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DATE. 2021.01.21본문
Part 03. 승리의 대열에서
Chapter 28. 부활에 대하여(2)
3) 주님의 무덤
주님의 장례는 일찍이 주께서 땅 위에 생존해 계실 때 공회의원으로 있던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손으로 치러졌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갔던 것입니다. 그는 니고데모처럼 위신상 주님을 숨어서 남몰래 믿어 온 사람으로, 그가 주께서 운명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자 총독은 깜짝 놀랐습니다.
죄수들이 십자가에 달려서 전신의 피를 다 쏟고 목이 타서 죽게 되자면 며칠씩 걸리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지 몇 시간이 안 되어서 시체를 달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총독은 백부장을 시켜 사망 여부를 확인하고 시체를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강도들은 아직 시퍼렇게 살아서 몸을 뒤틀며 신음하고 있는데, 예수의 시체만 십자가에서 내릴 수는 없는 일이므로, 두 강도의 다리를 꺾어 곧 죽게 한 다음, 세 사람의 시체를 동시에 내렸습니다. 두 강도는 주님이 일찍 운명하신 덕분에 그만큼 고통을 덜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돌아가셨으므로 다리뼈를 꺾을 이유가 없었습니다.(요19:36, 시34:20)
유월절에 어린 양의 뼈를 꺾지 않고 고기를 먹으라는 것은 바로 주님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출12:46) 이때 육을 벗어난 주님은 당신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광경이며, 그 밖에 당신의 시체를 다루는 모습을 환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의 시체에 몰약, 즉 방부제를 바르고 정한 세마포로 싸서, 자기가 죽으면 들어가려고 마련한 바위 속에 판 자기의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갖다 놓았습니다. 아무도 감히 주님의 시체를 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믿음이 독실하고 의리도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부자요, 출세하여 총독도 마음대로 대면할 수 있던 사람으로서 이만큼 성실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물론 여기에는 여호와의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입김이 작용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사53:9)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그러니까 일요일 새벽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는 생전에 존경하여 마지않던 스승의 무덤을 몰래 찾아갔습니다. 장사 지낸 지 사흘이 되던 날에 비로소 주님의 무덤을 찾게 된 것은 그 중간에 안식일이 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무덤은 주께서 처형을 당한 골고다에서 조금 떨어진 양지바른 곳이었습니다. 무덤 속은 작은 동굴로 되어 있고, 복판에 돌로 된 받침대가 있어 그 위에 시체를 안치하게 되어 있으며, 주위에는 몇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들 눈앞에 이변이 나타났습니다. 무덤에 못 들어가게 막아 놓은 돌이 굴러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주님을 안치해 놓은 자리에는 세마포 옷만 남아 있고, 주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생전에 주님으로부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도저히 상상조차 못할 일이므로 귀 밖으로 흘려버리고, 으레 주님은 무덤 속에 그대로 누워 계실 줄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눈같이 흰 옷을 걸친 두 천사가 곁에 서 있었으므로 여인들은 더욱 놀라 땅바닥에 얼굴을 대고 벌벌 떠는데,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무서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찾는 줄 알고 있다. 그는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니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마28:5-7) 하는 것이었습니다.
4) 부활하신 주님
그럼 부활은 어떻게 하여 된 걸까요? 주님의 영이 여호와의 권능에 의해 주님의 시체 속에서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초림 당시의 육을 입은 주님이 아니라 영체로 화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지상에서 40일 동안 당신이 부활하신 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밤에는 옛 주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고,(요20:19, 21:3) 낮에는 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눅24:31) 또 엠마오로 가는 두 청년에게는 주께서 나타났지만 이들의 눈에 생전의 주님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눅24:30) 그런가하면 문이 잠긴 방 안에도 나타나시는 등, 모습이 변화무쌍하고 거취가 자유자재하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주께서 40일 동안 당신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신 후, 승천하시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곧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될 터이니 땅 끝까지 당신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을 당부하시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승천하셨습니다.(행1:9-11)
주께서 부활하여도 종전의 육신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승천할 수 없습니다. 또 주께서 육으로 다시 사셨다면 구태여 40일 동안이나 당신이 부활하신 것을 수고스럽게 증거하고 다닐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러 문도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못 박혔던 자국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를 보여 주면서 그동안의 경위를 간단히 설명하면 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주님은 변화된 영체이므로 혹시 무슨 유령으로 알까 봐서 손수 고기도 먹어 보이고, 손바닥도 만져 보게 하면서 40일 동안이나 당신의 부활을 증거하느라고 수고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야도,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은 아니지만,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옷을 벗어 엘리사에게 주고 영광 중에 말려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때 엘리야는 영체로 화하였으므로 옷이 필요 없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서 주의 재림을 맞을 때에도 현재의 몸으로 맞는 것이 아니라, 홀연히 변화하여 영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매우 신비롭게 들리지만, 오늘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세포 조직은 레이저 광선이 비치면 변화하여 한 줌 연기로 화하여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치면 그 위력은 레이저 광선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주께서 뜻을 이루시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말미암아 주님은 육적 장막이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때 홀연히 변화되는 것도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이란, 죽었던 나사로가 주님의 권능으로 다시 사는 것과는 판이합니다. 나사로는 다시 살기는 했지만, 옛 육신을 그대로 갖고 있으므로 다시 죽어야 할 몸입니다. 만일 부활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면 하늘에 오르지도 못하지만, 설사 올랐다고 하더라도 머리도 깎고 화장실에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신진대사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가 하늘로 가신 그대로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영체로 승천하신 주님은 영체로 다시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때 살아서 주님을 맞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처럼 홀연히 변화하며, 오늘날 우리가 갖은 고생을 참고 견디면서 애쓰는 첫째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거나 믿어도 건성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실로 동화와 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입증하는 하늘의 원리입니다.
5) 인류의 소망
구약의 주인공인 주님이, 일찍이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이 땅에 와서 3년 동안 하늘의 도를 전하시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스승을 육적으로만 보고 영의 세계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스승을 잃은 그들은 실망한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주를 따르던 자기 목이 언제 달아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믿기지 않았으나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주님이 누워 계시던 자리에는 세마포 옷만 놓이고 주님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그는 이상하게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 갔는지, 아니면 정말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났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수제자의 신앙 자세였으니, 그 나머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안 되어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즉 여기서도 주님을 만나 보았다, 저기서도 주님을 만나 보았다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나는 낮에 예수를 보았다, 나는 밤에 보았다 하고 쑤군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 가운데는 주님의 부활에 대하여, 사실일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유령이 아닌가, 하고 의견들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영체로 화하여, 사흘 전의 주님과는 모습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수고스럽게 제자들에게 간간이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고 종전의 모습대로 나타나 보이는 이적을 행해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사흘 전의 주님은 육의 어머니 마리아의 얼굴을 닮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마와 같은 제자는, “나는 살아나신 예수의 손바닥을 만져 보고 쇠못이 박힌자국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을 믿지 못하겠노라.”(요20:25)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도마에게 나타나 친히 손바닥을 만져 보게 하시고,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요20:29)고 타일렀던 것입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너 나 없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모여 앉아 있는데, 주님이 갑자기 나타나 숨을 휙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다.”(요20:23) 하고 말씀하였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유사 이래 없던 큰 권세인 사죄권과 정죄권을 아울러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죽을 자를 건지는 특권으로, 아브라함이나 모세의 권세와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커다란 소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인간과 같은 낮고 천한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힘입어 우리도 그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이기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감란산으로 모이게 하시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말씀을 마치고, 승천하셨습니다. 이때 구름이 주님을 가려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고, 두 천사가 나타나 주님은 하늘에 오른 그대로의 모습, 즉 영체로 다시 오신다고 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주님을 잃은 제자들과 그 밖의 문도들은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위로하는 가운데, 자기들끼리 예배를 보면서 울적한 마음으로 지내었는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들에게 처음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제자들과 이들 문도의 심령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즉 주님의 존재와 그 심정을 분명히 알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난날의 불찰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눈물 뿌려 통회하는 한편, 담대하게 나가 주의 도를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열렬한 성령의 역사는 실로 이들 120문도들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기독교가 오늘날 전 세계에 전파되는 터전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크신 뜻을 이루시려면 반드시 당신의 종을 들어 쓰시며, 땅에서도 하늘의 뜻을 받들어 보조를 같이해야 합니다.
즉 하늘의 뜻과 땅의 움직임이 합작이 잘되어야 하며, 땅의 움직임도 하나님의 종과 성도들이 손발이 잘 맞아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모든것을 척척 해치우실 텐데 무슨 소리냐?”고 단순하게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새 하늘과 새 나라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 권능이 마귀의 제약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어떤 과정을 거칠 것인지 섭리를 정하셨는데, 이것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가령, 왜 꼭 의로운 자의 수가 14만 4천이 차야만 하나님께서 천년세계를 이루게 되느냐, 하고 우리는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여호와께서 미리 예정하신 조건이므로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는 12지파에,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 명씩, 14만 4천 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리하여 왜 하루를 20시간으로 정하지 24시간으로 정했느냐고 항의할 수 없듯이, 왜 하늘군병의 수를 여남은 사람으로 하여 얼른 천년세계를 이루어 버릴 일이지, 그렇게 많은 숫자를 채우느라고 그 고생이냐고 항의할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경륜 자체가 숫자적인 조건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보혈과 부활은 기독교의 3대 진수입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부활이 인류에게 주는 의의와 그 귀중성을 다시 되새겨 보면서, 그 크신 은혜 가운데 거하다가 불원에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게을리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