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Part 03 - Chapter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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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1.03
[1권] Part 03 - Chapter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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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3. 승리의 대열에서   

Chapter 25. 하늘에서는 땅에 대하여 어떻게 움직이는가?



1) 하나님과 선지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구약의 맨 처음 성경인 창세기를 비롯하여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이르는 이른바 모세 오경(五經)에서부터 학개, 스가랴, 말라기에 걸친 39권의 성경의 저자들은 각자 받은바 은혜의 비중에 따라 여호와의 음성과 계시와 가르침을 토대로 구약성경을 기록한 것입니다.


 가령, 은혜를 받아 70% 이루어진 분은 70%, 80% 이루어진 분은 80% 하나님의 의사를 대변하여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 구약 할 것 없이, 누락되거나 전후가 뒤바뀌거나 중복된 것 등이 적지 않아, 결코 100%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를 보충하시기 위해 “다른 보혜사(保惠師), 곧 진리의 성령이 와서 죄와 의(義)와 심판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다.”(요16:8)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모세 오경(五經)은 모세를 주축으로 하여 기록된 것으로, 특히 창세기는 지금부터 약 3,400여 년 전, 모세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먼 옛날에 일어난 우주 창생의 옛 이야기이므로, 여호와께서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셨지만 기록하는 데 여간 고심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구약의 제1인자로 당대의 율법이 그를 통하여 세상에 반포되었으며, 자기를 주님과 견주어, 나중에 여호와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운다고 말할 정도였으나, 그도 결국은 가나안땅에는 못 들어간 실패자였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6,000년 전에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퍼뜨린 후손들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 6,000년이라는 시간은 여호와의 은혜 시대가 비롯된 이후의 연대이며, 결코 지구의 나이는 아닙니다.


 모세는 80세에 여호와의 은사와 권능을 받아 역사한 대선지자로서, 시내산에서 40주야를 여호와께서 친히 함께 동행하는 가운데 우주의 창생과 인류의 기원에 대하여 보여 주신 것을 기록하였으나, 오늘날과는 달리 종이나 문자, 인쇄술 등이 형편없는 때이므로 그 불편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양가죽 두루마리 양쪽 끝을 막대기로 뚤뚤 말아, 손수 한마디씩 써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선민(選民)으로 단일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여호와의 말씀을 여간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며, 이를 간수하는 사람은 가보(家寶)로써 대대로 물려주고, 낡아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면 다시 복사하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두고 전해지는 가운데, 때로는 전화(戰火)로 일부 소실되기도 하고, 때로는 곰팡이가 끼는가 하면 또 때로는 부주의(不注意)로 분실되는 경우도 있었으므로, 문맥이 뒤틀리거나 짝이 맞지 않는 대목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보충할 수도 없는 것이, 여호와께서 처벌을 내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제사장이 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때에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소리 높여 낭독하고 이에 대하여 적절한 풀이를 아울러 하였습니다.


 무릇 하늘의 여호와와 땅의 인류 사이에는 영적(靈的)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서 인류 역사를 이끄실 때 반드시 선지자를 통하여 그때그때 땅의 여건에 따라 적절히 지시를 내려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3일 전에 A라는 선지자에게 내린 지시와 오늘 B라는 선지자에게 내린 지시도 다른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갖은 고난을 받으면서 광야를 지나가야 했을 때 이들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줘야 했지만, 환경이 다르면 당연히 하나님의 은총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오늘날은 역사를 마무리하여 여호와 앞에 의로운 자를 다듬어 세우는 때이므로 은총도 여기에 적합한 것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일찍이 사울 왕이 통일된 유대 나라를 세운 후로, 다윗 왕 때 나라가 강대하여 주위의 여러 나라들을 제압하더니, 다음의 솔로몬 왕 때에 국력이 위축되어 나라가 분열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으르렁거리며, 여호와를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는 등, 여러 모로 계율을 범하므로 여호와께서는 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회개하고 당신의 품에 돌아와 화목하게 지낼 것을 권면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고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빈틈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길 때에 선지자에게 내리는 지시와 믿음이 독실할 때에 선지자에게 내리는 지시가 다르며, 또 넓은 지역을 맡겨 역사하는 대선지자에게 내리는 지시와 한 지역만 맡겨 역사하는 작은 선지자에게 내리는 지시가 다 다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을 기어코 이루시기 위한 적절한 조치인 것입니다. 만일 그 뜻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재앙을 내리는 동시에 다른 선지자로 교체하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지시를 내려 시정하시게 마련입니다.


 그럼 여호와는 학개 선지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 살펴봅시다. 학개 1장 이하를 보면, 다리오 왕 2년 6월에 여호와께서 선지자 학개를 통하여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성전을 지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여호와의 말씀 자체는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였습니다. 그것은 전에도 말씀한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선지자 한 사람을 들어 쓰시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왜 내세웠을까요? 그것은 당시에 웅장한 성전을 짓는 것은 거국적인 대공사이므로 정치 권력자와 신앙의 지도자인 대제사장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시는 역시 선지자에게 내렸던 것입니다. 선지자란 여호와의 대행자로서 각자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맡은 분야의 일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학개는 이사야나 다니엘과 같은 대선지자와는 달리, 극히 소규모의 일, 즉 전화를 입어 다 부서진 성전을 세우라는 임무를 받았던 것입니다.


 성신을 부어 주어 심령을 다듬어 세우는 신약시대의 사도에 비하면 구약시대의 선지자의 임무는 대단한 것이 못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모세도 바울을 따르려면 아득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원리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한두 구절에 치중하여 풀이할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원리에서 풀어야 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은 성경을 엮을 때 많은 신학자들이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난해하여 해석이 구구합니다. 


 이 요한계시록은 아무나 감히 풀 수 없으며 누구나 읽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통틀어 결국 여호와와 마귀의 싸움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규례와 법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고서는 입으로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자기가 마귀의 편에서 움직이고 있는 줄도 모르게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영을 믿되 그것이 여호와에게 속했는지 시험해 보라고 하였습니다.(요일4:1)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당신의 크신 경륜을 이루시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당신이 세운 선지자에게 미리 지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학개에게 거국적인 사업으로서 외적에게 파괴된 성전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움직임은 그 원리에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학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곧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들은 그 말을 받아들였으며, 여호와께서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성전을 짓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당시에 일반 백성들은 물론 유다 총독이나 대제사장까지도 학개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 듣고, 또 이들이 말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 여호와께서 기뻐하여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이때 그 모든 사람들이 학개의 말을 듣고서도, “네까짓 게 뭔데 하나님이 너에게 특별지시를 내리겠느냐?” 하고 외면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때 “할 수 없군.” 하고 손을 툭툭 털고 단념하시는 여호와가 아닙니다. 반드시 어떤 재앙이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고금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당신이 이루시려는 뜻이 가로막혀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런 무능한 여호와는 믿을 수도 없고 또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겉모양이 그럴듯하여도 당신이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자 1,000명보다는 합당한 자 1명을 더 소중히 여기십니다. 숫자만 많으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께서 이 얼마 안 되는 수가 모인 이곳을 각별히 기억하시는 것은 까닭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일단 정하신 일은 기어코 이루고야 맙니다. 다만 빨리 이루느냐, 더디 이루느냐 하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매우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같이할진대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손으로 안찰하여 악신을 가려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내가 무슨 수로 이런 일을 꿈이나 꾸어 보았겠습니까? 주께서 시키시매 그대로 하니 되는 것뿐입니다. 그리하여 이 손이 악신을 받은 자의 눈에 한 번 닿기만 하면 금세 까무러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말씀으로 여러분을 다듬어 세우는 가운데, 나는 수가 조금만 더 늘고 심령이 안정되면 또 다른 은혜가 내린다고 미리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오늘날 여러분에게 성령을 부어 주는 은사가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더욱 심령이 다듬어지고 좀 더 숫자가 늘면 더욱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말이 거짓인지 두고 보시면 알 것입니다. 땅의 움직임과 여건이 변함에 따라서 하늘의 지시와 은총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땅에서 주의 피를 헛되이 낭비한 데 대한 여호와의 진노를 하루 빨리 풀어 드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금은 ‘바다에서 네 큰 짐승이 나오는’ 4대 강국의 시대로, 환난은 바다에서 먼저 일어나 ‘육지의 사람들이 무서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66권이 우리 세대에 끝맺게 되어 있으므로,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나에게,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낱낱이 보여 주시는 것은 앞일을 내다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그만큼 여러분의 책임도 무거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이곳에 나왔을 때의 자기 심령과 지금의 심령 사이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는지 각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야흐로 새로운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각자 영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나고 있는 것입니다.



2) 학개

 나는 학개 선지를 중심으로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어떻게 부리는가를 좀 더 상세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학개서 2장 1절에 보면, “7월 곧 그 달 21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장 1절에 있는 말씀, 즉 “다리오 왕 2년 6월 곧 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한” 후에 50일쯤 지나서 두 번째로 여호와의 지시가 다시 온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첫 번째 지시를 백성들이 받아들이고

순종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뭇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일차적인 정지작업을 일단 마치고 난 다음에 다시 지시하신 것입니다. 그 내용은 요컨대 “내가 너희 중에 머물러 있으니” 기운을 내라는 격려와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2:9) 하고 당대와 앞으로 될 일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여호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선지자를 통하여 역사하시며, 이때 당대의 일과 앞으로 될 일들을, 아모스서 3장 7절 말씀대로, 미리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들어 쓰시는 선지자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상징인 총독 스룹바벨이나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움직일 경우에도 여호와가 직접 하시지 않고, 일단 선지자 학개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게 하였던 것이며, 당신께서 명령하여 지으실 성전이 당대와 앞날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2장 10절에 보면 ‘다리오 왕 2년 9월 24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또다시 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지시를 내리신 지 두 달쯤 지나 세 번째 지시가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한꺼번에 다 지시를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져 나가는 과정을 보아 가면서 차근차근, 하나하나 말씀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에 만일 두 번째 말씀을 백성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 번째 말씀을 주실까요?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백성들이 불신하거나 불응하면 다음 지시를 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가 선지자를 들어 쓰시는 기본 원칙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에게 여호와의 지시가 와서 “단에 서라.” 하시기에 나는 그대로 순종하고, 단에서 쫓겨나자 한동안 편히 쉬려고 했더니, “추수감사절을 전후하여 동쪽에 따로 제단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곧 내려오므로 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여러분의 심령이 어느 정도 다듬어지고 안정이 되니, 말씀으로 다듬는 데 그치지 말고 “성령을 부어 주고 씻어 주라.”는 지시가 와서 나는 또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성회가 좀 더 차고 넘쳐서 여호와를 기쁘게 해 드리면 그때 내리는 축복은 지금의 유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거듭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그때그때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적절히 지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학개에게 주신 세 번째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율법에 대한 것입니다. 백성들이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여 순종하자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나아가서는 율법에 대하여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학개서 2장 10절에 보면 “여호와가 말하나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에 닿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고 제사장들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매우 평범한 이야기 같지만, 여기에는 숨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잘 알다시피, 구약시대는 오늘날과 같이 자유의 율법에 의해 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으로 육을 다스리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마음으로 죄를 지어도 법도에 어긋나지만, 구약시대에는 육적으로 범죄하는 것만 문제 삼고, 이 경우에 심한 범죄자를 끌어다가 뭇사람이 보는 앞에서 직접 돌로 쳐 죽이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례란 다름 아닌 그들 선민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세의 율법은 세례 요한 때까지만 통용이 되고, 그 후 영을 다스리는 자유 율법 시대에 들어오면 육에 할례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혼에 할례를 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고 정성껏 그 은혜를 간직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을 얻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혼이 성령에 속하면 구원을 얻고, 우상을 섬겨 악령의 지배를 받으면 파멸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여호와와 마귀의 싸움에서 구약시대는 첫째 싸움, 즉 육의 싸움인 반면에, 신약시대는 둘째 싸움, 즉 혼을 두고 양자가 겨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 셋째 싸움은 영과 영의 싸움으로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 이 싸움에 출전하며, 여기 앞장선 두 감람나무는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과 싸워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계11:7) 그곳이 바로 영적으로 ‘소돔’ 또는 ‘애굽’이라는 곳이며, 이들은 사흘 반 만에 부활 승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침은 성령의 표지로, 주의 보혈로 기름 부음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의 보혈을 마시고 살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에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재앙을 모면한 것은 인침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럼, 아까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을 두고 생각해 봅시다. 육적으로 움직인 시대에 옷자락에 싼 거룩한 고기가 다른 음식물에 닿으면 그것이 거룩한 음식물이 되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출29:33, 겔46:20) 그러나 학개 선지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제사장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거룩한 음식에 다른 음식이 닿아도 거룩하게 될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제사장이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제물을 바치고 백성의 죄를 여호와에게 고하여 그 죄(자범죄)를 사하도록 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고기가 다른 음식에 닿아도 그것이 거룩하게 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가 제사장들의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단이 막히고 여호와께서 그 제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제사장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대답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에게 몸부림치면서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왜? 아직은 성전이 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런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만일 이때 학개 선지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역사하시지 않았던들 그 제단은 영원히 막혀버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사를 드리고 목메어 간구해도 냉랭하고 컬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제사장들은 솔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학개에게 솔직히 말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 너희는 오늘부터 성전에 돌이 돌 위에 놓이지 않던 때를 추억하라.”(학2:14-15)


 그런데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물이 왜 부정할까요? 성전 건축을 중단하였던 그들의 움직임이 여호와의 눈에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학개로 과거를 회상케 하는 가운데,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 스룹바벨아 … 너로 인을 삼으리니.”(학2:21-23) 즉 스룹바벨을 증거자로 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스룹바벨은 유다 총독으로, 믿음 안에서는 선지자 학개와 비할 바가 못 되는 존재지만,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를 이처럼 높이 들어 쓰시기로 한 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 인간에게 혼을 주셨으며, 그 혼에는 ‘자유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책임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당신의 말씀을 청종하게끔 강요하시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청종의 여부는 인간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일 인간이 당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복을 내리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재앙을 내리는 것이 하늘의 상례입니다.


 “내가 너희 손으로 지은 모든 일에 폭풍과 곰팡이와 우박으로 쳤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이키지 않았느니라.”(학2:17)는 말씀이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여호와의 두려운 측면도 잘 계산에 넣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3) 스가랴

다음은  스가랴 선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나이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두 선지자에게 내린 여호와의 계시에는 중복된 시기도 있습니다. 즉 다리오 왕 2년 9월까지 학개에게 계시를 보여 주시는 한편, 스가랴에게도 같은 해의 8월부터 계시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다만 이때 스가랴는 여호와의 계시를 받고서도 앞선 종 학개가 아직 일하고 있으므로 잠자코 있다가 그가 소임을 마친 후에 등장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동시에 두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혼돈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여호와께서는 스가랴에게 말씀을 내려도 학개 선지가 있는 한 구체적인 사명을 맡기지는 않고, 대략 변죽만 울려 힌트를 줄 뿐이었습니다. 즉 그 내용은 백성들이 조상을 본받지 말며 회개하고 여호와에게 돌아오라는 것으로, 스가랴서 1장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 후 약 3개월쯤 지나, 그러니까 “다리오 왕 2년 11월 24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본격적인 지시를 내리는 한편, 학개에게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라고 족보를 따져 기록한 것은, 당시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아 혼동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이때 스가랴에게 보여 주신 계시는 스가랴 1장 8절 이하의 말씀으로, 그것은 이러합니다.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이르되 ‘주여 이들이 무엇이나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네게 보이리라.’” 하고, 그 말들은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 천사, 선지자, 그리고 여호와가 보내신 자, 즉 말들 ― 이렇게 네 존재들이 등장하여 서로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 천사의 모습에 대하여 묘사한 성경 말씀을 본 적이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도 천사가 어떻게 생겼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들 천사를 성화로 그릴 때 그렇게 고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스가랴의 눈에 보인 이 여러 가지 색깔의 말들은 실상 여호와께서 보낸 천사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학개나 스가랴의 경우는 물론, 모세를 비롯한 다른 선지자에게도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으레 영적인 내용을 육적인 것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움직이는 구약시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백마니, 홍마니, 스룹바벨이니 하고 말씀하신 경우가 다 그렇습니다.


 또 이 육적인 것도 당대의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시를 보는 장본인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학개의 경우에 잘 아는 총독 스룹바벨을 보여 주지 않고, 생전 보도 못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학개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 후로 몇 천 년이 지난 오늘날 보여 주시는 계시는 당연히 그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영을 구분 지어 죄를 소멸하고 여호와 앞에 다듬어 세우는 이 역사가 얼마나 중차대(重且大)한가를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고도 오묘한 말씀이 터져 나가는 것은 그 때문이며, 성경 66권이 끝을 맺고 역사의 종말을 짓는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스가랴에게 보여 주신 여호와, 천사, 선지자, 이렇게 해서 백성들이 의사소통을 하는 경로는 여간 복잡하지 않습니다.


 즉 말들은 천사에게 고하고, 천사가 여호와에게 아뢰어서, 여호와는 천사에게, 천사가 스가랴에게, 스가랴가 백성들에게 ― 이런 경로를 거쳐서 의사가 전달되는 것입니다. 천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여호와와 일문일답을 한 선지자는 모세를 비롯하여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즉 모세는 여호와와 직통한 구약시대의 가장 큰 종이었으며, 모세가 주님을 가리켜 “나와 같은 선지자를 보낸다.”고 한 것은 이처럼 천사를 거치지 않고 여호와와 직통한다는 의미에서도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신약시대에 와서는 영적으로 움직이게 되며, 여호와께서는 여기 등장하는 천사나 말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주께서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다른 보혜사 성령이 와서 직접 하나님과 인간의 교류를 담당해 줍니다.


 하긴 인간의 혼이 여호와의 은총으로 여호와 앞에 직접 가는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3층천에 올라갔을 때, “내가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경우가 그것입니다. 이때 바울의 혼이 육체에서 떠나 3층천에 올라간 것입니다. 


 내가 이상 중에 영적으로 주님께 이끌려 하늘나라에 갔을 때도, 궁창 위에 궁창이 있다는 말씀대로, 세 번째 궁창에 가서야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났습니다. 그런고로 3층천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고후12:2)


 바울은 이 3층천에 갔다 온 지 14년이 지나서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발설하였지만, 그 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생겼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죽어도 죽지 않음을 확신하고 대담하게 말씀을 증거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우선 여호와께서 움직이는 하늘의 원리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우리의 믿음을 튼튼히 다져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말씀으로 여러분을 다듬어 세우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소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은 여호와의 율법이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 아로새겨지는 신약시대의 종말을 마무리하는 때입니다. 여러분이 주께서 생전에 약속하신 다른 보혜사 성신과 같이할 때, 마귀는 여러분에게 범접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를 피하여 쫓겨 다닐 것이 아니라, 그 경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4) 영과 육

 스가랴 2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즉 “내가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척량(尺量) 줄을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장광을 보고자 하노라.”(슥2:1-2) 하였습니다.


 이것은 스가랴에게 계시로 보여 준 이상의 한 광경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때때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께서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이끌림을 받아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에 천하만국을 한눈에 본 것은 육안으로서가 아니라 영안으로 비로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3층천에 올라가 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바울의 육신은 어디 있으나 무방합니다. 나에게 여호와께서 하늘나라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 주신 것도 이치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스가랴에게 보여 준 이 이상은 다리오 왕 2년 11월 24일의 계시의 연속으로, 직접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런 성경 구절에 부딪치면 당황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나 부흥사도 이런 대목은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2장 1절에 있는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천사입니다. 스가랴의 눈에 천사가 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가랴는 “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예루살렘을 척량하여, 그 길이와 넓이를 알고자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육적으로 길이와 넓이를 잰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들이 여호와를 얼마나 경외하는가 하는 믿음의 척도를 헤아려 본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의 마당은 그냥 두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척량’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척도, 즉 의(義)의 분포도를 헤아린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이 상징적인 의미로 가려진 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보여 주신다고 하더라도, 각자 맡은바 사명에 따라 그 분야가 다르므로, 선지자,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보여 주신 분야에 대해서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보여 주신다고 해서 다아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보여 주신 것을 기록한 성경의 저자가 그대로 기록하면서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니엘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여’ 천사에게 질문했더니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해 두어라.”(단12:8-9)고 한 경우가 그렇습니다. 


 나는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여호와께서 씻어 세워 주시고, 마지막에 성서의 종지부를 찍게끔 보여 주시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무슨 수로, 일생을 성경 연구에 바친 위대한 신학자도 감히 풀지 못하는 구절들을 풀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모스서에 보면 여기에 대해 분명히 못을 박은 구절이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에게 보이지 않고서는 결코 행함이 없느니라.”(암3:7)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스가랴 2장 5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늘에서 이런 말씀이 들려오려면 땅에서도 그럴 만한 움직임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학개를 통하여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이 땅에서 지체 없이 착착 진행되기 때문에 이런 축복의 예언을 하신 것입니다.


  만일 땅에서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호와의 입에서는 축복이 아니라 환난을 안겨 주는 말씀이 나갈 것입니다. 예컨대, “20석 곡식 더미에 이른즉 10석뿐이고, 포도즙 틀에 50그릇을 길으러 이른즉 20그릇뿐이었느니라.”(학3:16)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언을 듣는 백성들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상고해 봅시다. 스가랴서 3장 1절 이하를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고, 사단이 그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스가랴에게 보여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와 여호와의 사자 및 사단의 위치가 각각 3각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대적 관계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반드시 사단이 훼방하게 마련입니다.


 여호와는 스가랴에게 보여 주신 계시에서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해 사단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것을 더럽히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은 스가랴 선지자이며, 여호수아 자신은 그런 줄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와 대제사장은 이만큼 격이 다른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말씀하시고,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말씀하시고는, ‘머리에 관을’ 씌워 주시니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수아의 곁에 섰더라.”(슥3:5)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는 어찌하여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이런 은총을 베풀었을까요? 만일 여호수아가 학개를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 듣고서도 청종하지 않았던들 이런 은총이 내려질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도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4:8)는 말씀으로 나는 대답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쓰시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당신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는 한 이와 같이 친히 씻어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서 유의해야 할 또 한 가지는, 여호수아에게 새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웠더니 여호수아의 앞에 있던 여호와의 사자가 곁에 섰다는 사실입니다. 즉 여호수아와 사자의 위치가 앞에서 곁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앞과 곁은 거리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가 깨끗이 씻음을 받았으므로 사단은 물러가고 그 자리에 천사가 다가왔던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런 사실을 목격한 스가랴는 자초지종에 대하여 여호수아에게 이야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얼마나 기뻐하였겠습니까.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영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여호와께서 죄를 도말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입을 통하여 달고도 오묘한 말씀이 터져 나가고, 이 손길을 통하여 악령을 소탕하는 큰 권능이 임한 것입니다. 늘 말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시는 이가 따로 계십니다. 


 여호와는 당신의 사자를 통하여 여호수아에게, 당신의 도를 준행하고 율례를 지키면 당신의 집을 다스리고 뜰을 지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너와 네 앞에 앉은 동료들은 예표의 사람이라.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슥3:8)고 하셨습니다.


 여기 ‘예표’라는 말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입니다.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에서 ‘순’은 곧 ‘예수’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11장에 “이새의 줄기에서 새싹이 난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사11:1) 또한 이사야 53장의 말씀에도 같은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사53:2)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당신의 독생자로 하여금 십자가의 형틀을 지게 하여 대속의 제사를 지냄으로써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여”(슥3:9) 버리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요5:39)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