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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10.19본문
Part 04. 우리도 이기리
Chapter 24. 오늘의 우상 숭배
우리가 영의 세계에 대해 알려고 할 때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우리의 사고방식(思考方式)입니다. 우리는 육을 입고 땅에 발을 붙이고 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이 육의 세계에 얽매어 여기서 거의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이야기를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아, 그런가 보다 하거나 긴가민가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늘의 소식을 전할 때 크게 애먹었으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주님이었습니다.
주께서 한껏 영의 양식을 제공해 주면 상대방은 번번이 육의 양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실 때 비유를 많이 들고 또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그 완악한 마음의 벽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주님뿐만 아니라 모세도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통하여 하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서에서도 이런 경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이 나라의 도백(도지사)으로 있는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통하여 이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당신을 찬미하게 했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높이 약 30미터나 되는 커다란 신상(神像)을 만들고, 낙성식을 올릴 때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그 자리에 참석하여 나팔과 피리와 현금 등, 요새로 말하면 오케스트라(관현악) 연주가 은은히 울려 퍼지면 누구를 막론하고 이 신상에 절을 해야 하며, 만일 이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시뻘겋게 타오르는 풀무 불에 던져버리겠다고 온 백성에게 공포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들은 일제히 그 신상 앞에 절했는데 다니엘의 친구로 도백에 임명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세 사람만은 신앙의 양심상 도저히 왕의 명령에 따를 수 없어 신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그러자 갈대아 사람 하나가 이것을 보고 즉시 왕에게 고했습니다.
“폐하, 저 도백으로 있는 유대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신상에 절을 하지 않고 빳빳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폐하의 은덕으로 큰 관록을 받아먹는 사람들이 이럴 수 있습니까? 즉시 풀무 불에 던지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여러분, 이 세 도백의 신앙을 보십시오. 이들은 실로 뜨거운 순교 정신에 불타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을 지키기 위해 도지사의 자리를 헌신짝같이 내던졌을 뿐만 아니라 목숨도 바칠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의 말을 듣고 괘씸하게 여겨 예고대로 불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타죽기는커녕 머리칼 하나도 상하지 않고 멀쩡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불 속에 분명히 세 사람을 던져 넣었는데 왕의 눈에는 네 사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 불 속에는 확실히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럼 또 한 사람은 어떻게 된 걸까요? 그는 세 방백을 돕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천사였습니다.(단3:25 참조)
느부갓네살 왕은 깜짝 놀라 외쳤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그가 사자를 보내어, … 다른 신에게 절하지 않은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단3:28) 그럼 천사가 어떻게 보호했기에 불 속에서도 이들 세 방백은 머리칼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천사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이들의 몸에서 냉기를 발산하게 하여 열을 식혔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적은 옛날 구약 시대에만 있은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교역자나 성도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사례(事例)를 종종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면 핵폭탄 속에서도 재난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허황된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해를 멈추게 하여 기상을 변동시킨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천지이변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우상 숭배의 개념이 상당히 확대되고 있습니다. 즉 우상 숭배란 구약 시대에는 주로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을 가리켰으나 오늘날에는 주님보다도 세상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도 이에 속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가 내게 합당치 않다.”(마10:37)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니 돈이나 권력, 명예를 주님보다 더 존중하는 것은 물론 일종의 우상 숭배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돈에 절하고 권력에 절하고 명예에 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신앙인들 가운데 이런 분을 더러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를 붙잡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놓치면 육에 매이고, ‘내’가 살아나게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내 자식, 내 집, 내 목숨을 주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사람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불러 주신 것이지, 내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닐진대, 참된 그리스도인은 내가 살기 위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기 위해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14:8)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마음가짐입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