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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1.03본문
Part 03. 승리의 대열에서
Chapter 24. 마음의 밭을 갈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나와 먹어 버렸고, 더러는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13:3-8)
이 주님의 말씀은 믿음을 간직하고 은혜를 간수해 가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비유로 알기 쉽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이 세 가지 밭 가운데서 어디에 속해 있는지 냉정히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각자 알아서 자기 밭을 애써 가꾸어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목회자도,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양 떼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곧은길이고 저것은 곁길이라고 가르칠 수는 있어도, 여러분의 발길을 일일이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느 길을 가든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이며 이 자유를 제3자가 구속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도 아담과 하와를 지어 놓고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다고 가르치기는 하였으나,이들이 당신의 말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을 때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가 부여되어 있으며,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죄짓는 것을 못 짓게 할 수도 없고, 죄 안 짓는 것을 짓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가운데 놓고 마귀와 싸우는 하나의 규례입니다.
세상 전쟁에도 국제법이라는 규례가 있어 포로를 서로 교환하고 적의 부상병을 치료해 주기도 하는데, 하나님과 마귀와의 전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규례에 따르게 마련입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직전에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자코 있었다면 하나님은 매우 무자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일단 자유의지(自由意志)를 허용한 이상, 거기까지는 간섭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인간의 의사(意思) 발동을 어디까지나 존중하는 것도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이런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가 가나안 복지에 못 들어갈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도 하나님은 미연에 제지하지 않고 있다가 일을 저지른 후에야 책망하셨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선지자들이 실수로 자기의 사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은 언제나 일을 저지른 후에 교체를 하거나 적절한 딴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 한 보기로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에덴동산에서 흠과 티가 없이 지음 받은 아담, 하와가 범죄에 떨어진 것은 하나님과 마귀의 싸움에서 하나님이 패배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조건이 불리하게 된 것이지, 결코 하나님이 패배한 것은 아닙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만만치 않은 적수(敵手)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하나님을 넘어뜨릴 정도로 강하지는 못합니다. 마귀에게 패할 수도 있는 그런 약한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앞에서 인용한 성경 구절을 다시 상고해 봅시다. 거기 뿌린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내가 늘 하나님을 올바로 믿으려면 우선 말씀으로 굳건히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 온 사람들 중에는 나쁜 버릇이 하나 있습니다. 뭔고 하니, 입버릇처럼 자주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돈 몇 푼 생겨도, “주여!” 콩나물 한 번 볶아 먹어도, “주여!”합니다.
그야 물론 주님을 부르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쉽사리 “주여! 주여!” 하는 그 말 가운데 얼마나 간절한 느낌이 담겨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주여!” 소리가 입에 배어 건성으로 주님을 백 번 불러 봐야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이 속으로는 썩어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와 같이 입에 자주 주님을 들먹이는 것을 마치 진실한 성도의 태도인 양 착각한다면 그야말로 큰 오산입니다. 이런 외식적인 극성파에게 마귀가 침노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의 밥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입술로는 열심히 주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사사건건 마귀의 조정에 움직이면서도 구원은 내 것이라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말씀의 검으로 자기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신령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 예사로 넘겨 버리는 사람은 이를테면 씨를 길가에 뿌린 격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위대한 종을 통하여 은혜를 무진장 받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간직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도 없을 뿐더러, 숫제 받지 않는 것만도 못하게 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쏟아 버렸을 경우에 그만큼 마음이 더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마귀가 더욱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무작정 받으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이를 간직할 만한 그릇부터 갖추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다듬어져 하늘에서 어떤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와 끊임없이 교류하는 가운데 악의 세력을 꺾어 무찌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전제 조건입니다.
세상일을 두고 보더라도 공짜로 생긴 돈은 헤프기 마련입니다. 믿음이 하늘의 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씀에서 멀어지면 받은 은혜를 쏟아 버리기가 일쑤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는 “쏟으면 또 받지!” 하는 배포가 생깁니다. 이것은 하늘의 소중한 은혜를 받는 자의 태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자기 자신이 길가도 아니요, 자갈밭도 가시밭도 아닌 바로 옥토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한 번 자기 자신을 냉정히 돌이켜 보십시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신앙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깊이 자기 자신을 알고 보면 아직도 옥토가 되기까지는 아득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가혹한 자기반성이 항상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되지 못하고 된 체하는’ 착각은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지난날에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여러 가지 은혜를 받은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 은혜가 오늘날 다 어디 갔습니까?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어찌하여 그토록 위대한 영의 역사가 완전히 육의 역사로 끝나가고 있습니까? 그 까닭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요컨대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씨를 아무 데나 마구 뿌려 밭을 잘 가꾸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로 일어난 이 역사는 우선 자갈밭과 가시밭을 잘 지경하고 거름을 주어 옥토를 만든 연후에 씨를 뿌려 결실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으로 다듬어 그 심령이 믿음의 굳건한 반석 위에 서고 심정이 아름다워지면 은혜는 오지 말라고 해도 오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래도 은혜가 안 온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도깨비의 장난인 것입니다.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은혜는 제 발로 걸어오게 마련입니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또 섬겼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밭이 잘 지경이 되어 옥토로 변하면 남이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모하여 은혜의 문이 열리게 마련입니다. 혹시 내가 주의 영광을 가린 일이 없나, 우리 역사에 손해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고 항상 자기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팔이 모자라 은혜를 주지 않겠느냐?”(사59:1)고 지금도 한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우선 마음의 밭을 갈아 씨를 가꿀 여건부터 갖추도록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