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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1.07본문
Part 03. 승리의 대열에서
Chapter 26. 두 감람나무를 증거한다
1) 스가랴의 이상
우리는 하루하루의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죄가 날로 도말 받고 점점 줄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지, 결코 그 반대가 되어, 날이 갈수록 죄를 덧입는 생활을 해 가면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오랜 신앙 체험을 해 온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든, 자기 신앙은 자신이 잘 알기 마련입니다. 남이 아무리 우러러봐도 자기가 날로 새로워지고 깨끗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결과는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컨대 나와 주의 거리가 문제입니다. 내가 주님과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그 거리는 점점 좁혀 가고 있느냐, 멀어져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수시로 주님과의 거리를 재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데 모여 드리는 예배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컬컬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갖은 어려움 속에서 먼 데서 여기까지 오시는 정성도 물론 무던하지만, 여러분이 드리는 제사에 주님이 받아 주실 만한 거룩한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주님 사이에 막히는 담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뜨겁게 사모하며 매달려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를 경배하고 주님을 따르느라고 수고하고 있지만, 그 제사가 얼마나 하나님에게 상달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적어도 여기 모인 우리 식구들은 한 사람도 헛수고를 하는 사람이 없어야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각자가 주님이 기억하시는 바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참고 견디며 이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코 마귀에게 양보하지 말고, 각자 생명줄을 단단히 잡아야 합니다.
나는 여기서 스가랴서 4장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이 단상을 통하여 터져 나가는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심령이 이루어진 정도껏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선 무슨 뜻인지 헤아려 깨닫는 지각과 지혜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스가랴 4장 1절에 보면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어나는 것 같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천사가 나를 깨우니” 하는 말과 “마치 자는 사람이 깨어나는”이라는 말을 연결시켜 보면, 분명히 스가랴가 실제로 잠들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즉 정신이 좀 혼미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혼미 상태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건 실제로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잘 모를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상을 보여 주실 때 그 광경과 설명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가랴 3장에 보면, 여호와가 말하기를, “내가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슥3:9-10)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 여호수아는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는 것을 보는 동시에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선지자 스가랴에게 보여 주실 때는 마치 영화 같은 장면을 보는 동시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을 스가랴가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스가랴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서 ‘간접적 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사자가 아닌 제3자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여 주실 때의 경우입니다.
스가랴서 4장은, 3장과는 달리, 간접적으로 주시는 계시가 아니고 직접적으로 주시는 계시입니다. 3장과 4장의 계시는 이어서 보여 주시는 것인데, 3장의 계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중심해서 보여 주시는 것이고, 4장은 직접 스가랴에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3장의 장면을 보고 있다가 4장의 장면을 보는 순간 스가랴는 3장의 장면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너무나 이상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나므로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때의 스가랴는 이상 중에 정신이 몽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천사가 와서 탁 치는 순간 제정신이 들어 잠에서 깨어난 듯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제정신이 든 스가랴의 눈에 보인 광경은 이러했습니다.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서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管)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다.”(슥4:2-3)이 등대는 순금으로 되어 있으며 등잔을 올려놓는 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등대 위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다시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잔 꼭대기 등대에 일곱 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좌우로 서 있는 것입니다.
2)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여호와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선지자 학개를 들어 쓰시고, 그 보좌역으로 당시에 정치적으로 권세가 제일 큰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의 어른 격인 여호수아를 불러들여 역사하시다가, 학개가 늙게 되자 젊은 스가랴를 들어 쓰셨습니다.
즉 학개에게 내리신 지시를 끊으면서 스가랴에게로 새로운 지시가 갔던 것 입니다. 이를테면 세대교체가 된 셈입니다. 그런데 학개와 스가랴의 경우는 원만한 세대교체가 되면서 전자를 따르던 여호수아나 스룹바벨을 비롯한 여러 무리들도 후자를 그대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와 여호수아(선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의 배턴을 여호수아가 이어받고,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그 후계자가 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대체로 당신의 종을 부릴 때, 두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이 상례입니다.
다만 선지자는 언제나 당대에 한 사람씩 여호와의 부름을 받아 역사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만일 두 선지자가 나와서 각자 엇갈린 주장이라도 하게 되면 백성들이 어느 선지자의 말을 따라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세상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란 이를테면 여호와의 대변자인데, 만일 정부에 두 사람의 대변인이 있어 이렇게도 말하고 저렇게도 말한다면 국민들은 어느 말이 대통령의 진의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여 국정에 혼란을 가져올 것은 빤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언제나 한 사람이 나와 여호와의 뜻을 대변하며, 필요에 따라 교체하게 되면 앞선 자에게는 여호와의 지시가 자연히 끊기게 마련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사람을 어떻게 들어 쓰시며, 또 그 소임이 어떻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나 총독 스룹바벨을 크게 보았지만, 언제나 당신의 종을 통하여 뜻을 전한 것을 보아도 저간의 소식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가랴가 순금 등대와 그 주위의 신기한 이상을 보고 천사에게, “이게 뭡니까?” 하고 물었을 때 천사는,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하며, “이는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슥4:6)고 하였습니다. 찬송가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즉 “힘써도 못하고, 울어도 못한다.”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인간이 힘을 쓰면 얼마나 쓰고, 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것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힘쓰지 말고 사과나무 밑에 드러누워 사과가 입으로 떨어져 굴러 들어오기를 기다리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일은 여호와께서 주관하시며, 당신의 할 탓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순금 등대로 어둠을 환히 밝히고 두 감람나무를 내세우시는 것은 여호와의 영으로 하시는 일이므로 인간이 감히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등대를 처음 만든 것은 모세였습니다. 즉 모세가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순금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될 일에 대한 그림자로서, 그 모양에 대하여 성경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출25:31)
그런데 어둠을 밝혀 인간을 죄에서 건져 내는 순금 등대는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성소에 있습니다. 이 성소에는 금향로도 놓여 있습니다. 이 금향로에 향을 피우고 제사장이 속죄의 기도를 올리면 그 기도가 향의 연기를 타고 여호와에게 상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주께서 당신 자신을 한꺼번에 제물로 드려, 성도들의 기도가 직접 하늘나라에 상달됩니다. 여러분이 아무 준비 없이 이 자리에 나와 여호와에게 예배로 제사드릴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3) 감람나무의 사명
천사가, “두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성신으로 된다.”(슥4:6)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지자 스가랴에게 전한 후에, “큰 산이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된다.”(슥4:7)고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여기 말하는 ‘큰 산’은 백두산이나 히말라야 산과 같은 육적인 산이 아니라, 죄의 더미, 곧 죄의 산을 가리키는 영적인 말씀입니다.
그리고 스룹바벨이 ‘머릿돌’을 내놓을 때, 무리가 “그에게 은총이 있을지어다!” 하고 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머릿돌이란 건축의 가장 요긴한 돌이며, 총독 스룹바벨이 ‘머릿돌을 내놓았다.’는 것은 그가 성전을 짓는 데 지대를 마련하는 큰 구실을 했기 때문에 한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건축에서 제일 요긴한 이 돌은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것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마21:42)는 말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해 버리기만 하면 저들은 일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십자가의 처형은 오히려 단번에 죄악을 제거하는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독 스룹바벨은 성전의 대지를 제공하고 머릿돌을 내놓았으나, 장차 올 성전의 머릿돌은 예수로, 이 성전은 스룹바벨이 실제로 세운 성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큽니다.(계21:16) 돌에 새긴 ‘일곱 눈’을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고 하였는데,(슥3:9, 4:10) 돌이 예수님을 나타낸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알면 곧 납득이 갈 것입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수로서 그 눈은 세상을 두루 살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신 여호와의 눈이 번뜩이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계5:6) 그야말로 무소부재(無所不在)합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살피는 권능의 눈이요, 영적인 눈입니다.
또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은 후세에 나타날 두 감람나무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스룹바벨의 손이 이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슥4:9)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는 ‘손’을 특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감람나무가 손길로 악령을 소탕하고 성령을 뭇사람들에게 부어 주는 역사를 하는 연유가 여기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 같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지만, 말씀 그대로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슥4:10)할 것이 못 됩니다. 여호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작은 일’로 보이더라도,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이 결코 작을 수 없으며, 반드시 크게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성전의 지대를 놓은 스룹바벨의 손에는 ‘다림줄’이 쥐어져 있습니다. 다림줄은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준 영적인 권세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스룹바벨이 하나님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림줄은 끝에 추를 매달아 똑바로 드리우게 한 줄로서, 오늘날에도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릴 때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건축자에게 매우 긴요한 도구입니다. 그와 같이, 스룹바벨은 건축, 곧 성전을 짓는 데 여호와에게 긴밀히 연결되어 요긴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감람나무에 대하여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만일 성경을 편리할 대로 적당히 왜곡하거나 주어다 붙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선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가랴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금 기름이 흘려 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입니까?” 천사는 이들이 기름 발리운 자 둘이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시고 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여호와께 택함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모시고 말씀을 받아 세상에 전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금 기름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거룩한 진액, 곧 주의 핍니다. 그러므로 감람나무는 물이 피되게 하고, 그 피는 감람나무 원체를 따르는 성도들이 마시고 깨끗이 씻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계11:6) 이것이 곧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슥13:1)이요,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는 생명수”(계22:17)입니다.
그리고 감람나무가 나타나 이 생명수를 뭇사람에게 값없이 마시게 할 때가 말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감람나무가 나타나면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온다.”(호14:7)고 하였습니다. 주께서 나타나면 사람들을 “포도나무 아래로 초대하는”(슥3:10) 것처럼 말입니다.
두 감람나무의 원체는 마치 스룹바벨이 여호와의 다림줄에 의해 직통으로 연결된 것처럼 하나님에게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룹바벨이 곧 감람나무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스룹바벨은 편의상 감람나무의 한 상징적인 비유로 내세운 존재에 불과하며, 문자 그대로 감람나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감람나무란 요한계시록 11장 4절에 있는 말씀에 연결되는 존재입니다.(계11:3-4) 그는 주의 증거자입니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 하나님의 책을 받아 보시고 감람나무에 대해 알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감람나무를 세우시기 위해 이기는 자를 원하셨던 것입니다.(계2:7) 일곱 교회에 사도 요한이 편지를 보내면서 부탁한 말씀 중에 가장 중요한 이긴자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스룹바벨의 손에 쥐어진 다림줄이 하나님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스룹바벨이 성전을 완성한 것처럼, 이긴자, 즉 감람나무의 사명을 맡은 자도 그 손에 권능을 받아서 주님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람나무의 사명을 맡은 자는 그 손으로 뭇사람에게 축복하여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