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권] Part 02 - Chapter 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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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4.25
[6권] Part 02 - Chapter 0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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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2. 말씀의 갑주를 입고  

Chapter 05. 이것이 이긴자이다(1)


1) 이긴자의 증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묘한 데가 있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얼른 깨우치는 것이 아니고, 머리가 나쁘다고 해서 더디 깨우치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 많이 배운 사람이 잘 알고, 못 배운 사람이 잘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또 성경은 머리를 싸매고 꾸준히 연구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요컨대 성경을 깊이 아는 지식은 하늘에서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기록된 이긴자에 대하여 근 이천 년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학자와 교역자들이 읽었으나,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못됩니다. 육에 매여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의 세계나 그 말씀을 안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긴자가 나타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은 것도 주님 당시와 일맥상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낸 후에는 치리의 방법이 판이하게 된 것처럼, 주께서 당신의 피 권세로 이긴자를 세우신 후에는 섭리의 양상이 달라집니다. 즉 이긴자를 통하여 큰 은총을 베풀어 알곡을 거두는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하리라.”(3:21) 이를테면 이긴자는 주님의 전권대사로 땅에서 주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그늘 아래 거하는자라야만 세 증거(, 이슬, 생수)의 은총을 힘입어 십자가의 군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14:7 참조)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을 공경했으나, 주님이 오신 후에는 주님을 도외시한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긴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모든 신도들이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공경했으나,

 

이긴자가 나타난 연후에는 그를 통하여 주께서 역사하므로 그 섭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11:3-4 참조) 그렇지 않으면 이긴자, 곧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풀이할 뿐, 결코 나를 내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긴자는 주님 및 세례 요한과 함께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종이며, 결코 선지자나 사도와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 권능이나 설교가 선지자나 사도를 능가해야 합니다. 즉 그는 성령을 힘입어 큰 권능을 행하고, 주께서 못 다하신 말씀을 터뜨려야 합니다.(2:17 참조) 그리고 이것은 오직 이긴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이긴자가 주님의 말씀과 바울의 서신이나 풀이해서 전한다면 아무 존재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이긴자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성령의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긴자의 속성과 사명에 대해 분명히 기록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신학자나 성경 주석자들 사이에도 이 이긴자에 대한 견해가 구구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긴자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고 믿음을 다져야 할 교역자나 신도들도 말씀에 올바로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긴자의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계시록에 보면 이긴자에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그 특성은 두 가지로 요약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 그대로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쥐고 큰 은혜와 새로운 말씀을 쏟아내는 것이며,(2:17) 또 하나는 역시 말씀 그대로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나눠주는 것입니다.(21:6-7)

 

그러므로 누구라도 성경에 예언된 존재인 이긴자라면 이 말씀이 그대로 응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이긴자란 주의 피로 온전히 씻음을 받아 뭇 사람에게 값없이 큰 은총과 새로운 말씀과 생수를 실제로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호세아서에 기록된 이슬 같은 은혜나(14:5) 하나님의 뜻과 경륜과 마지막 이루어질 일을 밝히는 새로운 말씀을 터뜨리고, 생수로 빳빳이 굳은 죽은 자의 시체가 아름답게 피어나고, 안찰하여 성령을 부어주고, 신령이 맑아지고, 향취를 맡는 등의 역사가 실제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로 병이나 고치고 약간의 이적이나 곁들인다고 해서 이긴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일은 많은 사람들이 해왔으며, 또 현재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은총들은 이긴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즉 그것은 주께서 이긴자를 통해서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육에 매여 영의 역사를 소홀히 알기 쉽습니다. 이것은 이 역사를 알고 따르는 여러분에게도 하나의 함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온 땅에서 3분의 2는 멸절하고, 3분의 1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3분의 1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13:8-9) 이 말씀은 우리의 역사에 그대로 해당됩니다.

 

2) 이긴자의 직분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은 알기 어렵기도 하고 알기 쉽기도 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알기 어렵고, 성령을 받으면 알기 쉬운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설교하실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은 극히 적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답답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었습니다.

 

주께서 큰 권능을 행한 고을 사람들일수록 주님을 우습게 여겨 완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예컨대 가버나움 사람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주께서 화가 나서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11:23) 하고 꾸짖을 만도 합니다.

 

저들은 주께서 아무리 오묘한 진리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습니다. 특히 지식층이나 세도가로서 내로라하는 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주님은 하도 기가 차서 하나님께 고했습니다.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11:25) 여기서 말하는 지혜슬기는 물론 인간의 그것이며, ‘어린이는 순진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뭐 좀 안답시고 교만하거나 세도깨나 부리는 자들은 진리에 어둡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혼은 있어도 주의 영이 깃들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진리를 알려면 주의 영을 받아 눈과 귀와 생각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눈앞에 있더라도 몰라보는 사람에게 주님은 밥 한 끼 먹여주는 이웃사촌만도 못한 것입니다. 아니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남이 되어 버립니다. 주님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그처럼 환영을 받지 못했으니, 다른 하나님의 종들이 푸대접을 받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긴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긴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3:12)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밖에도 이긴자에 대해 여러 가지 기록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계시록 강해에 대충 설명했지만, 오늘은 이 본문 말씀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 보면 이긴자를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기둥은 이긴자가 해야 할 직분을 상징적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성전에서 이긴자가 주의 피 권세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심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이긴자는 성전에서 결코 다시 나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에서 언제나 기둥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끝마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긴자에게 기록하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요, 둘째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고, 셋째는 주의 새 이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뭡니까? 여호와입니다. 주님의 이름은요? 예수입니다. 그럼 이긴자에게 여호와라는 이름과 예수라는 이름을 기록한다는 뜻일까요? 이것 역시 상징적인 표현으로,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크신 경륜과 감춰진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럼 주의 새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께서 앞으로 펼칠 새 역사(役事)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긴자는 이 양자, 즉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는 모든 상세한 내용을 환히 알게 되어 있습니다.

 

다음에 새 예루살렘의 이름도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이란 자유의 예루살렘’(4:26)이요, 어린 양의 아내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21:10)이며, 따라서 예루살렘의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새 나라를 창조하시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며, 주의 재림에 반드시 필요한 여건이 되는 일정한 수의 주의 아내, 곧 하늘 군병의 명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긴자는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는 말씀의 깊은 내용과 앞으로 이루어질 일은 물론,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생명책에 녹명된 의로운 성도와 당대에 땅에서 구속되어 기록된 성도의 명단을 알게 마련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선지자나 사도들은 자기 시대에 해당되는 하늘의 새 소식을 전하는 데 그쳤습니다. 모세도 그렇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긴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그 움직임에 대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다 알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입을 통하여 새로운 말씀이 터져 나가고, 그의 손길이나 입김을 거쳐서 희한한 권능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마무리 짓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의 지시에 따라 할례 폐지론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큰 고역을 치렀습니다. “네가 뭔데 성경에 없는 말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항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덮어놓고 항의부터 하기 전에, 우선 바울에 대해 그 권능이나 영력, 그리고 말의 깊이를 세밀히 검토해야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비슷한 속단(速斷)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3층천에 간 이야기를 14년이 지나, 자기의 기반이 잡힌 후에 비로소 발설한 것처럼, 나도 여러분의 심령이 아직도 어리고, 또 모인 인원수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깊은 단계의 말씀을 마음대로 터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여러분 자신부터 좀 더 말씀으로 다듬어져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