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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4.25본문
Part 02. 말씀의 갑주를 입고
Chapter 04. 주님을 에워싼 군상 (1)
1) 주님과 바리새인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주의’라는 뜻으로, 바리새인들은 한 종파를 이루어 율법을 빈틈없이 지키는 데 주력함으로써 일종의 특권층을 형성했으며, 따라서 이들의 세도는 당당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제일 괴롭힌 것도 이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마23:37-39)
이 말씀은 주께서 육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하늘의 도를 전할 때, 당시의 세대를 어떤 시선으로 보았는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자비하게만 보이기 쉽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주님에게는 불의 앞에서는 추호도 타협하지 않는 칼날 같은 면도 있었습니다.
즉 가난하고 병든 약자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웠으나, 당신에게 강하게 도전해오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들에게는 냉혹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저들은 당시에 교권(敎權)을 장악하고, 말로는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정작 오신 메시아를 그처럼 푸대접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주님은 이들에게 추호도 양보하지 않고, 추상같이 대하였습니다. 흔히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이지만 주님은 반대였습니다.
그리하여 강자인 이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매섭게 들이쳤습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23:27)
목수의 아들인 새파란 시골 청년이 위세가 당당한 저들에게 이렇게 쏘아붙였으니, 당시에는 오히려 무척 당돌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저들에 대한 주님의 공격은 독설(毒舌)로 번져 저주하기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마23:33-35)
이쯤 되고 보면 저들은 고대하던 메시아를 만나게 된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저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맨 앞에 인용한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말씀은 너희와는 재림할 때까지 다시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무서운 선언인 것입니다.
만일 이들이 주님을 그토록 괴롭히지 않았던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근 이천 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 세계를 유리 방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저주가 떨어진 후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는 예언은 40년도 못되어 로마의 침입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 당시에는 제자들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으나,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하늘의 도를 전파하려면 마땅히 교권을 쥐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들에게 그처럼 가혹하게 대했을까요? 주님은 결국 자기가 저들의 손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그들에게 목숨을 내맡긴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두려울 게 무엇이며, 주저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주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울을 제외하고는 저들 중에서 이렇다 할만한 주의종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저들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면서 갖은 학대를 받아 왔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히틀러의 600만 유대인 학살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나라를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인구가 겨우 300만, 그나마도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과의 무력 충돌이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여호수아의 잘못도 있지만, 주님의 저주가 그대로 응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이미 ‘열매 맺는 백성’에게 옮겨갔으나,(마21:43)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숙원인 나라를 되찾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계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려 주시는데 어찌하여 그 나라에는 피비린내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까?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이미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경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렇게 두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2) 주님과 니고데모
여러분은 주님과 니고데모가 중생(重生)에 대해 주고받은 이야기의 내용을 성경에서 읽어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당시에 주님은 시골의 젊은 목수요, 니고데모는 나이가 지긋한 이스라엘의 지도급 인사였으므로 일반사람들의 눈에는 두 사람이 서로 어울려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격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대의 유명한 이 선생님이 시골 목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은 영적인 이야기를 하시는데, 니고데모는 육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인간의 아들 사이에는 목수와 학자라는 겉모습과는 달리,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가 희한한 이적과 기사를 행한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예수를 밤에 몰래 찾아갔습니다. 낮에 찾아갔다가 남들이 보면 위신이 깎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께서 “다시 나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인간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나면 그만이지,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하긴 주님의 말씀을 육적으로 받아들이면 옳은 질문입니다. 주께서 대답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그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0-13)
여기서 ‘우리’란 주께서 하나님을 당신과 한데 묶어서 지칭한 것입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당신은 이스라엘의 선생인데,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군요. 나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는데.” 하고 점잖게 책망하고 나서 “하늘에 올라간 자는 나밖에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여기서 ‘올라갈’이 아니라 ‘올라간’이라는 시칭(時稱)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언제나 하나님과 교류하여 하늘나라에 무상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육신은 비록 땅에 거하지만, 영은 수시로 하늘나라에 왔다 갔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니고데모는 어떤가? 그는 하늘나라에 대해서는 소경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땅의 것을 비유로 들어 이 하늘나라를 여러 차례 증거했으나,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는 말씀은 당시의 소식을 아울러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는 말씀에는 니고데모가 주님을 ‘랍비’(선생)로만 알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몰라주는 데 대한 불만이 깔려 있습니다. 즉 이 말씀 가운데는,
“나는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당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소. 내가 비록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 신령한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라는 것을 당신은 알아차려야 할 게 아니오.” 하는 항의 아닌 항의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러니까 주님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발설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니고데모 한 사람 앞에서 하셨지만, 실은 전 인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무작정 증거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 그래서는 아무도 전혀 믿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믿을 만한 언동(言動)의 밑받침에 의해 당신을 증거했습니다. 즉 많은 이적, 기사와 아무도 모르는 신령한 말씀을 앞세우고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반응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형편이 없었습니다.
하기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사53:2) 시골 청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많은 이적과 기사로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으나, 끝까지 주님을 믿고 따른 자는 12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즉 예수가 자기를 사실 그대로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위대한 선지자 정도라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한 마디로 그만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발길을 주춤했던 것입니다.
만일 누구나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만 하면 목숨을 내걸고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을 얻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 설교집을 읽고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지만, 내가 아무개라고 하는 것만은 얼른 수긍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오늘날 그처럼 인기가 땅에 떨어진 감람나무를 구태여 다시 들먹이려고 하겠습니까? 나도 그러기 싫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라고 하시니 어떡합니까? 그것은 이영수 개인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