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DATE. 2025.01.22본문
Part 01. 승리의 십자가 아래서
Chapter 01. 기독교 윤리에 대하여
- 선, 악의 갈림길 -
기독교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립된 종교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이외에 관여하는 자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입니다. 즉 두 신이 인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기편으로 끌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처럼 하나님과 마귀와 인간이 3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약 100년쯤 되는 동안에 많은 교파가 생기고, 신흥 종교, 유사 종교, 사이비 종교 등 그 분포도가 매우 다양한 것은 기독교의 이러한 복잡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각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 믿고 있습니다. 즉 내 마음이 평안하고, 위로를 받고, 하는 일이 잘 되고, 나아가서는 내세에 영생을 얻기 위해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이득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올바른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득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믿고 의지하는 데서 오는 결과 내지 소득이지, 그것이 목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만유의 근원이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위해 믿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중심이며 인간 중심일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유래부터가 그렇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불러 세웠으며, 결코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데는 헌신과 희생이 따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평화보다도 번거로움이, 즐거움보다도 괴로움이 앞서게 마련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왜 하나님을 믿으면서 애통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자기가 죄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음을 알고 애통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어려워 애통하고, 사랑이 부족하여 애통하고, 기도가 모자라 애통하고…,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실로 애통할 일 투성이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저절로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구나!”(롬7:24)하는 탄식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기독교는 깊이 들어갈수록 시련이 커지며,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칩니다. 즉 처음에는 넓은 문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는 좁은 문을 지나야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이 좁은 문을 외면하고 넓은 문으로만 들어가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그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들은 주께서 약속하신 불과 같은 성령을 받고 용기백배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목숨을 내걸고 증거하였으며, 신도들도 전도에 힘써 기독교의 터전을 닦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자기를 위해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자기를 희생했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실로 이들의 거룩한 희생의 대가로 오늘날 전 세계에 전파되어 인류에게 소망을 안겨 주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부터가 그렇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수 일을 하기를 원하시기에 그렇게 했고, 하나님께서 하늘의 새로운 법도를 전파하기를 원하시기에 그렇게 했으며, 특히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시기에 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본위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님 본위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믿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고후5:15) 우리가 예수를 잘 믿고 못 믿는 것은 이것으로 구분됩니다. 자기가 아쉬울 때 주님을 찾고, 자기에게 아쉬울 것이 없으면 주님을 멀리하는 신앙은 주님과는 무관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의 12 지파에서 각각 한 명씩 정탐꾼을 뽑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보내어 40일 동안 현지답사를 시켰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포도 한 송이가 달린 가지를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돌아올 정도로 곡식이 잘 되는 살기 좋은 고장이었으나,(민13:23)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의 10명은 “가나안 땅의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하면서 쳐들어가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복된 지역임을 저버린 자기 나름의 소심한 태도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들은 광야에서 쓰러지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윤리가 무엇이며 선악이 어디서 갈라지는 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윤리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법도를 받드는 것이 선이요, 어기는 것이 악입니다.
우리는 세상 법도에 따라 한 인간의 덕성에 대해 여러 모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착하다. 똑똑하다. 담대하다. 욕심꾸러기다. 미련하다. 고약하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윤리에서는 이 모든 덕과 부덕의 기준이 하나님으로부터 정해집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받들고 준행하였느냐에 따라 선, 악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붓고,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지혜를 요구하였고, 하나님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역대의 어느 왕들보다도 푸짐한 물질의 축복도 내렸습니다. 즉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다른 신만 섬기지 않으면 다른 것은 네 마음대로 해도 무방하다.”는 특권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을 면치 못했습니다.(왕상11:11)
그럼 오늘날 우리의 신앙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역사는 분명히 인간이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지시하고, 간섭하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의 뜻을 받들고, 그 뜻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즉 여러분은 자기를 위해 이곳에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 충성하기 위해 이곳에 나온 것이며, 그것을 또 주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역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나를 버리고 주를 위해 살려는 각오를 해야 하며, 또 실제로 주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위해, 괴로우나 즐거우나 여러분이 헌신하고 희생해 줄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마16:24) 그러므로 우리가 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지만 그래도 가야 합니다. 왜? 주께서 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기 나름으로 이 역사를 판단하고 ‘나’를 앞세운다면 스스로 견디지 못하여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처럼 큰 은혜 안에 접어들었다가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다면, 차라리 주의 종을 만나지 않은 것만도 못합니다.