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Part 02 - Chapt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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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9.30
[1권] Part 02 - Chapter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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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성령의 검을 차고   

Chapter 14. 영광에의 길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陳設餠)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나니…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1-8) 


 주께서는 3년이라는 짧은 시일에 하나님의 도를 전하기 위해 늘 동분서주(東奔西走)하는 분주한 나날을 보내셨는데, 동행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름길을 택하여 지나갈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즉, 안식일에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도를 전한답시고 돌아다니면서 밀 이삭까지 잘라 먹는다는 것은 한 주일에 6일은 일하고, 7일째 쉬라는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주의자들로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지키고 있었는데,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가 그렇게 멋대로 놀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은 다윗이 시장할 때 자기와 동행하던 자들과 함께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고 성경을 들어 반박하였습니다. 그냥 말하면 예수가 머릿속에서 생각하여 하는 말이라고 생각할까 봐 다윗의 고사(古事)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 고사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즉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능력으로 골리앗을 쳐 죽인 다음, 사울 왕의 뒤를 잇게 되어 있었으나,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사울이 죽이고자 하니 다윗이 측근들과 함께 도망쳤습니다.


 다윗이 놉이라는 곳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좀 달라고 간청하자, 그때 아히멜렉에게는 거룩한 날에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는 떡밖에는 없었으나, 다윗과 그 일행이 다 정결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그 거룩한 떡을 먹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또 그 일행이 정결한 자이기 때문에 제사장밖에 먹지 못하는 음식을 먹은 것이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인 주님이 안식일에 하나님의 도를 전하고 제자들과 함께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이 어찌 죄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일손을 멈추게 되어 있는 안식일에도 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제사 드리는 일은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주님은 아울러 지적하였습니다.(마12:5) 즉 제사 드리는 것 자체가 제사장의 일인데, 그들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제사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나도 7일째 되는날에 쉬었으니 너희도 쉬어라.” 하고 명령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 날 아침저녁으로 제사 지내는 것이 직분인 제사장이 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자기 개인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는 율법의 원리에 대하여 타이른 것입니다. 사실 이 원리를 모르면 무엇이 어찌하여 죄가 되고 안 되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너희가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라.” ― 이것이 율법일진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안식일에 하더라도 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을 벗어날 수 있어야 참으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율법을 폐지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러 왔다.”(마5:17)고 하였습니다. 즉 주님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 온전한 ‘자유의 율법’을 세운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성전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제사장이나 다윗보다도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즉 다윗이나 제사장이 율법을 범하여도 죄가 안 되는데, 이들보다 더 큰 내가 율법을 범했다고 죄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당연히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율법 위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마12:8) 그러니까 안식일이 주님을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이 주님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칠 때,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가리켜 마귀의 왕초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하는 짓이라고 꼬집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마귀가 어떻게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느냐?”(막3:23)고 반박하였습니다. 오늘날 이영수의 손길을 통하여 악령이 소탕되어 가는 모습을 여러분은 눈으로 분명히 보았을 것입니다. 


 내가 도깨비라는 욕을 먹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마12:31-32)고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이 말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는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육적으로는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통념(通念)과는 달리, 주님 당시에는 요셉의 아들이라는 관념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가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으므로 그렇게 아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는 실은 탄생부터가 위에서 말한 이중성(二重性)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30년의 사생활을 마치시고 성령을 받아 여호와의 도를 전하는 공생활을 시작하였을 때, 그를 가리켜 어떤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여 두 파로 갈라졌던 것입니다.


 예수라고 부르는 것은 육적인 호칭이요,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라고 부르는 것은 영적인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전자는 육에 속하게 되고, 후자는 영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입에서 오묘한 말씀이 터져 나오고, 벙어리가 말하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등 희한한 권능을 행사하게 되자 어리둥절한 사람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 예수가 아니냐. 어제까지 목수 노릇하던 사람이 병을 고치다니, 저 사람 언제 이런 재주를 다 배웠어. 혹시 요술이라도 부리는 거 아닌가?”


 이것은 분명히 이들의 불찰입니다. 설사 어제까지는 대패질과 못질에 골몰하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늘 그 입과 그 손에서 큰 권능이 나타나면 그를 달리 보고, 적어도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을 해야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 인간 예수를 비방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곧 주님이 말씀하신 ‘인자를 거역하는’ 것입니다.(마12:32)


 그런데 이와는 달리 “그 사람의 말과 행실이 아무래도 우리가 전에 알고 있던 예수는 아니더라.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큰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겠나.” ―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바리새인처럼, “저 사람 사귀가 들렸다. 바알세불을 힘입어 저런 이적을 행한다.”(마12:24)고 비방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곧 성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거역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 “사귀의 장난이다.” 하고 주님을 비방한 것은 바리새교인 중에서도 영의 역사가 무엇인지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은 죄 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으로 지은 죄가 아니라, 영으로 지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그는 송두리째 악령의 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편,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안찰을 해 보면, 당사자는 별로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까무러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악 세상을 돌아다니다가 마귀에게 단단히 사로잡힌 것입니다. 본인은 이것을 모릅니다. 그는 여전히 열심히 기도하고 주의 일에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내 손이 닿기가 무섭게 그 악령에게 여호와의 영, 즉 큰 적대 세력에 부딪혀 놈이 박살을 당하기 때문에 그 여파가 육체에 미쳐 까무러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예배를 볼 적에 성령을 훼방합니다.


 그런 사람이 함께 앉아 예배를 볼 때에는 그 대항하는 세력이 예배 인도자에게 미쳐 감각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그 악령의 갈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가 아무리 열심히 주를 섬겨도 가는 길은 뻔합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그 악령의 조종을 받다가 끝내는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악령에 씌운 사람이 놈을 몰아내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주를 천만 번 불러도, 철야 기도를 몇 십 년 하여도 안되는 것입니다. 놈의 힘이 그의 믿음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놈을 내쫓을 수 있는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놈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큰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강한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벧전5:8) 오늘날, 신령한 목자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덮어놓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당에 갈 줄 알았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악령의 세력은 몇 년 전보다도 열 배나 강합니다. 그러므로 과거 식으로 해서는 도저히 이 악의 세력을 소탕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 계교는 제갈량이 만 명 있어도 못 당합니다.


 무엇보다도 한심스러운 것은 은혜가 충만하던 곳에 찬바람이 일면서 냉랭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손을 쓰셔야 하고, 또 손을 쓰시게 됩니다. 그대로 두면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영수가 오늘날 단상을 통하여 죄를 씻어 주고 악령을 내쫓는고로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는 할 수도 없거니와, 또 해서도 안됩니다. 왜? 지옥의 맨 밑바닥에 떨어지는 큰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여러분, 세상에 어떤 바보가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이 무슨 역사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긴가민가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이 역사가 무엇이라는 것을 이 사람을 통하여 여러분이 알고도 남을 만큼 일깨워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또 피부로 느꼈을 것입니다. 이영수를 통하여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과거의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내리던 것과는 강도(强度)가 다릅니다. 이것은 여러분 각자가 체험하여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 나오기 시작한 두 달 전의 여러분의 심정과 오늘의 심령을 비교해 보면 잘 알 것입니다. 즉 두 달 전에 비해 여러분이 주님에게 얼마나 더 가까이 갔느냐, 요컨대 이것이 척도가 됩니다. 


 남이야 뭐라 하건, 나와 주님의 거리가 한결 좁혀진 것을 뚜렷이 느끼면 그것으로 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면 이영수는 일찌감치 보따리를 싸야 할 것입니다.


 나는 방금 이 보잘것없는 이영수를 통하여 과거의 어느 주의 종들보다도 강한 은혜가 내린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 저마다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늘의 은사가 달라지면 이에 따르는 법도, 다시 말해서 마귀와 싸우는 방도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앞으로 죄가 두려워 도망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죄악 세상에서 도망치면 어디로 갈 겁니까? 땅 속에 들어갈 겁니까, 하늘로 날아오를 겁니까? 땅 속에도, 하늘 공중에도, 마귀가 진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강하게 역사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 정도의 은사가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무서워 도망칠 것이 아니라, 죄가 여러분이 무서워 도망칠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마귀가 여러분에게 같이하시는 성령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을 하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험악한 세상에 주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여호와의 역사가 바야흐로 시작된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보고 도망칠 때 우리는 ‘이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마귀가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이 말씀이 응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방법과 세상을 사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어디 가든지 마귀에게 침범당하지 않을 만큼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 정도로 죄를 이길 수 있게 되면 살다가 세상을 떠나도 마지막 영의 싸움에 의(義)의 군병으로서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이야기가 귀에 거슬리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하루 속히 ‘듣는 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