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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0.21본문
Part 02. 성령의 검을 차고
Chapter 17. 할례에 대하여(2)
1) 할례와 율법
이 할례의 영적인 의미와 그 중요성에 대하여 지금까지 터뜨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또 그 성경적인 중요성도 이해하고 있지만, 할례에 대해서는 이름만 들었지 잘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 할례는 모세의 율법 못지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피의 언약을 표시하며, 할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여호와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은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도로, 다른 이방인들은 이 법도를 지키건 말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백성이 지켜야 할 도덕이 곧 모세의 율법입니다. 할례와 모세의 율법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모세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만일 할례 받은 백성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에 호적을 둔 백성이 한국 법률을 지키지 않으면 감옥을 면할 길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는 모세가 태어나기 약 700년 전부터 실시해 왔으므로 그동안 할례만으로 하나님의 백성 행세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 때에 와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법도를 준 후로는 할례와 율법 두 가지를 다 지켜야 했습니다. 조건이 그만큼 까다로워진 것입니다. 모세 때에는 어지간히 지각이 들어 10계명쯤 능히 지킬 수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심령들을 율법으로 다스릴 필요를 느끼신 것입니다.
그 후 주님 때에 와서 새 율법, 즉 자유의 율법을 주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하여 보다 더 큰 여호와의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즉 구약시대에는 매일 드리는 제사로 자범죄밖에 사함을 받지 못하였는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자범죄뿐만 아니라 원죄와 유전죄도 주의 피로 씻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원죄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를 말하는 것이요, 유전죄란 조상들이 지은 죄가 우리들의 몸에 흐르는 피를 혼탁케 하면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죄이며, 자범죄(自犯罪)란 문자 그대로 자신들이 세상에 태어나 지은 모든 죄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수천 년 동안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지켜 오던 이 할례를 바울이 폐지시켰습니다. 물론 이것은 바울이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지시에 따라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럼, 주님은 왜 당신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켜 온 할례를 바울을 통하여 폐지시켰을까요?
바울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여호와의 큰 종으로, 당시로 말하면 매우 어려운 사명을 무난히 완수하였습니다. 주께서 바울을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직접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러 쓰신 후로 하늘에서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중대한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즉 일찍이 주께서 세상에서 3년 동안 전하신 말씀의 일부를 시정했던 것입니다. 할례와 모세 율법의 폐지가 그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와 같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지상의 움직임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경륜 가운데는 예정한 계획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세 여하에 따라 변동이 따르며, 따라서 절대 예정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하늘의 원리를 모르면 성경을 이해하는 데 혼선을 빚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이할 때 언제나 마귀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주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이 세대가 가기 전에 하늘에 올라갔다가 다시 오마.”(마16:28)고 약속하시고, “그를 찌른 자도 보게 된다.”(계1:7)고 하신 말씀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기된 이유도 거기 있는 것입니다.
당초에 주님의 계획은 베드로를 통하여 인류 역사의 종말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당시부터 말세 운운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하여 ‘만유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다는 것은 그에게 ‘천국열쇠를 맡긴’(마16:19)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큰 사명을 맡았기 때문에 말 한마디로 성신을 거스른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즉석에서 쓰러지게 했으며,(행5:1-11) 말세를 증거하여(행2:14 이하) 하루에 3,000명을 주님에게로 이끄는 큰 성신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순절에 받은 불의 성신이 베드로와 함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한 증거의 성신이라 하더라도 당시에는 오늘의 세 증거의 성신 못지않은 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잘만 했으면 베드로가 역사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빛의 세계를 맞이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불의 성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그것은 별로 맥을 쓰지 못합니다.
근년에 우리나라에도 불의 성신을 받은 목회자나 성도들이 있었으나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긴자를 통하여 이루는 이곳에서 물과 불과 피의 세 증거의 성신을 주어서 역사하는 이유도 위에서 한 내 말에서 잘 이해가 갈 줄 압니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입김과 손길에 일찍이 어떤 하나님의 종보다도 더 큰 권능이 임하게 된 것도 다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등장하게 된 것은 이방 전도를 위해서였습니다. 설사 바울이 주님과는 원수가 되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서기는 했지만, 젊고 유식하고 패기 있는 그를 들어 쓰시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에 가는 도중에 주께서 직접 육성으로 “사울아!” 하고 불러 당신의 사람을 만든 후에 이방 전도의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2) 베드로와 바울의 대립
그런데 막상 이방인에게 주의 도를 전하려고 하니 큰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할례였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을 주의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해도 난사 중의 난사인데, 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처럼 양피 가죽을 베어 피를 내라고 강요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할례를 폐지시킨 것입니다.
아니 바울이 폐지시킨 것이라기보다 하늘에서 그렇게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대저 표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인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인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儀文)에 있지 않다.”(롬2:28-29) 이것이 바울의 주장이었습니다.
즉 할례란 마음에 할 일이지, 형식적으로 양피만 베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바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몇 안 되고, 많은 율법주의자들이 펄쩍 뛰면서 심지어 이단으로 몰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수천 년 이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유일한 증거요, 주님과 세례 요한도 받은 할례를 바울이 폐지하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바울에게 음으로 양으로 중상과 모략과 핍박이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제까지도 주를 믿는 성도를 잡아 죽이려고 날뛰던 자가 웬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실상 할례란 육에 인치는 것으로, 마음에 인치는 성령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만일 바울의 주장이 온전치 못한 것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얼마 못 가서 고꾸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이방 전도를 위한 사도 바울이 없었던들 우리도 예수를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만 할례를 폐지시키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폐지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반드시 그에 대치될 새것이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곧 성령이며, 성령은 할례가 육에 인치는 것과는 달리, 우리 마음과 생각에 인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율법이 달라집니다.
즉 할례 받은 백성은 육의 율법인 10계명을 준수하지만, 성신을 받은 자는 영의 자유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는 할례에 대하여 견해 차이와 갈등이 생겼을까요? 여호와께서 베드로와 바울에게 준 성신은 같지만, 사명과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베드로를 통하여 죄악 세상에 종지부를 찍는 사명을 다할 수 있었던들, 바울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종 바울이 나타났다는 것은 하늘에서 계획을 변경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설사 성령이 충만하더라도, 새로운 지시는 가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 새로운 지시는 새로운 사명을 맡은 당사자만 알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미 앞선 하나님의 종에게는 알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따라서 앞선 하나님의 종은 나중 종이 어떤 사명을 맡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앞선 종의 사명을 다 알게 됩니다. 모르고서는 일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당신의 사람을 들어 쓰시는 원칙입니다. 당시에 바울은 자기가 당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덤덤히 자기 일만 하고 상대방을 꼬집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서히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을 왕창 벌이면 부작용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3) 고전(苦戰)하는 바울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의 음성으로 부름을 받은 후, 그때까지 주님의 원수가 되어 움직이던 그는 자기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는 동시에, 지난날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똥으로 여겨 내동댕이치고 새로운 믿음을 찾아 움직였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할례를 폐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실은 여러 낮과 밤을 두고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바울이 처한 여건이 너무나 불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는 어제까지만 하여도 주님을 믿는 자들을 모조리 올가미에 걸어 죽여 버리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자요, 이러한 자기가 갑자기 나타나 수천 년 이래로 대대손손 지켜 온 하나님의 법도를 폐지하는 사명을 맡았으니 말입니다.
설사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아 가지고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걸 누가 알아주며, 알아준다 하더라도 누가 인정해 줄 것인가, 또 이에 따르는 공격의 화살은 얼마나 날카로울 것인가, 등등의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아, 사명은 무겁고 일은 난감한 나머지 바울은 잠자리에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날을 새기가 일쑤였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물론 특별한 여호와의 은사와 가호가 있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가 이 사명을 실제로 이루려는 마당에서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한편 하늘에서도 이런 바울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과분한 사명을 맡긴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예뻐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자니 당시의 처지로는 그나마 바울을 택하는 것이 상책이었던 것입니다. 또 바울은 그릇이 능히 그 사명을 완수할 만하였습니다. 바울은 일이 어렵다고 해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때 바울이 주님의 지시를, “아이고, 나는 못하겠습니다.” 하고 물러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도 그때는 부득이 딴 방도를 강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행15:1-2)
여기 기록된 ‘어떤 사람들’이란, 초대교회 당시에 주님을 증거하던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호한 표현을 한 것은 같은 믿음의 형제끼리 벌인 언쟁을 되도록 가볍게 다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고 또 여호와의 법도에 따라 할례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이들은 어찌하여 유대로부터 바울이 전도하는 현장으로 내려왔을까요? 바울과 바나바가 딴 교리를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훼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도들에게 이구동성으로 “할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들과 바울 및 바나바 사이에는 큰 변론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님의 말씀과 연결시켜 “신약시대는 형식적인 육의 할례로 인침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주님이 지시하신 바라고 목이 아프도록 외쳤으나, 그들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바울이 안드레나 야고보 같은 주님의 제자의 한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주님과는 원수가 되어 움직이던 자가 ‘주님의 지시’ 운운하고 뚱딴지같은 가르침을 퍼뜨리니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대로 할례 받고 율법을 지키니 성령이 임했는데 그게 될 말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이렇게 나올 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눈도 깜짝하지 않고 계속 참된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신도들 중에는 바울의 말을 시인하는 사람도 있고 부인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양쪽 말을 들어 보니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어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다못해 바울을 비롯해, 바나바나 몇몇 바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어 어느 쪽이 옳은지 판가름을 내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와 장로들을 만나, 할례를 폐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역설하였고, 바리새인 중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사람이 대표적으로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장하였습니다.(행15:1-5)
4) 주의 종이 가는 길
바울은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습니다. 하늘의 지시를 따르자 니 땅에서 가로막고, 땅의 일에 동조하면 하늘의 일이 틀어지는 판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포기하고 주저앉으면 그것으로 일은 끝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슬기롭게 움직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유대인 모친과 헬라인 부친 사이에 태어난 제자 디모데를 데리고 전도 여행을 떠날 때 손수 그에게 할례를 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이 성도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해야겠고, 할 수 없이 형식적이나마 할례를 바쳤던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디모데를 아무도 여호와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이 바울은 눈 딱 감고 방편상 이런 형식적인 절차를 마쳤던 것입니다. “뱀같이 지혜로우라.”(마10:16)는 주님의 말씀은 이를 두고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바울이 이것을 해낼 그릇이 못 된다면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혼란기를 바로잡아 정돈시키려면 비범한 재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주님은 이와 같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바울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았습니다. 수시로 이상 중에 나타나 “담대하라.”고 격려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도를 전할 때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기도 했습니다.(행16:14) 그리하여 바울은 한 사람, 두 사람, 야금야금 여호와의 새로운 법도를 증거하여 지지자를 늘려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바울을 비방하고 공박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가 믿음의 형제들의 추태를 되도록 드러내지 않기 위해 성경에는 소상히 기록하지 않았으나, 바울은 갖은 욕을 먹었던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새로운 법도가 그 종의 입을 통하여 터져 나오면 으레 잠잠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이 바울에게 어떤 욕설을 퍼부었는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사태가 이쯤 벌어지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일찍이 강하게 역사하던 그들에게서 성령을 갑자기 거두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거둬 버리면, 그들을 따르던 자들 사이에 큰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한쪽은 차츰 약하게 역사하시고 한쪽은 날로 강하게 역사하면서 차츰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사도들의 입에서 새로운 말이 나가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통하여 땅에서 역사하시는 원리이며, 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한편 하나님을 등에 업은 바울은 꾸준히 전도의 기반을 닦아 갔습니다. 그리하여 상당한 지지 세력을 얻기까지는 십오륙 년이라는 꽤 긴 세월이 걸렸던 것입니다. 그동안에 바울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조금씩 드러내는가 하면,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등 적지 않은 제약을 받아 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반도 얻지 못하였는데 주님의 지시라고 해서 함부로 마구 터뜨리면 완전히 매장되어 다시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여러 해를 은인자중해 오다가 어느 정도 지지자를 확보한 연후에 감춰진 비밀을 백일하에 드러내면서 강력히 외쳤던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심령에 있고 의문(儀文)에 있지 않다.”(롬2:29)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라.”(고전7:19) 등등의 외침이 그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천사도 자기가 전한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외치게 되었습니다.(갈1:8)
그 복음은 그리스도의 지시였기 때문입니다.(갈1:12) 여호와께서 이 부족한 사람에게, “우선 큰 은혜를 받았다가 떨어뜨린 자부터 건지라.”는 지시를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를 에워싸고 바리새파 유대인들과 바울 및 그 추종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란과 소동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미리 이런 혼란을 방지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종 한 사람을 들어 쓰시며, 앞선 당신의 종이 뜻을 이루지 못하여 새로운 종을 세우면 그에게만 지시를 내리는 것이 하나의 행동 원칙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맡기고 성령으로 역사하실 때 베드로는 하루에 무려 3,000명을 회개시켰으나 바울은 고작해야 여남은 명 정도밖에 진리 가운데 이끌어 들이지 못했습니다.(행19:7) 바울이 할례를 폐지시키는 새로운 법도는 이토록 난항(難航)을 거듭하였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내가 할례를 전했던들 왜 핍박을 받았겠는가?”(갈5:11)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 폐지는 이방 전도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길이 막혀 있던 그들에게 할례의 고통도 받지 않고 구원을 얻는 길이 열렸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할례 폐지 과정은 유대교 출신자들의 방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결코 주님의 지시를 망각하고 쉬운 길을 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주의 종이 가는 길입니다. 그는 첫째 하나님을 위하고 다음에는 자기를 따르는 성도들을 위해 어떠한 괴로움도 달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5)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다
하루는 베드로가 식사를 하기 전에 잠깐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더니 그릇 하나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그릇은 큰 보자기 같았는데, 네 귀를 메어 땅에 드리웠고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고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행10:12-13)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깨끗하지않고 속된 것이라 나는 먹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여호와께서 다시 “깨끗하게 한 것이니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꺼림칙하여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겠노라고 우겼더니, 또 하늘에서 그런 짐승들이 담긴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고, 여호와께서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기를 세 번, 그때서야 보자기는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 이상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맞아들이라는 성령의 지시가 있으므로,(행10:19-20) 이들 이방인을 따라가서 할례를 받지 않은 고넬료라는 사람을 서슴지 않고 만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로서는 획기적인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란 모세의 율법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가리키며 ‘속되고 깨끗하지 못한 물건을 먹지 않았다.’는 것은 할례의 법도와 모세 율법 아래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베드로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과 교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금계(禁戒)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로 ‘이방인도 깨끗하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하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인 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않고 왔노라.”(행10:28-29) 이후로 베드로는 이방에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훗날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율법주의자들 사이의 논란이 있은 후 비로소 사도들도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말 것을 결의하였습니다.(행15장 참조) 그리고 이때를 전후하여 이미 바울의 주장이 어지간히 받아들여져 말발이 서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실로 10여 년의 긴 세월이 흘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게바’라고 하나님이 주신 칭호로 깍듯이 존대해 온 과거와는 달리, 베드로의 소행이 바울의 눈에 거슬리면 책망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바울과 베드로의 위치가 바뀐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바울의 등 뒤에는 언제나 주께서 동행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이런 일 때문이었습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할례와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야고보의 추종자들이 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를 같이한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도망쳐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바나바도 끼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고 실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무할례자인 이방인과 함께 회식하여도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견지에서, 즉 바울의 주장에 동조하여 이방인과 어울렸으면 야고보의 추종자들에게도 떳떳이 자기 소신을 밝힐 일이지,
자리를 같이한 자들과 함께 율법주의자들 보기가 면구스러워 도망을 친다는 것은 대 사도인 베드로의 취할 바 태도가 아니며, 그가 얼마나 줏대 없는 사람인가를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 장본인의 입장으로는 자기 위신을 먼저 생각한 처사였겠지만, 요컨대 그는 이 정도로 믿음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바울을 따르던 바나바까지도 덩달아 베드로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고 바울은 기가 막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를 사람들 앞에 불러 세우고 책망하였습니다. “당신이 유대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할 수 있겠소!”(갈2:14) 즉 당신의 행실이 그렇게 표리부동해 가지고 어떻게 이방인을 믿음 가운데 이끌어 들일 수 있겠소 ― 하는 책망이었습니다.
당초에는 사도라는 칭호도 얻지 못한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12사도보다도 더 크다.”(고후12:11)고 한 말이 어떤 동기에서 나왔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새로운 하늘의 법도를 주신 후로 베드로를 비롯한 12사도들에게 달리 지시를 주지 않고 은혜를 서서히 거두어들였던 것입니다.
6) 율법과 은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메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와 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蒙學先生)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3:23-25)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명입니다.
할례와 동시에 모세의 율법도 정식으로 폐지시킨 분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이것은 할례를 일단 폐지시키면 자연히 뒤따라야 할 일이었지만, 막상 수천 년 동안이나 지켜 오던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하루에 뒤엎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처음에 이 막중한 사명을 마칠 수 있는 그릇을 12사도들 중에서 물색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120문도들 가운데서 찾았던 것입니다. 당신이 성령을 충만히 부어 준 이들 중에서 택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처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심하게 찾아보아도 바울만 한 그릇이 없는 고로 할 수 없이 바울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따르는 번거로움과 애로는 물론 주님께서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번거로움이란 주님의 성령으로 바울에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바울과 접촉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주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이 직접 그에게 나타나셔서 육성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애로란, 바울이 당시에 주님을 대적하여 기독교인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으므로 그의 말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좀처럼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로서는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자마자 부딪치는 장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런 번거로움과 애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바울을 택한 것은 결코 바울이 예뻐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한 부득이한 조처였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일은 너무나 벅차 얌전히만 자란 성도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모세)이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3:24)이라고 하였습니다. 몽학선생이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령 내가 A라는 고명한 박사를 만나야 할 일이 있는데, 직접 안면이 없으므로 A박사를 잘 아는 B선생을 중간에 넣어서 선이 닿게 했다고 칩시다.
이 경우에 B선생이 애꾸눈이건 절름발이건 관계없습니다. 나는 다만 이 B선생을 길잡이로 해서 그의 뒤를 따라가 A박사와 접선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일단 A박사와 나 사이에 초대면 인사를 나누고 나면 나에게 B선생은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모세 율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A박사라면 율법은 B선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게 되어 주님과 영적인 교류를 시작하면 모세의 율법은 불필요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모세의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해서 아주 폐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온전한 ‘자유의 율법’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성도를 죽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이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가령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물론 이방인으로 무할례자이지만 그녀는 성령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율법주의자들이 할례 받지 않는 자는 성령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하나님의 자손이 아니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교회에서 설교했다면 그녀는 실망하여 곧 은혜를 등지고 말 것입니다. 즉 은혜는 살리려고 하는데 율법이 목을 비튼 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폐단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존속되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의 율법과 강령은 세례 요한 때까지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마11:13) 주님이 십자가에서 산 제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이 이를 입증해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마27:51)
그런데 당시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12사도들과 120문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과 같은 성령을 받고서도 오랫동안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충실히 지킬 것을 강조하고, 만일 이 율례나 법도를 어기면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 경우 성령을 받으면 옛 율법은 필요 없고 새 자유의 율법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여전히 불필요한 옛것을 숭상하다가 결국은 은혜마저 쏟아 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려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 성령을 충만히 받고 어느 다락방에서 30명쯤 되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는데 그중에 어떤 사람이 심부름을 나갔다가 로마 병정에게 잡혔다고 합시다. 로마 병정은 그에게 예수쟁이들이 숨어 있는 곳을 대라고 으르딱딱거립니다.
이때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율법에 충실히 살기 위해 어디에 숨어 있다고 곧이곧대로 대어 성도들이 몽땅 잡혀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경우에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믿음에 이르는 길잡이에 불과합니다.
믿음이란 주의 성령을 마음속에 모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 율법주의의 횡포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누가 성령을 받고 본의 아닌 죄를 저질렀을 경우에 크게 회개하고 끊긴 은혜의 연결을 받았는데, 교회에 나갔더니 단상에서 그의 죄상을 들어가면서 지옥을 면치 못할 마귀새끼라고 때렸다면 그는 실망한 나머지 타락해 버리기 십상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성경 66권을 통틀어 ‘천당행’과 ‘지옥행’을 구분 짓는 율법으로 간주하고, 이 길을 가면 천당이다, 저 길을 가면 지옥이다, 이걸 지키면 구원이다, 못 지키면 개죽음이다, 하는 식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것을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표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받을 자는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기독교는 간판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신약시대에 와서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받게 되어 있으며, 그렇게 되면 모세의 율법 대신 자유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 모세의 율법과 자유의 율법은 어떻게 다른가? 그 차이점에 대하여 예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통장에 100만 원의 예금을 한 사람이 어떤 상점에 갔다가 100원 한 장을 살짝 훔쳤을 경우와, 세 끼를 자식들과 내리 굶다가 기진한 나머지 국수라도 사들고 가려고 어느 집에서 100원 한 장을 훔쳤을 경우에 모세의 율법은 무조건 두 사람을 똑같이 범죄자로 취급하게 되어 있는 반면에, 자유의 율법은 각각 범죄자의 정상을 참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100원을 훔쳐도 처지와 형편에 따라 다스리게 됩니다.
사실 율법으로 죄를 구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정상이 천태만상(千態萬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각자의 사정과 처지를 두루 통찰(通察)하여 그 마음과 생각에 새겨진 자유율법으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명시된 일정한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이, 스스로 헤아려 일을 처리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율법은 10계명이 아닌 10억 계명도 더 되는 무수한 것이며, 차라리 ‘무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자유의 율법이 필요하고,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10계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은혜가 율법에 의해 매장된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그치면, 그동안의 모든 수고가 헛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