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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01.11본문
Part 03. 승리의 대열에서
Chapter 27. 흑암 속의 빛
1) 주님의 시련
주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30년 동안 사신 사생활에 대해서는 성경에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 위에서 얼마나 고생스럽게 사셨는지 거의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목수의 집에 태어나 손수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대패로 미는 일을 해 가면서 생계를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고된 일은 물론 여호와께서 시키신 것이지만, 인생의 앞뒤 골목을 손수 다 겪으면서 아니꼬운 일들을 한두 번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마루를 고쳐 주고, 때로는 책상을 만들어 주고서도 품삯을 제때에 받지 못하여 끼니가 다 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된 시대와는 달라서, 직접 산에 가서 나무를 찍어다가 톱으로 일일이 썰어 판자를 만들고, 그것을 다시 대패로 밀어 적당한 용도에 쓰곤 하였습니다.
당신께서 십자가를 져야 할 몸인 것을 잘 알고 있던 주께서는 못질을 잘못하여 망치로 손을 다치거나 하면 그 상처에서 스미어 나오는 피를 보고 불원에 무더기로 흘려야 할 당신의 피를 연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가 처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당하리라는 것은 미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수백 년 전에 여호와께서는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주께서 어떻게 당하리라는 것을 기록해 놓았으며, 주께서는 이 성경을 읽기도 하였습니다.(사53장 참조)
그러므로 설사 하나님의 독생자라 하더라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마음에 수심과 고민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여느 사람보다도 한결 늙어 보였습니다.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생활을 감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죽으리라는 것을 빤히 내다보고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우리라는 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는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은 사형수였습니다. 설사 주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 승천하실 것을 아실지라도, 그 수모와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사형이라도, 단두대 위에서 잠깐 괴로움을 당하다가 곧 숨을 거두는 것 같은 사형이거나, 전기의자 위에서 눈 깜작할 사이에 저승으로 옮아가는 그런 사형이라면 또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당해야 할 처형은 십자가의 사형입니다.
사형수들은 나무형틀 위에서 갖은 쓰라림을 당하며, 며칠을 신음한 끝에 비틀어 메말라 죽도록 하는 그런 잔인무도한 사형법이었습니다. 30년 동안의 사생활을 마친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나가서 40주야를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괴로움 가운데 시련을 겪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에 이끌려’란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비록 당신의 독생자라 하더라도 사생활을 하시던 30년 동안은 별로 이렇다 할 지시를 내리지 않았으나, 성령을 주신 다음부터는 앞으로 3년 동안 직접 부리실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광야로 불러낸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하겠으니,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찾지 말라.”고 당부하고, 동생들에게 집안 살림을 부탁한 다음 집을 나왔습니다.
광야에서 주님은 처음으로 야인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지으신 새소리며 들짐승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못 감개가 무량하였을 것입니다.
일찍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주야를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류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온 것처럼, 주님도 40주야 금식 기도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과 교류하여 앞으로 해야 할 모든 절차와 방도를 지시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가 되어야 당면한 지시를 내리는 것입니다. 일찍이 주님도 당신이 재림할 때를 하나님만 알고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장차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시기에 가서 구체적인 지시를 받기 위해서는 40주야라는 시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당면한 과업을 이루시기 위해 광야에서 하늘과 땅 사이를 영적으로 오르내리면서 여호와의 상세한 지시를 받고, 또 모든 연단과 마귀의 시험까지 물리치고 본격적으로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온 세상의 권세와 온 하늘의 권세의 대결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빛 되시는 하나님과 주님과의 교류를 어둠이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의 기사가 조금씩 다릅니다. 각자 주님의 간증을 듣고 기록하였는데, 받은바 은사와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생긴 것입니다. 성경이 성신의 감동을 받고 기록한 책이라고 해서 결코 완전무결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여호와나 주께서 하실 말씀을 다 하신 것도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감당치못할 말은 나중에 보혜사 성령이 가르치도록 맡겼던 것입니다.(요16:7-8)
성서적으로 제일 깊이 들어간 것은 사도 요한이었습니다. 나이가 가장 어린 관계로 주님의 귀여움을 받아 주님을 제일 가까이 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와 베드로는 예수보다 나이가 많아 자연히 거리감이 생겼던 것입니다.
주께서 맨 처음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 곳이 가버나움입니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 서북쪽에 위치한 큰 성으로, 주께서 나사렛에서 떠난 후 꽤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안드레나 야고보, 마태, 요한 등은 모두가 이곳 출신입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을 통해 이미 주님에 대하여 많이 들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베드로야, 나를 따르라.”(마4:19) 하니 곧 따른 것 같지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를 따르라고 한다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르겠습니까? 이것은 간단히 기록하기 위해 그렇게 쓴 것으로, 거기까지는 여러 가지 사연과 상당히 긴 시일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도 가끔 의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몸소 바다 위를 걸어서 본때를 보여 줘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 한 제자를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데도 상당한 시일이 걸렸습니다.
이곳을 처음 전도지로 정한 것은 하늘에서 이미 주님의 말이상당히 먹혀 들어갈 것을 알고 지시한 것입니다. 주님은 물론 당신이 어떤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기까지는 자기를 남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영수가 사회에서 아무렇게나 산 것 같지만, 몸은 비록 어느 시궁창에 빠져 있더라도 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어느 하나도 예사로 흘려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상당히 긴 준비 기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결단코 갑자기 주먹구구식으로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갖은 시련을 당하면서 그때마다 앞으로 일을 할 때 무기로 쓰려고 날을 갈아 왔던 것입니다. 버스를 탈 때나 혹은 다방에서 손님을 만날 때나 항상 주의 성령은 나를 지켜 주셨고, 나 역시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주님을 중심 삼아 기도하고 찬송하는 생활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가운데,
밤이면 주께서 이상 중에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깊은 내막과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보여 주시곤 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하루 저녁도 외롭게 지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성령으로 위로하여 주시고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친 주님은 성경에 미리 당신에 대하여 기록한 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는 성경의 중심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외친 첫마디는,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보다 6개월 먼저 온 세례 요한도 맨 처음에, “천국이 가까웠다!”, 베드로도 120문도와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신을 받고 나서 외칠 적에 제일 먼저 한 말이,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외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때가 임박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에 가는 여건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여건이 갖추어진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2) 세례 요한
주님은 이때부터 12제자를 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상당한 시일이 지나서 제자들이 주님의 주위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 세례 요한은 계속 물세례를 주고 있었으며, 베드로나 요한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한마디 던지자 그물을 내동댕이치고 금방 따랐다면 베드로는 세례 요한이 증거하는 말을 듣고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자기 생계를 이어 가는 직업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리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아니었다면, 주님은 자기 입으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출발에서 매우 불리한 입장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증거는 다른 유력한 인사가 해 주고 장본인은 시인하는 형식이 되어야지, 자기 입으로 한다는 것은 매우 어색할 뿐더러, 또 그 말이 잘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은 빤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런 고충을 덜어 주기 위해 엘리야의 영, 곧 세례 요한을 땅 위에 내려 보냈던 것입니다.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의 양식이 이만저만 고갈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말라기 선지 이후로 400년 동안 하나님의 사람을 전혀 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구약시대에 모세에서 시작하여 선지자나 사사(士師)를 계속 보내 주어 공백이 별로 생기지 않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긴 공백기가 생겼으므로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암흑시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없으면 하늘의 일을 알 수 없어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로마의 압제를 받고 있었으므로 갈급한 마음으로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치면서 물세례를 줄 적에 그가 메시아인 줄 알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가문으로 보나, 위풍으로 보나, 그리고 언변으로 보나 당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기를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증거하고, 곧 자기로서는 신들메도 풀 수 없는 메시아가 나타난다고 예고하자 그들의 가슴은 더욱 부풀어 올랐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당시에 제사장이라면 교권을 손에 쥔 사람으로, 신앙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세도가 대단하였으며, 따라서 백성에 대한 영향력이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하긴 여호와께서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이 지체 높은 집안에 태어나도록 섭리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길 예비자로서의 그에게 사람이 많이 따르게 하여 메시아가 왔다는 소식을 믿음직스럽게 뭇사람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주님처럼 천한 집안에 태어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를 따르는 사람이 불과 몇 안 되고, 또 그의 말을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메시아의 증거가 흐지부지될 우려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소리 높여 외치면서 물세례만 주었을 뿐, 별로 권능을 행하지 않았는데도(요10:41) 사람들이 ‘그가 혹시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만 보아도 그의 가문과 지위와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보다 충실히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대 나라를 되찾아 좀 더 잘 살 수 있는 길이 없나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입에서, 자기 뒤에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 못할 진짜 메시아가 온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응당 세례 요한보다도 메시아는 월등 높은 가문에서 태어날 줄 알았습니다. 세례 요한으로 말하면, 제수를 아내로 삼은 헤롯왕의 비행을 직접 규탄할 정도요, 감옥에 넣은 후 왕이 그의 목을 자를 수밖에 없게 되자 몹시 고민할 정도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세례 요한이 자기 뒤에 올 메시아의 신들메도 풀 수 없다니, 사람들은 곧 자기들의 눈앞에 나타날 메시아에 대하여 얼마나 어마어마한 존재로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기대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 앞에 메시아로 나타난 장본인은 다름 아닌 나사렛 동네의 목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혹시 정신 이상이라도 걸리지 않았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를 구세주로 따른 것은 비천하고 무지한 가난뱅이나 병자 정도이고, 소위내로라하는 자들은 다 외면하였습니다.
계산이 안 맞는 고로, 즉 그들이 바란 것은 육이지 영이 아니었으므로. 이른바 상류층 사람들은 모두 외면하였기 때문에, 사공 베드로나 세리 마태와 같은 당시에 바닥에서 첫손에 꼽히는 자들이 사도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변두리서부터 하늘의 도를 전파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중심지인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3) 전도
그럼 예수를 외면한 권세 있고 돈 많고 유식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세례를 주는 요한에게로 몰렸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끝까지 주님을 강력히 증거했던들 이들은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주님을 증거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딴소리를 한마디 던지는 날이면, 그렇지 않아도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던 주님은 하루아침에 외톨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을 그냥 두면 여호와의 뜻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여호와가 세례 요한의 신변에 변화를 일으킨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지고, 친히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뭇사람들에게 칭송을 받더라.”(눅4:14-15) 이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여러 회당에서 이를테면 부흥사의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미리 증거해 주었기 때문에 단상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별로 힘들이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여 당신의 위치를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비교적 순조롭게 여러 회당에서 말씀을 증거하시고 가르쳤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까지 받았습니다.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례 요한의 입에서 귀가 아프도록 미리 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갈릴리 지방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 놓은 다음에, 당신이 30년 동안 자라나신 나사렛 동네의 회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앞서 며칠 전부터 예수가 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목수가 부흥 강사로 사방의 회당을 우레와 같은 갈채 속에 누비고 다녔으므로 그런 소문이 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물론 예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집에서는 문짝을 짜 준 일이 있고, 어느 집에서는 마루를 깎아 주는 등, 집집마다 거의 다 주님의 손길이 닿았던 것입니다. 단상에 올라간 주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이사야 61장을 펴시고 1절부터 읽어 나갔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여기까지 읽어 나가신 주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이 바로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더니, 주님을 향해 공격의 화살이날아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성경 말씀이 자기를 가리킨 것이라니, 거 무슨 허튼소리야.” 하긴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증거한 세례 요한도 이 이사야 61장의 성경 구절을 여러 번 읽었지만, 그것이 주님을 가리키는 말씀인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아무리 큰 선지자라도 자기의 분야밖에는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자기 동네에서 톱질이나 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던 사람이 한동안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나 성경 구절을 들춰내어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라니,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예수가 이들에게 아주 낯선 사람이라면 또 모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요1:44)는 말 그대로입니다.
4) 귀 있는 자
주님에 대해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저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그가 만일 메시아라면, 옛날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압박에서 해방시킨 것처럼, 오늘날 로마의 압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명은 그런 데 있지 않고, 더욱 원대한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죽음에서 해방시키는 길을 열어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면 누구나 ― 예수 이전에 죽은 사람이나 이후에 죽는 사람이나 ― 주님이 당신을 산 제물로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놓여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를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에게 갈 수 없다.”(요14:6)는 말씀은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메시아를 고작 제2의 모세 정도로만 알고 있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목수의 아들이 나타나 큰소리를 땅땅 치니, 납득이 갈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인용한 성경 구절만 해도, 그들은 그 뜻을 전혀 다른 각도로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거기에 나오는 ‘포로 된 자’란, 죄의 사슬에 묶인 자를 가리키며, ‘눈먼 자’란 성경 말씀을 보고도 모르는 자를 뜻하는 것이지만, 이들은 이런 대목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영적인 성경 말씀을 육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도를 가르칠 때, 맨 처음에 부딪친 벽은 실로 상대방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속으로 크게 한탄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알기 쉬운 비유를 들어 설득에 나섰습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주님은, “내가 땅의 것을 말해도 잘 모르는데, 하늘의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느냐?”(요3:12)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가르침이 상대방에게 잘 먹혀 들어가지 않으므로, 주님은 할 수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병을 고치는 권능을 보여 주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방편이고, 주님의 사명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죄에 매인 자를 풀어 주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었지만,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이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시비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마귀의 괴수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병을 고친다고 꼬집기도 하였습니다.(마12:24) 그러나 주님의 주위에 수많은 무리가 따르게 된 동기의 하나가 이 병 고치는 은사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처지에서 움직이시는 주님께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하여 하고 싶은 말씀도 다 못하시고, 당신의 능력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설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과 인간이 교류하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권능을 갖고 있어도 여건이 마련되지 않으면 그 권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설교하시는 중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을 자주 삽입한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신령한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없고, 듣는 귀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귀가 열리지 않으면 들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를 가리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귀가 할례 받지 못한 자라고 책망했습니다.(렘6:10)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 귀에 성령의 인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