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DATE. 2020.10.14본문
Part 02. 성령의 검을 차고
Chapter 16. 할례(割禮)에 대하여(1)
1) 첫째 언약
오늘은 할례에 대하여 상세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동안 할례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아무도 밝히 드러내지 못하여,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여호와가 무엇 때문에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할례를 명령했으며, 그것이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 숨은 여호와의 뜻과 영적인 기능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할례는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의 언약으로, 모세의 10계명보다도 더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피로 맺은 언약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최초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노아나 에녹과 같은 당신의 사람에 대하여도 언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할례 받기 전의 인류의 생활은 어떠했을까요?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죄짓기 전에 살던 에덴동산은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생명수가 흘러넘치는 낙원이었습니다.
이들이 죄를 지어 쫓겨난 후에 살게 된 인간의 세계가 바로 이 땅덩어리입니다. 이들이 쫓겨나던 당시의 환경은 우리와 다릅니다. 또 이들의 육신은 물론 모든 사고방식(思考方式)이나 생활양식도 오늘의 우리와는 판이합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50년 전이나 500년 전 혹은 1,000년 전 조상들의 생활 풍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10년 전만 해도 가령 여자들은 맘보바지가 유행되었지만 지금은 나팔바지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500년 전 이순신 장군이나 다른 장수들이 쓰던 검은 엄청나게 크고 무거워 오늘의 국군 장성들에게 갖다 주면 잘 들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당시의 장수들은 일반적으로 그만큼 우리보다 육신이 건장했습니다. 대체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육신이 더 건장한 대신 두뇌는 발달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그만큼 문명이 뒤떨어져 사람들은 대체로 먹고 자는 것이 일이었으며, 이들 장수도 자연히 환경의 지배를 받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즉 율법으로 그들의 언동을 단속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서울엔 지하철 공사가 한창입니다. 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노동력을 동원하여 이토록 번거롭게 두더지처럼 땅을 파서 굳이 철로를 놓아야 합니까? 만일 서울 바닥에 여기저기 드문드문 사람들이 산다면 굳이 이런 번잡한 공사를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은 오늘의 우리 사회와는 모든 생활 여건에서 큰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자 먼저 대적해 온 것은 짐승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짐승들 역시 사람과 마찬가지로 덩치가 한결 크고 성미도 더 사나웠습니다.
성경에서 창세기는 아득한 옛날 일을 기록한 것이고, 요한계시록은 먼 장래의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만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옛날 일을 대충 보여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잡다단한 과거의 일을 일일이 다 기록하려면 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어떤 광경은 아무리 선명히 보여 주고 가르쳐 주어도 모세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성질의 것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명이 그만큼 뒤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것 몇 가지만 기록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기록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대(年代)만 하더라도 1년이 열두 달, 365일이라는 것이 확정되어 있지 않던 태고의 일들은 추측에 의해 산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이자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의 피소리가 땅에서 내게 호소한다.”(창4:10)고 말씀하고, “땅에서 저주를 받고 유리방황하는 자가 되리라.”고 일렀을 때, 가인은 여호와에게 “주께서 나를 이 땅에서 쫓아내니 내가 유리하는 자가 되겠으며,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일 것입니다.”(창4:14)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의 자손 이 외에 사람들이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여호와께서 이런 가외 인간들에 대하여 언급을 피했을 뿐입니다.
실로 인류의 기원은 수만 년에 이르고 있으며, 다만 여호와께서 인간을 통하여 마귀와 싸운 역사가 6천 년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규모를 갖추어 마귀와 싸우기 시작한 것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후의 일입니다. 이때부터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내세워 본격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입니다.
아담 이후 먼 우리 조상들은 한동안 미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이들을 보호하여 오랜 장수를 누리게 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들로 아내를 삼았습니다.(창6:2-3) 이들이 지나치게 육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여호와의 신이 이들과 함께하지 않고 이들의 수명을 120년으로 감소시켰습니다.
그래도 저들은 뉘우칠 줄 모르고 죄악의 도가니에 빠져 들어가므로, 할 수 없이 홍수로 쓸어버리고, 의인 노아의 자손을 여호와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의롭게 살게 하여 영광을 받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또다시 죄악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내세워 피의 언약을 하신 것이 곧 할례입니다.
할례란 현대 의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포경 수술’입니다. 즉 남자의 중요한 기관(器官)의 일부를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육신에 칼을 대므로 자연히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피의 언약’이란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여자와 무관합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여자는 남자를 섬기게끔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남녀평등을 부르짖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격(人格)상의 평등이지, 기능(機能)상의 그것은 아닙니다.
저간의 소식을 성경은, “남자의 갈비뼈를 하나 떼어 내어 여자를 지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자는 그 기능 면에서 남자를 위해 지음을 받아 남자를 섬기게 하려는 것이 여호와의 본래의 뜻이었습니다. 피의 언약, 즉 할례를 남자들에게만 국한시킨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주님 당시만 해도 약이라야 몰약을 비롯한 몇 가지 민간약이 있을 정도였으므로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의술이 전혀 발달되지 못하여 맹장에 걸려도 꼼짝 못하고 죽어 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시절에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위험천만한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만일 부싯돌로 된 칼을 댄 자리가 덧나기라도 하면 곪고, 곪으면 매우 처치곤란이었던 것입니다.
왜 여호와께서는 이런 명령을 아브라함에게 내렸을까요?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내세워 깨끗한 혈통을 유지하도록 하여 후대에 당신의 독생자가 태어나게 하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당신의 일을 예정하셨기 때문에 예언자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 할 것을 지시한 것은 그가 아흔 아홉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즉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들 사이에 세워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겠다.”(창17:8)고 말씀하시고,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 너희 중에 남자는 할례를 받으라.
… 이것이 너와 너의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陽皮)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17:9-11)고 하셨습니다.
할례는 실로 여호와와 인간 사이에 공식적으로 맺어진 피의 언약으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 할례를 받아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머슴까지도 할례를 받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한 지붕 밑에서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99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이 지시를 받고 몸소 자기 양피를 베어 냈으며, 다음에는 그와 여종 사이에 태어난, 열세 살 된 이스마엘의 양피를 베고, 이어서 가족들, 심지어 머슴들까지도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이 이스마엘이 오늘날 석유 파동을 일으키고 있는 아랍 국민의 조상입니다.
이때는 처음으로 할례를 시작하게 되어 부득이 성인이 되어 할례를 받느라고 상당한 아픔과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출생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때는 양피도 연하여 고통이 가장 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제8일은 동물을 여호와에게 제물로 드리기에 제일 적합한 날이기도 합니다.(출22:30) 이와 같은 하늘의 법도에 따라 예수께서도 탄생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던 것입니다.(눅2:21)
2) 피의 언약
성경에는 할례에 대하여 기록한 대목이 많습니다. 여호와께서 인간과 교류하는 언약 중의 언약이 곧 할례라는 말씀은 앞에서도 했지만, 그럼 무엇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런 언약을 하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여호와께서 왜 이토록 인간에게 관심을 두실까요? 그 이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인간을 지으신 것은 어둠을 물리치고 영광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사43:7) 그런데 그 인간이 죄에 떨어져 마귀의 소유가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죄 가운데서 다시 건져 내기 위해 여러 모로 손을 썼던 것입니다.
즉 천사를 시켜 아직 미개한 그들을 슬기롭게 인도하게 하고, 또는 이상(異象)을 보여 주는 가운데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 그 여호와의 자녀들로 하여금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오랜 수명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인구가 많이 번식하면서 지각이 발달하게 되자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여 그 자녀들에게 은혜를 주실 것을 언약하였는데, 그 육적인 인(印)침이 곧 할례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아무에게나 무조건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백성을 특별히 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할례를 받은 민족에게 성신이 역사하여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란 쉽게 말해서 “내가 너희들에게 은총을 베풀 테니, 너희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일부를 베어 나에게 바치고, 피로써 나와 언약을 맺자.”는 여호와의 요구였습니다. 마음과 뼛속까지도 살피시는 여호와지만 구약시대에는 이와 같이 육적으로 역사하였으며, 이들 역시 육적으로 여호와에게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신앙도 신앙이지만 육적으로 건강하고 정결하여 흠이 없기를 원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종들이 여호와를 기쁘게 해 드리려면 이 조건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였으므로 마귀도 육적으로 침범하여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이 할례를 중요시한 이유도 이러한 사실에서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이 할례를 소홀히 하여 한 집안에 머슴 하나라도 할례를 받지 않은 자가 있으면 그 집안은 여호와의 진노를 받게 마련이었습니다.(창17:14) 그런데 모세 때에 와서 이 할례에 공백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즉 여호와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종노릇 할 때에 그들의 호소를 여호와께서 듣고, 80세 된 모세에게 당신의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구출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4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에서 유랑민의 천막생활을 하면서 악전고투하던 시기는 의약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때이므로 할례를 바치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할례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이면 할례로 인한 상처쯤은 한 주일이면 거뜬히 낫겠지만, 당시에는 덧나면 한두 달씩 가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 일을 시작한 무렵에는 이스라엘 민족은 저마다 할례를 이미 받았지만, 시일이 10년, 20년 지나감에 따라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가운데는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위 환경의 여하를 막론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거느리는 이스라엘 민족 중에 이처럼 할례를 받지 못한 무리가 날로 늘어간 것은 모세의 불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죄과였던 것입니다.
할례는 여호와와 인간 사이의 언약의 표시로, 그것은 율법 이전의 것입니다. 즉 할례로 하나님의 백성을 정해 놓고 나서 그 백성들이 지킬 율법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이 미국 시민권을 먼저 얻은 연후에 미국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미국 법률이 적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그와 그 자손에게 할례를 바쳐서 여호와의 백성을 만든 다음에, 모세를 통하여 이들이 지킬 율법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할례의 조상이라고 한다면 모세는 율법의 조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의 생활을 하며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오면서 할례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계자 여호수아는 할례 산에서 집단적으로 할례를 실시하였습니다. 40년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수5:2)고 지시하였던 것입니다.
3) 복된 언약
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인간을 멸했다가는 다시 살리고, 다시 살려서는 언약을 맺고 법도를 주시는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실까요? 그것은 여호와께서 태초에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신학에서 소위 ‘예정론’에 대하여 논란이 많지만, 성경에 말하는 예정이란 여호와의 뜻을 미리 예정했다는 의미이지, 구체적인 개인, 그러니까 이 서방, 박 서방을 미리 구원하기로 예정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칼뱅의 ‘절대예정설’ 같은 것도 그가 예정을 육적으로 해석한 데서 그런 오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와 역사를 어디까지나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성령과 악령의 투쟁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깊은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성령을 충만히 받지 않고서는 말씀을 깊이 쪼갤 수 없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여호와는 태초에 인간을 당신의 형상과 똑같이 지었습니다. 즉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곧 부활하신 주님은 됨됨이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는 당신 아닌 제3의 당신, 즉 분신(分身)들이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백성들이 사는 당신의 나라가 이룩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 마귀가 그냥 두지 않고 자기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회복하려는 여호와의 경륜을 기록한 것이 곧 성경 66권의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도 마귀라는 만만치 않은 강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더디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 계획, 다시 말해서 마귀와의 투쟁에서 전술이 바뀌기도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는 결국 하나님의 것이 되게 마련이지만, 그 과정에 진퇴와 기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 놓으신 인간을 마귀가 건드릴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마귀의 싸움에서 하나님은 ‘만세 전에 정한 비밀’을 갖고 있습니다.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싸움에 여호와가 예정한 세 단계가 있다는 말씀은 전에 전하였으므로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오늘날은 이미 그 첫 단계인 구약시대를 지나, 여호와께서 인간의 혼을 두고 마귀와 싸우는 신약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려면 인간을 통해야 하기 때문에 여호와에게는 인간이 매우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인간에게 사사건건 그토록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세상 싸움에서도 적의 정체를 알기 위해 간첩을 파견합니다. 싸움에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악령의 싸움에 있어서도 이치는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영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마귀가 침범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원통한 일이지만, 한편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은 마귀가 움직이는 비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호와가 인간을 당신 형상대로 짓지 않았던들 마귀는 인간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마귀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전술상 여호와에게 매우 불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악령의 세 번째 전쟁, 즉 영적 전쟁 때에 여호와께서 마귀를 무저갱 속에서 모두 밖으로 유도해 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여호와와 마귀의 싸움 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척후병(斥候兵)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없으면 여호와는 이 싸움을 유리하게 치를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과 마귀의 1차전에서 아브라함이 육적 싸움의 조상이 되고 모세가 그 율법(십계명)을 완성한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과 마귀의 2차전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인간의 혼과 여호와의 성령이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영적 싸움의 조상이 되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긴자가 모세와 같은 권능으로 그 율법(자유 율법)을 완성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둔 옛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집에서는 할례를 위해 부싯돌로 만든 칼을 따로 마련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집안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8일째 되는 날에 할례를 바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감각이 아직 덜 발달된 무렵에 비교적 고통을 덜 느끼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날짜를 8일 만에 하라고 정한 것은 당시에 남자가 태어나면 7일 동안, 여자가 태어나면 15일 동안 여자가 월경이 있을 때처럼 부정하게 간주하여 하나님과 교류할 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처럼 부정한 것을 외면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도 몸에 상처를 입었거나 송장 같은 것을 만졌을 경우에는 제사 드리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아무튼 당시에는 복을 받는 비결의 하나가 이 할례를 잘 지키는 데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혼인도 할례 받은 자 이 외에는 성립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이방인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섞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여호와의 뜻이기도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이렇게 당신의 백성이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도 혈통을 존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밖에 이스라엘과 우리 한국은 국민성이나 풍습이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예컨대 농부가 소 두 마리를 동시에 부려 밭을 갈고, 타작마당에서 도리깨질을 한다거나, 아낙네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맷돌질을 하는 따위가 그렇고, 죽은 자에게 베옷을 입혀 장사지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그나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열도가 가장 높은 데가 우리 한국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동방의 땅 모퉁이 나라에 이긴자를 세우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