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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1.14본문
Part 05. 진리의 등대
Chapter 37. 베드로는 왜 주님을 부인했는가?
나는 전에 베드로와 바울의 갈등에 대하여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앞선 역사와 나중 역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고 불신자를 하루에 3,000명이나 주 앞으로 인도할 때의 기세는 대단했으며, 따라서 사람들의 눈에는 매우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역사한 바울은 기껏해야 하루에 열두 명 가량밖에 전도하지 못하여 매우 고전했으나,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를 따르던 신도들은 결국은 바울의 산하에 통합되었습니다. 바울이 다른 사도들보다도 더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고전15:10) 바울이 한 일이 주님께 더욱 합당하고, 그것이 주의 뜻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주의 수제자로서 주님에게 남달리 충성을 다하였으나, 주님 생전에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 앞에서 “주님은 구세주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고백하고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하고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를 모른다고 부인한 사실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마26:75)
그럼 무엇 때문에 베드로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하였을까요? 베드로는 3년 동안 주님과 기거를 같이하면서 5병2어의 이적을 비롯하여 많은 기사를 눈으로 보고, 신령한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과 행동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하는 데는 이의(異議)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왜? 이유는 무지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야만 했으며, 그 독생자는 어찌하여 인간과 똑같은 육을 입어야 하고,
독생자가 굳이 피를 흘릴 필요가 어디 있는지를 베드로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언동이 뛰어났을 뿐, 육적으로는 어느 모로 보나 자기와 다를 바가 없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이 점에 대해 입으로는 시인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긴가민가하여 의혹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베드로는 좀 나은 편이었습니다. 입으로나마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할 정도는 되었으니까요.
주님은 별로 내색하지 않았으나,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얼마나 고독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제자들까지도 당신을 알아주지 않는 주님의 심경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엄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제자들에게도 아들 행세를 할 수 없는 주님의 안타까움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주님의 말씀은 아직 당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는 안타까운 의사표시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이 당신의 정체를 인정하지 않으니 어떻게 제대로 행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베드로를 비롯하여 제자들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웠던 직접적인 동기는 어디 있었을까요? 그것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요컨대 주님의 움직임에 석연치 않은 일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여자와 관련된 문제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당시의 세도가나 부유층에게 외면당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할 수 없이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적지 않은 자금 지원을 받게 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막달라 마리아와 자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천한 기생이므로, 점잖은 사람이면 누구나 드러내놓고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처지였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이런 부류의 여자와 상종한다는 것은 제자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저마다 웅성거리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은 우물가에서 이방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서슴지 않고 물을 받아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교 율법으로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마리아 여인은 요새의 속된 말로 하면 대폿집 접대부와 비슷한 여자였습니다. 주님이 이런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데 그치지 않고 물까지 받아 마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와 그 밖의 제자들은 또 웅성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럴 수가 있나?” 그들은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저들은 주님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치 않는 데서 오는 웅성거림이요 의심인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주님의 존재를 100% 분명히 알았던들 “우리는 안 되지만 그런 일쯤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할 수 있으며, 또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저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리송했기 때문에 이렇게 의혹을 느꼈고, 의혹을 느꼈기 때문에 더욱 주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컨대 자기의 척도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판단하는데서 오는 폐단이었습니다. 즉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언동을 선지자의 차원에서 비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움직임을 올바로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척도가 다르니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은 무지한 상대방으로 하여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가불 선지자의 선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고 말씀하시고, 다른 보혜사 성령에게 당신에 관한 일을 많이 의탁하였습니다. 즉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16:12)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당시에는 이런 진리의 말씀들이 돌보다도 더 딱딱하여 좀처럼 소화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하셨는데, 이런 이야기는 소화하기 어려웠습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말씀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은 요컨대 주님이 아니라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을지 모르지만,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긴자를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머리로는 일단 알고 있는 것으로 자처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의 관념(생각)에 그치고, 실제로 하나의 신념, 즉 믿음으로 굳혀 있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경우처럼, 이긴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어떤 차원에서 움직이는지 확실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이긴자에 대해 여러 가지 형태로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하여 이긴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적을 일으켜 온갖 신령한 체험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긴자임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소의 이적이나 기사는 여느 교역자들도 할 수 있으므로 혼동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앞선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의 종이 일으킨 이적과 기사는 주님 당시를 방불케 하여 그 위세는 3년 동안에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한 자연인(自然人) 아무개가 한 일이 아니라, 주께서 일으킨 역사였습니다. 즉 주께서 이긴자 감람나무의 역사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보여 준 놀라운 이적이요, 기사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통하여 일찍이 상상도 못한 은혜, 가령 이슬 같은 은혜가 제단에 뽀얗게 내리고, 안찰로 마귀를 쫓아내고, 향취가 진동하고, 설교하는 장면을 촬영하면 천사가 호위하고 불기둥이 쭉쭉 뻗어 있는 모습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또한 신유의 은사도 강하여 무수한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무려 수십 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뭇 사람들이 은혜의 창파에 젖어 기뻐서 미친 듯이 날뛰며, 집을 팔아 바치고, 가락지를 뽑아 헌금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그를 따랐으며, 무수한 총각 처녀들이 주를 위해 청춘을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역사는 어떻게 되었으며, 또 되어가고 있습니까?
주의 종을 구세주같이 떠받들던 무수한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와 원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사명은 이미 끝났지만 그를 통하여 내린 은혜는 하나님의 것이었으며, 그는 성경에 예언된 이긴자 감람나무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뭐라고 떠들어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나는 그 밑에서 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왜 하나님의 사람이 이렇게 행동하나, 저렇게 처신하나, 하고 의아하게 여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제 와서 내가 그 위치에 서서 생각해 보니, 그의 모든 움직임이 하나하나 납득이 갑니다.
우리는 인간 아무개는 부인해도 그를 통해서 내린 보혜사 성령의 역사 자체를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박 아무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긴자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생수를 유업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계21:7) 그러므로 이것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져야 비로소 이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긴자를 가리켜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긴자의 아버지라고 사도 요한에게 언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이긴자를 통하는 것이 주님께 이르는 지름길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전에도 여러 번, 한갓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인간 이영수를 보지 말고, 이영수를 들어 쓰시는 주님의 역사가 무엇인가를 유의하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이 못난 것을 앞세워 이모저모로 간섭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간섭하실 것입니다. 주께서 이처럼 나를 가까이하시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감히 이 어마어마한 일에 나설 엄두가 나겠습니까?
나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지시 내용을 일일이 자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이것은 나의 큰 밑천입니다. 그토록 빗발치는 비난과 중상 속에서 이것이 없었으면 나는 벌써 기진맥진하여 쓰러졌을 것입니다. 나는 적당한 시기에 그 내용을 활자화하여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