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Part 01 - Chapter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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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7.19
[1권] Part 01 - Chapter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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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1. 아기별이 눈뜰 때 

Chapter 04. 알고 믿으라 



 세상에는 ‘성경도 사람의 손으로 쓴 글인데, 여느 책과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긴 성경도 사람이 쓴 책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느 책과는 다릅니다. 성령을 받아 그 인도에 따라 쓴 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성령)이 우리에게 깃들어 일깨워 주지 않으면 읽기는 읽어도 그 뜻은 잘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을 얼마나 충만히 받았느냐에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령과 악령, 영력과 정신력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고 많이들 혼동하거나 오인하곤 합니다. 점쟁이들 중에는 실로 놀라우리만큼 남의 지난 일이나 현재 당하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닥칠 일까지도 훤히 풀어헤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가 이것을 ‘미신’이라는 한마디로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뭇 인텔리 여성들이 즐겨 이런 술객들의 집을 드나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죽어서 천당 간다는 말보다, 술객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자기 신상에 대한 말이 한결 믿음직스러운 것입니다.


 요새 우리나라에서 상당히 화제가 되고 있는 노스트라다무스의 ‘대 예언’이라는 책자에서도 저자가 이 마력을 크게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도 몇 줄 훑어보았는데, 인류가 1999년도에 전멸된다는 대목이 이 책의 토픽거리지만, 그가 전신이 흐물흐물하여 죽어 갔다는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악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저자의 정체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귀가 솔깃하여 큰 관심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은혜 좀 받고 된 체하는 사람들 중에는 남과 이야기를 나눌 때 걸핏하면 이른바 악령의 ‘세력’이 온다 하여 별나게 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실은 매우 알쏭달쏭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언제나 성령과 악령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더러 우리의 잠재의식까지 곁들여, 이 세력이라는 것이 선입견의 조화인지, 악령의 장난인지 또는 성령의 지시인지 잘 분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류 역사는 성령과 악령의 싸움으로 일관되어 있으며, 이 싸움은 세 단계를 거쳐 종말을 고함으로써 하늘나라가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마귀가 인간을 사이에 두고 육적으로 투쟁하는 싸움,(사3:1, 대하 20:15, 신4:34 참조) 하나님과 마귀가 인간의 혼을 사이에 두고 겨루는 싸움(약4:7, 딤후4:7 참조) 그리고 하나님의 영과 마귀의 영이 대결하는 싸움(계11:7 참조)이 그것입니다.


 첫째 싸움은 구약시대의 싸움이요, 둘째 싸움은 신약시대의 싸움이며, 셋째 싸움은 천년세계가 지난 후에 잠시 무저갱의 마귀를 다 끌어내어 완전히 박살내는 싸움으로,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에 여호와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7일 만에 안식에 들어간 것처럼, 인류의 역사는 6,000년으로 종말 지을 것을 여호와께서 오래전에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인류 역사의 매듭을 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여호와의 경륜을 계시로 받아 기록한 다니엘은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기록하면서도 무슨 뜻인지 몰라 병이 날 정도였으므로,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천사는 마지막 때까지 봉해 두라고만 하였습니다.(단12:4)


 그것은 주님이 승천하신 후 다른 보혜사 성령이 일할 때가 되어야 떼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성경이 어떤 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쫓겨난 후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아주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과 그 후손에게 살 길을 열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설사 지상에서 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그들이 인간의 딸들을 좋아하여 육신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들을 멀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여호와 제일주의로 살다가 곁길로 흘러 여호와를 대적하는 격이 되어 수명까지도 줄어들었던 것입니다.(창6:1-3) 그럼 여호와께서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움직였는가? 이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육적인 싸움을 하던 구약시대에는 여호와께서 일일이 육적으로 인간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고 간섭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죄악에 물들어 가자 의로운 당신의 종 노아의 가족만 남기고 홍수로 멸한 뒤, 그 자손들을 의롭게 사는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여전히 죄악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신 가운데, 그 자손들에게 할례를 주어 당신의 백성으로 키워 오시다가, 당신의 백성들이 어느 정도 철이 들자,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어디까지나 육을 다스리는 법도로, 만일 ‘간음을 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자가 생기면 직접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싸움, 즉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로는, 율법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에 새겨지게 되었습니다.(히10:16) 이것이 곧 ‘자유의 율법’입니다.(약2:12)


 그리하여 가령 간음을 다스리는 경우에 있어서도 육적인 간음뿐만 아니라 속으로 그런 마음을 품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법도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었다고 해서 대뜸 극형을 내리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법도가 한결 엄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고 왔다.”(마5:17)는 주님의 말씀은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내리던 성령과 신약시대의 그것은 그 강도에 있어서 비교도 안 될 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지만,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불과 같은 성령을 받은 후로는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일찍이 주께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8)고 하셨는데, 이 생수로 비로소 우리의 자범죄는 물론 원죄와 유전죄까지도 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슥13:1)


 구약시대에 드린 제사는 자범죄를 씻는 데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레4:20) 만일 구약시대의 제사로 원죄나 유전죄까지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면, 구태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그대로 가지고서는 하나님 나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피로 씻고 깨끗함을 입어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갈 자가 없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요14:6)


 우리가 흠이 없는 아담의 후손이었던들 우리에게 죄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큰 죄에 떨어짐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혼이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즉 인간이 마귀의 술책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돌이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뜻입니다.(행3:21)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이 혼이 주님의 피로 아름답게 변화되어야만 주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혼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가 되어야만 사망의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 년이 차기까지 음부에 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계20:4)


 성령이 혼 위에 덧입혀지면 아름다운 영혼으로 화하게 되지만, 이 혼이 성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혼과 영이 합쳐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혼이 마귀의 편에 속하여 때를 벗지 못하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주의 성령과 합쳐지는 일은 자기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영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혼을 다듬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부어 주는 하나님의 종을 만나는 것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되지 않던 것이 이 손길이 한 번 닿기만 하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다듬고 손길로 씻어 세우는 역할이 이 하나님의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급선무는 혼을 씻어 영을 세우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부터 마련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아무에게나 와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9:15) 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어쩌면 하나님이 편파적이 아닌가 하고 잘못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손이 모자라 베풀지 못하겠느냐?”(사50:2)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혼이 깨끗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성령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긍휼을 베풀 자란 혼이 영과 합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어쩔 수 없는 법도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혼이 지저분하면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는 비결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와 같은 협력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밤낮 드러누워 낮잠만 자면서 성령 타령을 한다고 해서 마구 주신다면 그야말로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가령 우리가 기도할 때에도 “어떻게 하면 내 혼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지혜와 총명을 허락해 주셔서 내 속에 당신을 영접할 수 있는 여건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 하고 안타깝게 매달리십시오. 주님을 몹시 사모할 때, 그리고 주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를 가까이할 것이라.”(약4:8) 한 말씀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실 수 있는 여건만 갖춰지면, 성령은 오시지 말라고 해도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 이후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마11:12)는 말씀도 이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전하는 자가 아니면 어떻게 듣고, 들은 자가 아니면 어떻게 믿으리오.”(롬10:14) 알지 못하고는 믿지 못하는 법입니다. 신령한 말씀을 듣는 데서 혼이 자라고, 마음이 씻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먼저 말씀 가운데 서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