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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4.25본문
Part 02. 말씀의 갑주를 입고
Chapter 04. 주님을 에워싼 군상 (2)
3) 주님과 유다
성령을 받고 공적(公的)인 생활에 접어들기 이전의 인간 예수는 외관상으로는 평범한 시골 목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초인간적인 비범한 존재로 돋보여 누구나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 그대로, 조금도 뛰어나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사53:2-3)
그러기에 이웃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님의 육적인 동생들도 형님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집을 나간 지 얼마 후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그 입에서 신령한 말이 쏟아져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도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30년 동안 같은 지붕 밑에서 한솥밥을 먹고살았으나, 보통 사람과 별로 다름이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남의 집에 돌아다니면서 마루도 놓아주고, 궤짝도 짜주고는 얼마간의 삯을 받아 가난한 살림을 그럭저럭 꾸려 나갔던 것입니다. 낮에는 대패질이나 못질을 하기에 분주하고, 밤이면 당신의 방에서 손수 짠 책상 위에 커다란 성경책을 펴놓고 하나님께서 당신에 관해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어가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나이 30이 가까워 죽을 날이 점점 임박해 오자, 주님은 사형선고를 받은 자의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죽음이 한때의 수난에 지나지 않더라도 수모를 당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처형되는 장면을 생각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엎드려 당신의 사명을 무난히 마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 사명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나이 30이 되자,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손길을 통하여 놀라운 권능이 나타나고, 그의 입술을 통하여 희한한 말씀이 쏟아져 나오자 사람들은 구름같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한 마디에 걸려 이들은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갔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유일한 걸림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제자들 중에서도 신임이 두터워, 이를테면 경리를 담당하는 측근이었으나, 주님을 은 30냥으로 팔아 넘겼습니다. 유다가 돈이 아쉬워 이런 짓을 한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유다는 주님을 팔았을까요?
주님은 열두 제자들과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하늘의 새 복음을 전해야 했으므로,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하였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끝가지 주님을 시인하였던들 주님의 주위에는 유력한 인사들이 많이 모여들어 이런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되었을 테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은 전도 비용을 손수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돈푼이나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에게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얻은 돈을 일단 유다의 손을 거쳐 지출케 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누구누구에게서 얼마가 들어왔다는 돈줄의 내막을 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주님에게 재정적인 뒷바라지를 제일 많이 한 사람은 기생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자연히 막달라 마리아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상한 눈으로 주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기생에게서 돈을 타 쓰다니, 이럴 수가 있나?” 이것이 유다가 주님과 원수가 된 가장 큰 동기였습니다.
주님을 육적으로만 생각하다가 끝내 떨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를 조용히 불러서 잘 타일러 그 마음을 돌이키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다를 예언서의 악역으로 내던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다는 주님이 제자들 중에서 가장 신임하고 돈주머니까지 맡긴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배반하여도 유다는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것이 도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주님을 기어이 팔아넘기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만저만한 배은망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시고, 유다를 마귀에게 내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공적으로 일하실 때와 사적으로 움직이실 때가 달랐으며, 또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주님은 일반 사람들 앞에서는 당신의 체모를 위해 되도록 모세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되지만, 사사로이 행동하실 때에는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자유 율법의 주인공으로, 모세도 주님을 통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요10:8) 그러나 이런 이치를 모르는 대중 앞에서는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체라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께서 성전세를 낸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며,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버지 집에 아들이 들어가는데 세를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필요한 말썽을 일으키기 싫어 성전세를 냈던 것입니다.
주님은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육적으로는 요셉의 아들이므로 생활자체도 이중성(二重性)을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주님의 이런 이중성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가롯 유다는 그 대표적인 인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주님과 무화과나무
오늘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이천 년 동안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이 입증해 주기 때문에 우리가 비교적 믿기 쉽지만, 주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목수 노릇을 하면서 겨우 살아가던 시골 청년이 불쑥 나타나 몇 가지 이적과 기사를 한다고 해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언동을 가까이서 지켜본 제자들까지도 긴가민가하게 생각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여기서 무화과나무에 대한 주님의 언동을 예로 들어, 하늘과 땅 사이의 움직임을 잠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막11:12-14)
주님이 하나님의 도를 전하기 위해 돌아다닐 당시는 오늘날과 달라서, 매식하기가 간편치 못해 끼니를 거르기가 일쑤였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베다니 마을에 이르렀을 때 몹시 시장하여 무화과나무의 열매로 요기를 하시려고 두루 살펴보았으나, 아직 계절이 일러 열매가 맺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물론 나무의 탓이 아니며, 나무에게 잘못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주님은 하도 시장하여 은근히 화가 난 김에 앞으로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했습니다.
이 저주는 주께서 무심코 던진 것이며, 무모하고 천진스럽기까지한 언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는 저주는 나무가 나무 구실을 못하고 죽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말씀이 그대로 응해졌기 때문입니다. 즉 이튿날 베드로가 보니 그 무화과나무는 뿌리까지 말라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님은 하나님께서 종으로 들어 쓰시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아들이므로 그 말에 응분의 권위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위신도 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저주가 다만 저주에 그치고 아무 반응이 없다면 주님은 체통이 서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 자신의 권위에도 손상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사 나무라 할지라도 저주를 면치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기독교의 원리가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나무를 저주하여 그것이 응해지게 했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나무는 주님의 저주를 받고 말라죽었습니다.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나무에게 입이 있다면,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대뜸 항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항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주님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저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독교에는 인간의 이치로 따질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초인간적(超人間的) 인 절대성(絶對性)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8)는 바울의 말도 이런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누구를 긍휼히 여기시고, 누구를 강퍅케 하신다는 것입니까? 바울은 이런 항의를 예상했던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리가 없느냐?”(롬9:21)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 최대의 선이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 최대의 악입니다. 성령을 훼방한 죄가 사함을 받을 길이 없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기독교가 세상의 도덕과 크게 다른 점입니다.
빌립이 주님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했을 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은 일체이십니다. 주님은 선지자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주님 당시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들에게는 초라한 시골 청년이 거침없이 던지는 이런 말들이 당돌하고 무엄하게 들리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주님이 율법을 예사로 범하고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요10:8)라고 했을 때에는 자기가 혹시 잘못 걸린게 아닌가 하고 불안하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두가 율법주의자들이었으므로 그럴 만도 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100% 믿지 못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