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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22본문
Part 03. 승리의 대열에서
Chapter 22. 인(印)침에 대하여
1) 인의 의미
성경에는 소위 인(印)을 친다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옵니다. 이 ‘인 친다’는 말에 대해서 여러분은 지금까지 극히 일부만 알고 계셨을 겁니다. 할례와 마찬가지로 인침에 대해서도 아직 소상히 터뜨린 신학자나 목회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을 친다’, 알기 쉽게 말해서 도장을 찍는다는 이 말은 물론 영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거기에는 반드시 인을 치는 자와 인침을 받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과 그 아들들,그러니까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또한 이다말로 하여금 제사장 직분을 맡도록 하려고, 제사장으로서 입어야 할 옷에 대하여 모세에게 소상히 지시하고 있습니다.
즉 흉패(胸牌)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冠)과 띠를 만드는데, 이 옷들을 짓는 실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을 쓰되, 에봇에는 열두 개의 보석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각각 새기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겉옷에는 금방울을 달아 제사장이 지성소에 출입할 때 옆에서 사람들이 그 금방울 소리를 듣고 알아차리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印)을 새기는 식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끈으로 관(冠) 위에 매어 관의 전면에 있게 하라는 등, 매우 소상하게 일렀습니다. 그 옷 한 벌의 값을 오늘의 시세로 따지면 무려 1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들 겁니다.
그럼 어찌하여 제사장의 옷을 이와 같이 호화찬란하게 지으라고 지시하였을까요? 요즘 타산이 빠른 사람들은 옷 한 벌에 1억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충 주먹구구로 쳐도 쌀 만 가마니 가까이 되는데, 그것으로 끼니가 간데없는 가난뱅이 한 사람 앞에 한섬 꼴로 자비를 베풀면 무려 만 명 가까운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와, “하나님도 매정하지, 그래 옷 한 벌에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게 한담!” 하고 혼자서 혀를 찰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발등에 값진 향유를 부을 때 가롯 유다가 아까운 생각이 들어 이의를 제기한 것과 비슷한 사고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의 척도로 하늘의 일을 헤아려서는 핀트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낭비(?)를 인간에게 지시했을 까요? 여기서 여호와께서는 앞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영원한 하늘나라의 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상에 제사장이 있는 것처럼, 나중에 하나님의 세계에도 제사장들이 있게 됩니다.(계20:6)
그때 제사장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영광 속에서 제사를 받기를 원하여 죄악 세상에서 제사장의 옷이나마 그 영광에 부합되는 차림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 예복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여호와께 성결’을 드린다고 인 치듯 새겨 이마에 붙인 금패(精金牌)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인침을 알려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소위 ‘인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14만 4천이니,”(계7:4) 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와 같이 인침을 필요로 할까요?
나는 본래 예수와는 인연이 먼, 우상을 섬기는 집안에서 나서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을 이상한 눈초리로 지켜보다가,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들의 행위가 표리부동할 때 오히려 멸시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났다가 육칠십 년쯤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예수는 믿어서 뭣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친구 집에 가서 소위 예수쟁이들이 모여 앉아 예배를 보고 기도를 하면서 눈물을 찔끔거리는 광경을 목격하면 그보다 더 꼴 보기 싫은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 누가 하나님 봤나?’ 하고 나는 속으로 항의하였습니다. 그러던 내가 아버지의 병환으로 교회에 나가
기 시작하여 내 몸에 직접 신이 임하는 것을 피부로 느꼈을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이 엄연히 존재할 뿐 아니라 살아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게 불덩이처럼 임하는 신은 내 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나 이외의 다른 데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내 신경이나 심리 조화가 아니라 제3의 어떤 존재로 내게 오는 것이므로 나는 놀랐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갖고, 가까이하기 위해 애써 매달렸습니다.
하루 종일 마음속으로 주님을 사모하며, 때로는 뒷동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부둥켜안고 주님에게 가까이 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논두렁에 가서 푸성귀를 움켜쥐고 주님을 좀 더 분명히 알게 해 달라고 애원해 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그 나라가 어디쯤인지 가르쳐 달라고 기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일관하였습니다. 나중에 비로소 알게 된 일이지만, 나는 이미 일종의 인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인침이란 요컨대 성신이 임한 증거를 말합니다. 내몸이 불덩이를 받은 것처럼 갑자기 확 달아올랐을 때 나는 이미 인침을 받고 하나님이 엄연히 존재할 뿐더러 실제로 살아서 움직이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많은 주의 종들은 이 인침을 받고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인침을 받았기 때문에 사자 굴에서 기꺼이 죽어 가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으면서도 절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신약시대의 인침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약시대의 인침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하나님과 마귀가 싸우는 양상이 다르고, 내리는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인 친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도장을 찍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의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스라엘 임금들은 반지에 도장을 새겨 그것으로 결재를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사형수를 교수대에 올려놓으면 대통령이 사인을 하여 결재를 하는 것처럼, 당시의 임금은 반지의 도장을 눌러 목 베는 여부를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밤의 이상(異象)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 치듯 교훈하시나니”(욥33:16)의 인침도 육적인 의미에서 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마귀가 인간의 혼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인치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것은 영적인 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증거이며, 그 증거로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싸움에서 인간의 혼이 인침을 받았느냐 못받았느냐에 따라서 일반 혼과 영을 받은 혼, 즉 영혼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 교회에 은혜가 많으냐, 저 교회에 은혜가 많으냐, 박 목사가 신령하냐, 이 목사가 신령하냐,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50보, 100보지만, 이러니저러니 말꼬리가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기준이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때 당사자의 신앙 자세나 열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 기준은 주와의 연결이 잘되고 안 되는 데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번뇌가 사라지고 평안을 얻으며 누추한 생각 대신 고귀한 생각을 얼마나 하게 되었느냐, 말과 행실이 얼마나 달라졌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면 아무래도 자기 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뒤집어쓴 악령은 혼자서 철야 기도를 천만 번 하여도 물러가지 않습니다. 이놈을 소탕할 수 있는 길은 따로 있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안수하여 성령을 부어 주는 동시에 그 손길로 악령을 몰아낼 수 있는 주의 종의 힘을 빌려야만 합니다.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덤비는 요즈음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로운 손길은 단지 고명한 부흥사나 목사라고 해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사도시대 이후 근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이 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이 있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2) 할례와 인침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으니.”(고후1:22)이 말씀 그대로 성령을 받는 것은 인침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시대에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을 얻는 것처럼, 신약시대에는 인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군병이 되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그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도장은 구속(救贖)을 얻는 날까지 유효하게 됩니다.(엡4:30) 그리고 그동안에 기꺼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즉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주의 은혜 사슬 되어 나를 주께 매는’ 것입니다. 그것은 땅에서 살면서도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땅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침을 받지 못하고악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덕망이 높고 학식이 뛰어나도 인침을 받은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무식하고 못나도 얼마든지 인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의 기준과 땅의 그것은 그만큼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인침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해서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받게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경륜을 이루시는 하나의 관례입니다. 고넬료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 하나님이 기억할 정도로 믿음이 독실하였지만,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 즉 인치는 자가 없으면 인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람도 약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울이 나타나자 점점 은총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약해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같은 주의 사도이지만 말씀을 전하는 방법과 태도에서 두 사람 사이에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9:2) 바울은 자기가 지지자들에 의해 주 안에서 사도라는 인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인침은 어떤 인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침을 받으면 하나님의 군병이라는 것을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의 장자는 죽음을 면한 것처럼, 신약시대에도 인침을 받으면 그날에 해함을 받지 않게됩니다.(계9:4)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식구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습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먹고 마시면서 어떻게 살았다는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물론 ‘싸움터에 나가는 군사가 식량을 손수 마련해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것쯤 잘 알고 있었으며, ‘신령한 것을 뿌렸으니, 상대방에게서 먹을 것을 거두기로’ 거리낄 것이 없을 터이지만, 그런 목회자의 특권을 일체 보류하고 참았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자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니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으로나마 주님의 상(賞)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내까지 거느리고 육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고전9:5) 이것은 물론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로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지만, 바울과는 이렇게 대조적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7: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사는 어떤 특정 인물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하늘에서 온 천사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천사를 거느리고 각각 일정한 소임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을 내리는 천사가 있고 화를 주는 천사가 있으며 인치는 천사가 각각 따로 있습니다.
또 주님에게 힘을 주는 천사가 있고 베드로를 옥에서 건져 낸 천사가 따로 있습니다. 마지막 때 용에 맞서 싸울 천사장 미가엘(계12:7)은 아직 그때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장은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세례 요한을 낳을 것을 예고하고(눅1:13-19) 마리아에게 예수가 탄생하실 것을 예고할 때(눅1:26-33) 분주히 활동하였으며, 또 지금도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인을 갖고 있는 천사는 아무에게나 인을 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인치는 사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도와, 인을 받기에 합당한 자격을 이룬 사람에게 인을 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은 하늘과 땅에서 반반씩 합작하여 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치는 사명을 맡은 자가 땅 위에 나타나지 않으면 인치는 천사는 내려오지 않고, 인치는 천사가 떠나면 인치는 사명을 맡은 자의 권능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이마에 인을 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의 비유로 알기 쉽게 표현한 말이며, 이마에 도장 찍듯 인을 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와는 달리 이 인침은 성령의 인을 가리키며, 지금은 하나님과 마귀가 인간의 혼을 사이에 두고 겨루는 시대이므로
그 혼에 성령의 인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 맞은 자의 수는 각 지파 중에서 도합 14만 4천 명이라고 하였는데, 이것 역시 구약시대의 육적인 야곱의 자손에서 갈라진 12지파를 가리키는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질 일이므로 영적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즉 이긴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새로운 영적인 열두 지파입니다. 또한 ‘해 돋는 데’서 천사가 올라온다는 해 돋는 데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새 역사가 비롯되는 새 아침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도장을 찍을 때 희미하게 찍히는 경우와 뚜렷하게 찍히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성령의 도장도 우리의 혼에 희미하게 찍히는 경우와 뚜렷이 찍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거한 사람은 뚜렷한 인침을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희미한 인침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똑같은 생명책에 기록되어도 똑똑히 기록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내가 계시로 목격한 바로는 생명책 두루마리의 앞부분에 기록될수록 이름이 선명하고 뒷부분에 처질수록 이름이 희미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는 법도와 규례가 정해져 여호와는 이에 따라 움직이며, 천사들 사이에는 많은 계급이 있어 각각 직분이 다릅니다. 이 하늘나라를 주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지만, 새 나라가 임할때까지 불가불 주께서 왕 노릇하며(고전15:25) 많은 천사들이 각각 그 직분에 따라 성도들과 교통을 하여 그 움직임을 주님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영의 세계란 본래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본의 아닌 잘못을 저질렀을 때 곧 천사를 통하여 주님에게 알려집니다. 그리하여 눈물 뿌려 깊이 회개하지 않는 한 그 죄상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인침과 생명책에의 기록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가나안 전쟁을 수행한 것처럼, 인침을 받은 자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나중에 영의 세계에서 전쟁을 할 하늘나라 군병으로서의 자격을 갖게 됩니다.
할례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육적인 피의 언약이었으나, 인침은 성령으로 증거하는 새 언약, 즉 주의 거룩하신 보혈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빚어진 새 언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