끝에 떠나 버린 경우가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귀가 노릴 틈바구니가 전혀 없는 상태에 이른 사람을 가리켜 ‘이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도 그랬지만, 이긴자가 되면 입 기운을 불어 능히 마귀 떼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 입 기운에 성신이 임하여 마귀가 쓰러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성경 말씀이 얼마나 위력을 갖고 있는지 아직 모르고 있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위력은 주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할 때 말씀으로 마귀를 무찌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면 말씀을 읽고 대수롭지 않은 구절 하나를 깨달아도 여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연구하는 동안에 남이 미처 모르는 구절을 하나 먼저 알아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상 중에 여호와와 대면하여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기쁨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여러분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마귀가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주님을 떠볼 때 그 마귀를 물리친 말씀입니다. 즉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보다 신령한 말씀을 몰라 굶주리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단상에서 이영수의 입을 통하여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깊은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인간 이영수가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이 세대의 완악할 대로 완악해진 뭇 심령들을 다듬어 세우시려는 여호와의 뜻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일일이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남들처럼 배우지도 못했고, 오랜 신앙 연조를 쌓지 못한 나를 하나님이 당신의 입으로 들어 쓰시기 때문에 나는 그 마이크 역할을 할 뿐입니다. 주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광경만 해도 그렇습니다. 큰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하여 당시의 모습을 소상히 전한 사람은 아직 없었습니다.
바울이나 그 밖에 어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이에 대하여 발설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큰 일꾼으로 부름을 받고 나서 ‘3층천’에 올라가 하나님의 깊은 내막을 직접 목격하였으나, 이 사실을 밝히면 사람들이 자기를 천사처럼 받들까 봐 14년 후에 자신의 기반이 어느 정도 닦인 후에 입 밖에 냈지만, 나는 그럴 염려는 없을 터이므로 말하려는 것입니다.
주께서 “인간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간다.”고 마귀에게 한 대 먹였을 때 마귀는 벌써 어느 성경 구절을 인용했는지 알아차렸습니다. 그리하여 마귀가 주님을 순식간에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주님의 육은 광야에 있지만 영이 성전 꼭대기에 올라간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가 하늘나라, 곧 3층천에 올라갔을 때,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안다.”(고후12:2)고 말한 것은, 자기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들이 40주야씩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금식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도 광야에서 그랬지만, 모세나 엘리야 같은 분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그 비결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가 죽었다고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할 때 주님은 “잔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나사로의 영혼을 하나님이 간수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여느 사람들의 경우처럼 마귀가 차지하고 있다면 놓아주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다시 소생할 수 없습니다.
깊은 영적인 이야기이므로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 주님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서 40주야의 단식기도를 하시는 가운데 물 한 모금 안 마신 정도면, 주님의 육신이 지상에 있기는 하지만, 그 영체가 하나님과 긴밀한 교류를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40주야 산속에서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있을 때 그가 어디 있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만일 알았던들 죽은 줄 알고 들것에 담아다가 묻어 버렸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주님이 광야에 천사와 함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여건이 매우 어려우므로 천사가 옆에서 지켜 줘야 합니다.
인간의 혼이 아름다운 영체로 화하여 하나님과 교류하며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40주야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원리가 여기서 비롯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생명을 사단이 지배했던들 주님은 부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세상을 떠난 사람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마귀의 간계
그럼 이야기를 다시 마귀의 시험으로 돌리겠습니다. 첫 번째 시험 때는 마귀가 성경 말씀을 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성경 말씀을 들어 자기를 때리니까 자기도 성경 말씀을 들고 나와 두 번째로 시험을 한 것입니다. 즉 마귀가 여호와의 말씀을 통하여 들어온 것입니다.
신출귀몰(神出鬼沒)의 묘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록하였으되” 하고 때리니까, 마귀도 역시 “기록하였으되, 지켜 주마 했으니 뛰어내려 봐라. 너는 안 다칠 게 아니냐.” 하고 응수한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역시 말씀으로 잘라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이런 식으로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영을 구분 짓지 못하면 마귀의 밥이 되기 쉽습니다. 여기서 마귀는 다시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경우에도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주님과 함께 거하는 영이 가는것입니다.
영체로 화하면 만물이 한눈에 드러나 보입니다. 그리하여 마귀는 주님이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겠다고 제의한 것입니다. 천하만국은 아담, 하와의 범죄 이후로 마귀의 수중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것을 회복하여 다시 낙원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늘에서 마귀의 세계에 와 있는 불청객(不請客)입니다. 하긴 주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불청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귀는 주님에게 흥정 조로 나왔으나 주님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한마디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마귀의 세계에 대하여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마귀는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이나 주님 또는 성령이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엄연히 살아 있습니다. 마귀는 일종의 영체로 그 세계에도 높고 낮은 순위가 있습니다. 왕초 아래 제2인자, 막료, 졸병 등 위계(位階)가 서 있어, 상대방의 실력에 따라 마귀도 그에 걸맞은 적수(敵手)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직접 상대하는 것은 마귀의 왕초이니, 광야에서 주님과 대결하여 시험한 놈은 제2인자입니다. 혹시 여러분을 마귀가 직접 건드린다면 그놈은 마귀의 졸병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알아도 무방합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쩔쩔매는 형편이니, 그것은 여러분이 육체를 가진 몸이고 마귀는 영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단과 싸우면서 느끼신 바가 많았을 것입니다. 30년간의 사생활을 청산하시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마당에, 성령을 받고 당하신 시험은 당신의 공생활(公生活)을 위한 시련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목수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해 오던 나날과는 감정과 사상이 전혀 달라졌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새삼 무슨 시련이 필요한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육신을 입고 이 죄악 세상에서 거처하는 한, 이런 시련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인간과 똑같은 조건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존재였던 신령한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존재로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요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